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 (계2:1-7)
본문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교회들로서, 이것은 주님 승천으로부터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 하였거나, 존재하고 있거나, 미래에 존재할 지상교회의 실정과 형편을 일곱교회로 나타내셨습니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일곱교회를 여러 모양으로 제각각 다른 해석들을 말하나 신임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키로 하고 일곱 교회는 신약교회의 형편과 실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내용은 에베소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계시된 내용은 라오디게아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곱교회에 기록하신 내용은 신약시대의 어떤 교회든지 어떤 믿는 사람에게든지 다 해당되는 사실들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일곱교회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교를 듣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노아의 때는 죄악이 땅에 관영했다고 했지마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죄악이 하늘까지 관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킴인데 거룩하고 깨끗하고 온전해야 할 교회가 죄악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오늘날 교계와 교회가 너무 타락이 되고 변질이 되고 혼란스러워져서 교회에 대한 정관(正觀)을 이런 때 일수록 바로 가져야 하겠다는 것을 깊이 느껴서 이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어느 장소에 있는 건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건물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떠난 건물은 주인의 용도에 따라서 사무실, 음식점, 상점, 주택, 마구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크게 둘로 나누면, 눈에 보이는 교회(가견적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불가견적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견적 교회는 물질로 건축한 교회로 최초의 교회는 에덴동산이요, 두 번째 나타내신 교회가 성막이요, 세 번째로 나타내신 교회가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과 같은 것입니다.
불가견적 교회는 고전3:16에 우리를 가르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고 산 돌되신 예수님 같이 신령한 성전을 지어간다고 벧전2:5에 말씀하셨습니다. 일곱교회는 가견적 교회를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은 성도들의 무리, 즉 믿는 사람들이 합하여 교회라 말합니다. 일곱 교회에 계시해 주신 말씀을 잘 공부해서 바로 안다면 근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이 말은 신약시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로 아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곱교회에 계시된 내용은 신약시대의 교인들의 모든 주장들과 행위들과 그 원인인 교훈들과 또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보응과 약속의 상급을 다 빠짐 없이 담아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말세지말기가 될수록 악령은 기묘하게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온전한 구원을 입히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계시된 일곱교회의 소망은 우리가 가질 소망이요, 책망받는 나쁜 점은 우리가 찾아서 회개하여 고칠 것이요, 권면하신 권면은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곱교회의 형편과 실정을 간단하게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는데, 읽어보면 그 내용이 중복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한 말 또 하고, 또한 말 또 해서, 특별한 뜻도 없이 여기도 저기도 말씀해 놓은 것이라 생각이 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복적으로 기록해 주신 목적은 악령이 하나님의 교회를 침노하여 교회가 속화되어 타락되어 가는 그 순서의 과정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교회 한 교회에 기록된 좋은 순서 나쁜 순서를 잘 챙겨서 기억하여 악령은 이런 순서로 이런 결과를 맺고, 저런 순서로 저런 실패를 하도록 하고, 그런 것을 종합시켜서 사람들을 어지럽게도 만들고, 타락하게도 만들고, 속화되게 만든다 하는 그 방편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곱교회에 모든 신약교회의 내용을 다 담아가지고 중복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일곱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말씀 일곱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셨는데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에베소 교회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시면서 ‘교회들에게’라고 하신 것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고, 일곱교회 전체를 가리켜서 ‘교회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곱교회에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은 한 교회에만 해당되는게 아니고, 한 교회를 대표해서 계시했으나, 계시된 그 내용은 모든 전교회들에게 해당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은 일곱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들은 다 자기에게 해당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서 가지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말씀하시면서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신 것은 한 교회에 하신 말씀이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는 단일 교회, 한 교회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땅 위에 있었고, 있을 교회는 하나입니다. 시대마다 수 많은 교파와 교리와 신조들을 가지고 수많은 교회들이 있으나 교회는 하나요 단일 교회입니다. 왜 하나의 교회가 되느냐 하면 교회라는 것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시발되어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 종말은 하나로 끝을 맺는 것이 교회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장도 하나요 힘도 하나요 생명도 하나요 이치도 하나요 근본도 하나요 결과도 하나입니다. 단일교회가 되어져 가는 과정은 하나님 한분에게 수 많은 타락 변질된 인간들을 다 이끌어 들여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본질, 본성과 꼭 들어 맞지 아니한 것들은 다 제거해 없애버리고, 하나님 한 분의 본질, 본성과 꼭 같은, 하나님 한 분의 성결, 한 분의 뜻, 한 분의 마음, 한 분의 소원, 한 분의 주장이 되게 대속하셔서, 성화시켜 주셔서, 기쁨도 슬픔도 좋아함도 소원도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질, 본성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변질, 변성이 되어 타락된 데서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려고, 친히 도성인신 하셔서 달성하신 그 방편과 과정은,
첫째는 비뚤어진 것을 다 탈색하여 다 뽑아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신 일이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베푸신 사죄의 공로입니다.
