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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신 도울 자 (시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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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재주를 가진 자가 한 가지 분명한 재주를 가진 자 보다 못한 것처럼 도울자가 많다고 여기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는 분명한 한 분, 구원자를 의지하는 자보다 못하다. 다윗의 시로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라 하였으니 이는 “새벽의 사슴”이란 말로서 고난당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곤고한 중에 드리는 기도를 뜻한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한 데도 처할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환경과 여건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언제나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의 능력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강인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훈련시키십니다. 때때로 우리를 고통 중에도 놓으시고, 환난 중에도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짖어도 못들으신 척 응답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소원하고 바랐던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응답 이상의 응답을 하시기 위하여 때때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1. 열조의 하나님. 시인은 여호와를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로 고백하며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다고 고백하니 역사의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개인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살아계셔서 내 삶에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2. 이방의 조롱.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를 잊지 아니하시니 고난 중의 그의 자녀가 “(마27:46)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탄식하나 고난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원수들은 입을 삐죽이며 머리를 흔들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지만 원수의 조소는 하나님이 다시 높이 올리실때에 사라지게 된다.
3. 연약한 상태.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원수의 발아래 그의 자녀를 두시니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며 개들이 에워싸고 상처를 핧으나 하나님이 올리실 것이니 하나님은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유일한 생명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시되 사자와 같고 들소와 같은 원수의 위협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4. 주께 부르짖는 간구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면서 사는 건강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꼭 알아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달리 부르짖어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구해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 응답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면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어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되는 자리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응답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미리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와 부르짖음에 응답지 아니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첫째, 보다 좋은 것을, 보다 좋은 때에 주시기 위함입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모르드개가 반역자의 음모를 아하수에로 왕에게 일러주어 왕의생명을 구하는 공을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잊어 버립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하여 그를 죽이기 위해 높은 장대를 세우고 왕에게 허락을 맡기 위하여 왕에게 나오기 전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애쓰다가 왕궁의 사기를 읽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모르드개가 자기의 생명을 건져준 사건을 다시 읽게 되고, 그는 자기가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잊어 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왕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후회합니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무엇보다도 모르드개에게 후한 상을 내려야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왕을 찾아온 하만에게 왕은, 왕이 존귀케 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묻습니다. 하만은 그것이 자기를 말함인 줄로 착각하고, 왕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왕위 옷을 입히고, 왕이 타시는 수레에 태워 왕이 가장 귀히 여기는 사람으로 고삐를 잡게 한 후 성을 돌며, 왕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이렇게 한다고 선포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왕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하만에게 말합니다. "모르드개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수레에 태워 네가 고삐를 잡고 온 성을 돌며 외쳐라." 얼마나 근사하고 극적입니까 이 모든 일이 우연한 일로 여겨지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정확하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응답하기를 원하실 때에 잠잠하십니다. 그 이유는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 7:11)
둘째, 연단을 통하여 우리를 보다 강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꺼져가는 등불과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아니하는 타오르는 횃불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며, 단단한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언제나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약한 자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로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기독교는 강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에레미야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예레미야의 질문이 나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형통하고 그 들는 편안한데, 하나님을 열심히 바로 믿으려고 애쓰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환난을 당하며 어려움을 당합니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쯤은 품었던 의문이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질문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편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이 질문 속에 하나님의 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 속에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행자와 함께 경주하면서 불평하고 쩔쩔매는 연약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말과 경주할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편안한 땅에서나 겨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도 능히 사는 삶의 능력자로 키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언제나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셋째, 좀더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르짖으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저는 이 말씀이 좋습니다. 그 말씀에는 강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삶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깨끗한 욕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삶의 의욕이 있어야만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뒤돌아보지 아니하고 달려가는 정신이 있어야만 하며, 늙어도 꿈꾸는 건강한 생명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 그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깨끗한 욕심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무관심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지 아니하는 맹목적인 신앙과 삶의 무기력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욕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건강한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팔복 중에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르짖으라, 내가 성산에서 응답하리라.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하시고, 두드리면 열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른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며 살면 반드시 삶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는 왜 믿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적인 신앙생활을 습관적으로 하는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왜 믿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답 중의 하나는, 예수는 복 받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유치한 수준의 신앙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르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축복하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삶의 무능력자임을 고백한 말씀입니다.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잘압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에서가 야곱보다 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서를 축복지 아니하시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배가 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는 것이 에서의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에서의 행동에 대해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 즉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서와 똑같이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팥즉보다 장자의 명분을 원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최소한 알았습니다. 그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에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환도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것이 곧 신앙이었으며, 야곱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귀한 이름을 축복과 함께 얻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에서를 닮지 않았나를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고상한 것처럼 보이고 수준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망과 소원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신앙이 기복적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말해 왔으나, 신앙이 맹목적으로 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기복적인 신앙은 옳지 않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신앙과 열망은 있는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축복이 기독교적이 아니고 미신적일 때 그러한 신앙을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이 기복적인 신앙에 휩쓸려 잘못 부흥하고 발전된 오류를 범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신앙인들에 의하여 그러한 교회의 오류가 지적되어 왔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을 비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축복까지도 바라고 소원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흘러가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복적인 신앙과 함께 맹목적인 신앙도 경계해야만 합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신앙과 삶을 아주 무기력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깨끗한 욕심과 갈망이 없음으로 삶이 무기력하여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무기력함을 경건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기력함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것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이제 다음주일부터 우리는 부활절 아침까지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모두 고난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주를 의뢰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우리의 생활을 도와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송하게 될 것이며 이를 대대에 전할 것이며 이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힌 행하셨다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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