둘째는 옳은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데, 옳으신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대행으로 베푸신 칭의의 공로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대적이 된 데서 움직임이 하나님과 하나되게, 힘도, 생명도, 지혜도, 소원도, 성질도 하나 되도록 대생으로 베푸신 화친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나님과 하나된 것이 영원히 완전을 향하여 소망하고, 완전을 따라가려고, 완전을 배우려고, 완전히 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영생입니다. ‘단일 교회’라 하는 것은 자존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사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 개가 되든지 만 개가 되든지 교회라는 것은 본질과 본성이 하나일 뿐만 아니라, 행동도, 생명도, 근본도, 목적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 셋이 하나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피가 들어서 셋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수 많은 교회들이 단일 교회로 들어가야 합니다. 단일 교회로 들어가려면, 하나님과 하나되려면, 하나님과 이질된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를 삼아야 단일교회에 들어가지 그렇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지금이 시비할 때입니까 아니면 이질된 것을 찾아 고쳐 회개하여 내편 네편 만들 때가 아니라 단일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힘쓸 때입니까 숫자가 많고, 적음이 큰 것이 아니고, 강하고, 약하고,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단일 교회에 배치되느냐, 배치되지 않느냐 이것이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자’란 말은 그 교회의 목회자 담임하고 있는 교역자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상대로 편지하고 사역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교역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목회자에게 준 은혜가 온 교인들에게 퍼져나가고, 또 교인들의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께서 교역자에게 책망하여 교역자를 통해 교인을 책망하게 하십니다. 교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교인의 잘못된 잘못에 대하여 교인과 같이 심판을 받고, 장점에 대한 상금과 칭찬도 같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 것은 교회 전체에게 편지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먼저 그 종에게 알려주시고 그 종을 통하여 그 비밀을 가르치게 하여, 교회는 사자의 신앙 상태대로 교역자가 만들어진 것 만큼 교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자에게 직접 편지하셨습니다. 교역자가 강단에 서서 증거하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이나 주장이나 사상이나 교훈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입어서 하나님께서 교역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증거하는 내용은 오늘날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고로 설교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오늘날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이 세워서 쓰시는 그 종을 영감시켜, 그 종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를 첫 번째 기록하심은 하나님께서 일곱교회중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를 기록해 주신 것은 어떤 신학자의 주장처럼 시대를 대변해서 초대교회를 나타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첫쩨로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건물의 규모가 큰 것을 좋은 교회로 훌륭하고 유명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위치적으로 중심되는 지역에 위치한 것을 좋은 교회로 생각하고 교회를 선택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숫자가 제일 많이 모이는 큰 교회이기 때문에 먼저 기록하신 것이 아니요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크기 때문도 아니요, 훌륭하고 유명한 목회자가 목회를 하기 때문도 아니요, 위치적으로 동서문화의 교류지점인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중심도시에 위치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건물이나 인물이나 위치 여하나 기적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에 팔리운 주님의 것이 된 성도들이 사활의 대속의 피 공로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므로 주님의 명령대로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교회인 것을 보이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 중 제일 중대한 문제가 바로 에베소 교회의 문제인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오른 손’은 능력의 손, 승리의 손을 말씀합니다. ‘일곱 별’은 일곱교회의 사자, 곧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서 쓰시는 교역자를 가르킵니다. ‘붙잡고’란 복음운동에 속한 사역은 외부에 나타나기는 사람이 하는 것 같으나, 순전히 주님이 사람을 붙들고 하시는 주님의 친히 하시는 역사지 사람이 하는 일 아니란 말씀입니다. 사람 생각에 사람 보기에는 교역자가 무식하고 부족하고 미숙해도 예레미야에게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태에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하나님이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무엇을 명하든지 말하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 승리의 손에 붙들린 일꾼은 무지, 무능, 연약, 부족하다고 핑계하지 말고, 등용해 주신 주님의 무익한 종이 되어, 자기의 있는 힘 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열방 민족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함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했습니다.”(렘1:10) “일곱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는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설립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친히 운영하시고, 친히 관리하시며, 친히 파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면 되고 자기가 반대하면 교회 일이 안될 줄 알아 “내가 없이 되는가 보자”, “내가 반대하면 할 수 없다”는 사람은 주관대로 날뛰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무엇에든지 하나님보다 앞서도 안되고 뒤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돕는 시기에 게을리 태만히 하여 기회를 놓쳐도 안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총괄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12장에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기뻐함을 보고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둬 유월절 후에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어 죽이려 하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는 전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홀연히 나타나 옥에 갇혀 잠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급히 일어나라 했을 때에 쇠사슬이 벗겨졌고 천사가 띠를 띠고 신들메를 메고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할 때 파수꾼을 지나 쇠문이 열려 옥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붙들고 하시는데 급히 일어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는 하나님 하시는 전능의 역사요, 기적적인 일에도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나 되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하라는대로 급히 일어날 때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돕는 시기가 있는데도 시기를 놓치고 아무 때나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에게 피동으로 하지 않고, 주관대로 날뛰는 사람이요, 내가 하면 되고 내가 안하면 안된다는 잘못된 주관 때문에 날뛰게 됩니다. 하나님의 돕는 기적적인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그때도 “급히 일어나라” 하시는데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도 되리라 그렇게 여기면 안되고, 하나님 따라 급히 하라면 급히 움직이고 서서히 머물러 쉬실 때는 거기에 따라서 소속되어 머물러야 되고 주님은 한 자 머무는데 자기는 두 자나 지나쳐도, 앞서도, 뒤서도, 태만해도 안됩니다.
행위와 사상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자들은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니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절)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보기에 본받을 만하고, 칭찬할만 한, 좋은 점, 장점, 아름다운 행위가 아홉가지가 있는 교회입니다.
1 행위:옳고 참되고 올바른 행위
2 수고:교회를 세우고 복음 운동을 위한 진리운동을 위한 수고
3 인내:신앙생활 시작이후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한 초지일관의 계속
4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하나님과 진리 중심이 아닌 자기나 세상 중심 위주의 악한 자들의 범죄의 열매가 맺기 전에 치리, 권고, 제거하는 교회의 권징이 옳고 바르게 행하였으며 5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말씀을 잘 가르쳐서 진리 지식이 장성하여 자칭 사도, 이단의 거짓된 것을 시험하여 드러내서 몰아냄 6 참고:시대적으로 진리로 인하여 일어나는 돌발적인 환난, 고문, 고행, 투옥, 각종 박해 등을 잘 참고 7 네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건설적인 면으로 복음 운동을 위하여 당하는 대로 억울, 멸시, 기근, 적신, 위험 등을 무릅쓰고, 건덕을 위해 견디는것 8 게으르지 아니한 것:복음 운동을 위해 일시적이 아니고 시종일관 충성되게 열심히 하는것 ⑨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 사상이 예수님의 사상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니골라당’은 발람 사상입니다. 세상주의 유물주의 인본주의의 사상입니다. 별도로 기록하신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자도 세상 욕심을 버릴 수 있고, 세상 욕심을 버린 자도 처음 사랑을 버리는 순수한 기독교 같은 순전한 이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책망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그러나’는 “아홉가지(위에서는) 아름다운 신앙행위와 사상은 인정은 하나…”, 하는 말씀입니다.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은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잘 믿는 사람, 믿음 좋은 사람, 좋은 교회로 본이 되고, 칭찬할만하고 귀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에 감격하여 처음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간 단독으로 날뛰어 처음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을 회개치 하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은 전지와 전능과 무소부재와 완전한 분이라야 사랑할 수 있기에 하나님 외에 사랑할 자격있는 것이 없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신(요일4:10)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사, 자기를 대속하시고 중생시켜 대속의 공로를 입혀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의 자녀 사랑이나 짐승의 새끼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빛이 비추어 사람과 짐승에게 흔적으로 그림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악한 악어나 사나운 맹수인 호랑이나 사자도 사납고 포악하고 맹수의 속성을 가진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하고 사랑을 베풀고 새끼는 맹수인 제 어미의 품속이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짐승에게 그림자로 나타난 흔적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잘나고 능력이 있고 위대하고 철두철미해도 사랑 없는 남편과 함께 살면 잘나고 능력 있고 위대하고 훌륭한 만큼 간격이 벌어지고, 차이가 나고, 두렵고, 떨리고, 고통이 됩니다. 주님은 전지, 전능하신데, 나는 무지, 무능, 연약한데 만약 사랑이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위해 큰 희생을 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희생이 큰 만큼 차이가 나는 것 만큼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더 미안하고, 부끄럽고, 불안하고, 괴롭지 거기에 무슨 기쁨, 평강, 담대, 행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아름다운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이 에베소 교회에 있으나, 사랑이 없으니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구할 것도 많고 필요한 것도 많지만 주님의 사랑의 은혜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기쁨, 평강, 행복이 송두리채 없을 것입니다.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1:11), “내게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사1:14)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사1:15). 처음 사랑 없는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은 주님과 아무 상관 없고 사람만 날뛰고 외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은 대속의 피 공로의 사랑으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 같이(고후5:15) 주님 위해 생명까지 바칠 생각과 각오가 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권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어디서 떨어져서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는가 1절에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것을 착각하였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운영하시고, 관리하시며, 총찰하신다는 것을 잊어 버린 데서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사람으로 인하여 하면 되는 줄 알아 자기가 하면 되고, 안하면 안되는 줄 알아 방어하고, 투쟁한다고 치우치기 쉽습니다. 자기대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나님 일에 충성하려고, 의를 행하고 선한 일을 행하고 마귀를 대항하여 투쟁할라고 합니다. 자기대로는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선한 일에 골몰하다보면 치우쳐서 하나님이 주권하고, 총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착각하여 자기가 방어하고 투쟁하려다 처음 사랑을 잊어 버리고 사람 단독으로 날뛰기가 쉽고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믿은 연조가 오래 되었거나 짧거나, 잘 믿든지 못 믿든지 돌이켜 보면,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살 때는 온갖 희생도 담대도 기쁨도 평강도 만족도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계속하다가 보면 습관적으로 의식적으로 순전히 외식자가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기도도 해야지, 성경도 읽어야지, 전도도 해야지, 봉사도 해야지, 계명도 지켜야지, 의를 행해야지, 선을 행해야지, 죄를 안 지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알지만,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나 느낌이나 깨달음이나 감동도 없이 자기 단독으로 날 뛰는 것이 됩니다. 주님과 아무 상관 없이 에베소 교회같이 책망받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고 치우치기 쉽고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마치 이종교도 자비를 의를 선을 말하고 얼마든지 행하나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이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란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여 감사해서 본 받아 피에 팔리운 주님의 것으로, 주님 하라는 대로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지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처음 사랑의 행위를 저버리면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이 끊어져서 빛이 되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된 표시는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방법은 초절되면 안되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3-15)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되는데, 혈육에서 신령한 데로, 첫째 아담에서 둘째 아담에게 속한 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자시기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베푸셨지만, 나는 무지무능자요 연약하니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끝 없이, 한 없이,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고 할 수 있겠습니까 초월적인 방법은 기초부터 벽돌을 쌓듯이 한 장, 한 장, 쌓아 올라가야 하는데, 사죄의 은혜는 죄 문제인 비뚤어진 것을 해결해 주신 사랑인데, 비뚤어진 것을 바로 고쳐 바로 되게 하려면 물질 관계의 비뚤어진 것을 바로하고, 그 다음 사건(일) 처리에 있어서 비뚤어진 것을 바로하고, 사람 관계에 있어서 비뚤어진 것을 바로 고쳐 바른 관계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고, 전능자와 연결이 되어져서 세상의 빛 노릇을 바로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초절적으로 신앙도 없으면서 실력도 없으면서 사람도 되지 못한 인종지 말자로서 사람관계, 사건관계, 사물관계가 낭패가 되어 골치가 아프고, 마음이 괴롭고, 모든 것이 귀찮으니 기도원에나 가서 기도나 하자, 성경이나 연구하자, 굴에 가서 피신이나 하자, 그렇게 해 가지고는 세상에 빛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 관계에서만 뱅뱅 돌아도 안되고, 하나님만 있으면 다 되지 사람이고 사건이고 물질이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도 초절이 된 신앙입니다. 초월적으로 자라 빛이 되려면, 초보적인 기초적인 물질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사건관계가 바로되고, 사건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사람 관계가 바로 되고, 사람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전능자와 연결이 되니 세상의 빛 노릇하게 됩니다.
그런데 밑에 물질관계, 사건관계, 사람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 관계만 바로하면 된다는 사람은 마치 공중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같이 초절적인 사람입니다. 어떻게 초절적이 아니고 초월적으로 세상의 빛 노릇 하도록 모든 관계를 바로 감당할 수 있을까 자기 역량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못해도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려면 할 수 있는 것을 실력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기도라도, 마음이라도, 말이라도 할 수 있고, 옳게 바르게 비뚤어지지 않게 의롭게 모든 불목을 제거하여 화목케 바른 관계를 갖도록 하면 됩니다.
주님의 요구와 약속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촛대’는 어둠과 죄악과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교회를 말합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교회에서 영적 역사, 생명역사, 빛의 역사가 떠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생명역사, 영적 역사, 빛의 역사, 구원역사가 떠난다면 예배당 건물이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교인이 많이 모여도, 그것은 죽은 교회입니다.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다시 찾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만큼 중대한 일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 ‘귀 있는 자’:양심을 쓰는 자,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자는 성령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양심은 인적 요소로서 가장 깨끗하고 밝은 빛으로 신앙생활의 첫 걸음이 양심 생활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과거분사가 아니고 현재분사로서 마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 같이 승리를 달성한 것이 아니고, 진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어떤 애로와 난제가 있어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가 이긴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사랑에 감격하여 처음 사랑을 죽는 그 시간까지 버리지 않고, 처음 사랑의 행위로 사는 사람에겐 ‘내가’:주님께서 친히 직접 신실성과 친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낙원’은 천국의 대기장소로, 원망, 불평, 죄악, 사망, 늙음, 쇠함이 없는 천국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생활이지만, 순전히 그것은 죽음 넘어 있는 무궁세계의 소망을 기대하고, 소망만을 목적하고, 그 소망에 자기의 심신을 다 기울이고, 그 소망에 대한 것만 현재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낙원생활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하신 말씀은 고기 덩어리는 입으로 먹고 영은 인격의 양식을 마음에 깨달음으로 생각으로 먹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을 말하고, ‘생명의 과실’은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진리의 은혜와 성령님의 은혜를 날마다 받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사명, 요구, 의무, 책임, 본분을 깨달음으로 신앙행위를 다 이루어 네 구원을 다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노아의 때는 죄악이 땅에 관영했다고 했지마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죄악이 하늘까지 관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킴인데 거룩하고 깨끗하고 온전해야 할 교회가 죄악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오늘날 교계와 교회가 너무 타락이 되고 변질이 되고 혼란스러워져서 교회에 대한 정관(正觀)을 이런 때 일수록 바로 가져야 하겠다는 것을 깊이 느껴서 이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어느 장소에 있는 건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건물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떠난 건물은 주인의 용도에 따라서 사무실, 음식점, 상점, 주택, 마구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크게 둘로 나누면, 눈에 보이는 교회(가견적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불가견적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견적 교회는 물질로 건축한 교회로 최초의 교회는 에덴동산이요, 두 번째 나타내신 교회가 성막이요, 세 번째로 나타내신 교회가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과 같은 것입니다.
불가견적 교회는 고전3:16에 우리를 가르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고 산 돌되신 예수님 같이 신령한 성전을 지어간다고 벧전2:5에 말씀하셨습니다. 일곱교회는 가견적 교회를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은 성도들의 무리, 즉 믿는 사람들이 합하여 교회라 말합니다. 일곱 교회에 계시해 주신 말씀을 잘 공부해서 바로 안다면 근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이 말은 신약시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로 아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곱교회에 계시된 내용은 신약시대의 교인들의 모든 주장들과 행위들과 그 원인인 교훈들과 또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보응과 약속의 상급을 다 빠짐 없이 담아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말세지말기가 될수록 악령은 기묘하게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온전한 구원을 입히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계시된 일곱교회의 소망은 우리가 가질 소망이요, 책망받는 나쁜 점은 우리가 찾아서 회개하여 고칠 것이요, 권면하신 권면은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곱교회의 형편과 실정을 간단하게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는데, 읽어보면 그 내용이 중복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한 말 또 하고, 또한 말 또 해서, 특별한 뜻도 없이 여기도 저기도 말씀해 놓은 것이라 생각이 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복적으로 기록해 주신 목적은 악령이 하나님의 교회를 침노하여 교회가 속화되어 타락되어 가는 그 순서의 과정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교회 한 교회에 기록된 좋은 순서 나쁜 순서를 잘 챙겨서 기억하여 악령은 이런 순서로 이런 결과를 맺고, 저런 순서로 저런 실패를 하도록 하고, 그런 것을 종합시켜서 사람들을 어지럽게도 만들고, 타락하게도 만들고, 속화되게 만든다 하는 그 방편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곱교회에 모든 신약교회의 내용을 다 담아가지고 중복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일곱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말씀 일곱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셨는데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에베소 교회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시면서 ‘교회들에게’라고 하신 것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고, 일곱교회 전체를 가리켜서 ‘교회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곱교회에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은 한 교회에만 해당되는게 아니고, 한 교회를 대표해서 계시했으나, 계시된 그 내용은 모든 전교회들에게 해당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은 일곱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들은 다 자기에게 해당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서 가지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말씀하시면서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신 것은 한 교회에 하신 말씀이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는 단일 교회, 한 교회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땅 위에 있었고, 있을 교회는 하나입니다. 시대마다 수 많은 교파와 교리와 신조들을 가지고 수많은 교회들이 있으나 교회는 하나요 단일 교회입니다. 왜 하나의 교회가 되느냐 하면 교회라는 것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시발되어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 종말은 하나로 끝을 맺는 것이 교회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장도 하나요 힘도 하나요 생명도 하나요 이치도 하나요 근본도 하나요 결과도 하나입니다. 단일교회가 되어져 가는 과정은 하나님 한분에게 수 많은 타락 변질된 인간들을 다 이끌어 들여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본질, 본성과 꼭 들어 맞지 아니한 것들은 다 제거해 없애버리고, 하나님 한 분의 본질, 본성과 꼭 같은, 하나님 한 분의 성결, 한 분의 뜻, 한 분의 마음, 한 분의 소원, 한 분의 주장이 되게 대속하셔서, 성화시켜 주셔서, 기쁨도 슬픔도 좋아함도 소원도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질, 본성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변질, 변성이 되어 타락된 데서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려고, 친히 도성인신 하셔서 달성하신 그 방편과 과정은,
첫째는 비뚤어진 것을 다 탈색하여 다 뽑아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신 일이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베푸신 사죄의 공로입니다.
둘째는 옳은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데, 옳으신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대행으로 베푸신 칭의의 공로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대적이 된 데서 움직임이 하나님과 하나되게, 힘도, 생명도, 지혜도, 소원도, 성질도 하나 되도록 대생으로 베푸신 화친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나님과 하나된 것이 영원히 완전을 향하여 소망하고, 완전을 따라가려고, 완전을 배우려고, 완전히 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영생입니다. ‘단일 교회’라 하는 것은 자존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사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 개가 되든지 만 개가 되든지 교회라는 것은 본질과 본성이 하나일 뿐만 아니라, 행동도, 생명도, 근본도, 목적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 셋이 하나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피가 들어서 셋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수 많은 교회들이 단일 교회로 들어가야 합니다. 단일 교회로 들어가려면, 하나님과 하나되려면, 하나님과 이질된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를 삼아야 단일교회에 들어가지 그렇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지금이 시비할 때입니까 아니면 이질된 것을 찾아 고쳐 회개하여 내편 네편 만들 때가 아니라 단일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힘쓸 때입니까 숫자가 많고, 적음이 큰 것이 아니고, 강하고, 약하고,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단일 교회에 배치되느냐, 배치되지 않느냐 이것이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공통되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자’란 말은 그 교회의 목회자 담임하고 있는 교역자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상대로 편지하고 사역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교역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목회자에게 준 은혜가 온 교인들에게 퍼져나가고, 또 교인들의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께서 교역자에게 책망하여 교역자를 통해 교인을 책망하게 하십니다. 교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교인의 잘못된 잘못에 대하여 교인과 같이 심판을 받고, 장점에 대한 상금과 칭찬도 같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 것은 교회 전체에게 편지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먼저 그 종에게 알려주시고 그 종을 통하여 그 비밀을 가르치게 하여, 교회는 사자의 신앙 상태대로 교역자가 만들어진 것 만큼 교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자에게 직접 편지하셨습니다. 교역자가 강단에 서서 증거하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이나 주장이나 사상이나 교훈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입어서 하나님께서 교역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증거하는 내용은 오늘날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고로 설교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오늘날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이 세워서 쓰시는 그 종을 영감시켜, 그 종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를 첫 번째 기록하심은 하나님께서 일곱교회중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를 기록해 주신 것은 어떤 신학자의 주장처럼 시대를 대변해서 초대교회를 나타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첫쩨로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건물의 규모가 큰 것을 좋은 교회로 훌륭하고 유명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위치적으로 중심되는 지역에 위치한 것을 좋은 교회로 생각하고 교회를 선택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숫자가 제일 많이 모이는 큰 교회이기 때문에 먼저 기록하신 것이 아니요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크기 때문도 아니요, 훌륭하고 유명한 목회자가 목회를 하기 때문도 아니요, 위치적으로 동서문화의 교류지점인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중심도시에 위치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건물이나 인물이나 위치 여하나 기적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에 팔리운 주님의 것이 된 성도들이 사활의 대속의 피 공로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므로 주님의 명령대로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교회인 것을 보이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 중 제일 중대한 문제가 바로 에베소 교회의 문제인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오른 손’은 능력의 손, 승리의 손을 말씀합니다. ‘일곱 별’은 일곱교회의 사자, 곧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서 쓰시는 교역자를 가르킵니다. ‘붙잡고’란 복음운동에 속한 사역은 외부에 나타나기는 사람이 하는 것 같으나, 순전히 주님이 사람을 붙들고 하시는 주님의 친히 하시는 역사지 사람이 하는 일 아니란 말씀입니다. 사람 생각에 사람 보기에는 교역자가 무식하고 부족하고 미숙해도 예레미야에게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태에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하나님이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무엇을 명하든지 말하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 승리의 손에 붙들린 일꾼은 무지, 무능, 연약, 부족하다고 핑계하지 말고, 등용해 주신 주님의 무익한 종이 되어, 자기의 있는 힘 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열방 민족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함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했습니다.”(렘1:10) “일곱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는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설립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친히 운영하시고, 친히 관리하시며, 친히 파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면 되고 자기가 반대하면 교회 일이 안될 줄 알아 “내가 없이 되는가 보자”, “내가 반대하면 할 수 없다”는 사람은 주관대로 날뛰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무엇에든지 하나님보다 앞서도 안되고 뒤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돕는 시기에 게을리 태만히 하여 기회를 놓쳐도 안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총괄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12장에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기뻐함을 보고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둬 유월절 후에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어 죽이려 하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는 전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홀연히 나타나 옥에 갇혀 잠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급히 일어나라 했을 때에 쇠사슬이 벗겨졌고 천사가 띠를 띠고 신들메를 메고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할 때 파수꾼을 지나 쇠문이 열려 옥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붙들고 하시는데 급히 일어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는 하나님 하시는 전능의 역사요, 기적적인 일에도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나 되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하라는대로 급히 일어날 때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돕는 시기가 있는데도 시기를 놓치고 아무 때나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에게 피동으로 하지 않고, 주관대로 날뛰는 사람이요, 내가 하면 되고 내가 안하면 안된다는 잘못된 주관 때문에 날뛰게 됩니다. 하나님의 돕는 기적적인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그때도 “급히 일어나라” 하시는데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도 되리라 그렇게 여기면 안되고, 하나님 따라 급히 하라면 급히 움직이고 서서히 머물러 쉬실 때는 거기에 따라서 소속되어 머물러야 되고 주님은 한 자 머무는데 자기는 두 자나 지나쳐도, 앞서도, 뒤서도, 태만해도 안됩니다.
행위와 사상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자들은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니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절)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보기에 본받을 만하고, 칭찬할만 한, 좋은 점, 장점, 아름다운 행위가 아홉가지가 있는 교회입니다.
1 행위:옳고 참되고 올바른 행위
2 수고:교회를 세우고 복음 운동을 위한 진리운동을 위한 수고
3 인내:신앙생활 시작이후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한 초지일관의 계속
4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하나님과 진리 중심이 아닌 자기나 세상 중심 위주의 악한 자들의 범죄의 열매가 맺기 전에 치리, 권고, 제거하는 교회의 권징이 옳고 바르게 행하였으며 5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말씀을 잘 가르쳐서 진리 지식이 장성하여 자칭 사도, 이단의 거짓된 것을 시험하여 드러내서 몰아냄 6 참고:시대적으로 진리로 인하여 일어나는 돌발적인 환난, 고문, 고행, 투옥, 각종 박해 등을 잘 참고 7 네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건설적인 면으로 복음 운동을 위하여 당하는 대로 억울, 멸시, 기근, 적신, 위험 등을 무릅쓰고, 건덕을 위해 견디는것 8 게으르지 아니한 것:복음 운동을 위해 일시적이 아니고 시종일관 충성되게 열심히 하는것 ⑨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 사상이 예수님의 사상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니골라당’은 발람 사상입니다. 세상주의 유물주의 인본주의의 사상입니다. 별도로 기록하신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자도 세상 욕심을 버릴 수 있고, 세상 욕심을 버린 자도 처음 사랑을 버리는 순수한 기독교 같은 순전한 이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책망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그러나’는 “아홉가지(위에서는) 아름다운 신앙행위와 사상은 인정은 하나…”, 하는 말씀입니다.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은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잘 믿는 사람, 믿음 좋은 사람, 좋은 교회로 본이 되고, 칭찬할만하고 귀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에 감격하여 처음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간 단독으로 날뛰어 처음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을 회개치 하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은 전지와 전능과 무소부재와 완전한 분이라야 사랑할 수 있기에 하나님 외에 사랑할 자격있는 것이 없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신(요일4:10)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사, 자기를 대속하시고 중생시켜 대속의 공로를 입혀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의 자녀 사랑이나 짐승의 새끼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빛이 비추어 사람과 짐승에게 흔적으로 그림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악한 악어나 사나운 맹수인 호랑이나 사자도 사납고 포악하고 맹수의 속성을 가진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하고 사랑을 베풀고 새끼는 맹수인 제 어미의 품속이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짐승에게 그림자로 나타난 흔적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잘나고 능력이 있고 위대하고 철두철미해도 사랑 없는 남편과 함께 살면 잘나고 능력 있고 위대하고 훌륭한 만큼 간격이 벌어지고, 차이가 나고, 두렵고, 떨리고, 고통이 됩니다. 주님은 전지, 전능하신데, 나는 무지, 무능, 연약한데 만약 사랑이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위해 큰 희생을 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희생이 큰 만큼 차이가 나는 것 만큼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더 미안하고, 부끄럽고, 불안하고, 괴롭지 거기에 무슨 기쁨, 평강, 담대, 행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아름다운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이 에베소 교회에 있으나, 사랑이 없으니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구할 것도 많고 필요한 것도 많지만 주님의 사랑의 은혜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기쁨, 평강, 행복이 송두리채 없을 것입니다.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1:11), “내게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사1:14)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사1:15). 처음 사랑 없는 여덟 가지 행위와 사상은 주님과 아무 상관 없고 사람만 날뛰고 외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은 대속의 피 공로의 사랑으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 같이(고후5:15) 주님 위해 생명까지 바칠 생각과 각오가 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권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어디서 떨어져서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는가 1절에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것을 착각하였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운영하시고, 관리하시며, 총찰하신다는 것을 잊어 버린 데서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사람으로 인하여 하면 되는 줄 알아 자기가 하면 되고, 안하면 안되는 줄 알아 방어하고, 투쟁한다고 치우치기 쉽습니다. 자기대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나님 일에 충성하려고, 의를 행하고 선한 일을 행하고 마귀를 대항하여 투쟁할라고 합니다. 자기대로는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선한 일에 골몰하다보면 치우쳐서 하나님이 주권하고, 총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착각하여 자기가 방어하고 투쟁하려다 처음 사랑을 잊어 버리고 사람 단독으로 날뛰기가 쉽고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믿은 연조가 오래 되었거나 짧거나, 잘 믿든지 못 믿든지 돌이켜 보면,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살 때는 온갖 희생도 담대도 기쁨도 평강도 만족도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계속하다가 보면 습관적으로 의식적으로 순전히 외식자가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기도도 해야지, 성경도 읽어야지, 전도도 해야지, 봉사도 해야지, 계명도 지켜야지, 의를 행해야지, 선을 행해야지, 죄를 안 지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알지만,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나 느낌이나 깨달음이나 감동도 없이 자기 단독으로 날 뛰는 것이 됩니다. 주님과 아무 상관 없이 에베소 교회같이 책망받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고 치우치기 쉽고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마치 이종교도 자비를 의를 선을 말하고 얼마든지 행하나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이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란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여 감사해서 본 받아 피에 팔리운 주님의 것으로, 주님 하라는 대로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지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처음 사랑의 행위를 저버리면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이 끊어져서 빛이 되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전지, 전능과 연결된 표시는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방법은 초절되면 안되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3-15)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되는데, 혈육에서 신령한 데로, 첫째 아담에서 둘째 아담에게 속한 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자시기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베푸셨지만, 나는 무지무능자요 연약하니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끝 없이, 한 없이,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고 할 수 있겠습니까 초월적인 방법은 기초부터 벽돌을 쌓듯이 한 장, 한 장, 쌓아 올라가야 하는데, 사죄의 은혜는 죄 문제인 비뚤어진 것을 해결해 주신 사랑인데, 비뚤어진 것을 바로 고쳐 바로 되게 하려면 물질 관계의 비뚤어진 것을 바로하고, 그 다음 사건(일) 처리에 있어서 비뚤어진 것을 바로하고, 사람 관계에 있어서 비뚤어진 것을 바로 고쳐 바른 관계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고, 전능자와 연결이 되어져서 세상의 빛 노릇을 바로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초절적으로 신앙도 없으면서 실력도 없으면서 사람도 되지 못한 인종지 말자로서 사람관계, 사건관계, 사물관계가 낭패가 되어 골치가 아프고, 마음이 괴롭고, 모든 것이 귀찮으니 기도원에나 가서 기도나 하자, 성경이나 연구하자, 굴에 가서 피신이나 하자, 그렇게 해 가지고는 세상에 빛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 관계에서만 뱅뱅 돌아도 안되고, 하나님만 있으면 다 되지 사람이고 사건이고 물질이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도 초절이 된 신앙입니다. 초월적으로 자라 빛이 되려면, 초보적인 기초적인 물질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사건관계가 바로되고, 사건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사람 관계가 바로 되고, 사람관계가 사고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전능자와 연결이 되니 세상의 빛 노릇하게 됩니다.
그런데 밑에 물질관계, 사건관계, 사람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 관계만 바로하면 된다는 사람은 마치 공중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같이 초절적인 사람입니다. 어떻게 초절적이 아니고 초월적으로 세상의 빛 노릇 하도록 모든 관계를 바로 감당할 수 있을까 자기 역량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못해도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려면 할 수 있는 것을 실력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기도라도, 마음이라도, 말이라도 할 수 있고, 옳게 바르게 비뚤어지지 않게 의롭게 모든 불목을 제거하여 화목케 바른 관계를 갖도록 하면 됩니다.
주님의 요구와 약속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촛대’는 어둠과 죄악과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교회를 말합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교회에서 영적 역사, 생명역사, 빛의 역사가 떠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생명역사, 영적 역사, 빛의 역사, 구원역사가 떠난다면 예배당 건물이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교인이 많이 모여도, 그것은 죽은 교회입니다.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다시 찾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만큼 중대한 일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 ‘귀 있는 자’:양심을 쓰는 자,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자는 성령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양심은 인적 요소로서 가장 깨끗하고 밝은 빛으로 신앙생활의 첫 걸음이 양심 생활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과거분사가 아니고 현재분사로서 마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 같이 승리를 달성한 것이 아니고, 진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어떤 애로와 난제가 있어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가 이긴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사랑에 감격하여 처음 사랑을 죽는 그 시간까지 버리지 않고, 처음 사랑의 행위로 사는 사람에겐 ‘내가’:주님께서 친히 직접 신실성과 친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낙원’은 천국의 대기장소로, 원망, 불평, 죄악, 사망, 늙음, 쇠함이 없는 천국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생활이지만, 순전히 그것은 죽음 넘어 있는 무궁세계의 소망을 기대하고, 소망만을 목적하고, 그 소망에 자기의 심신을 다 기울이고, 그 소망에 대한 것만 현재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낙원생활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하신 말씀은 고기 덩어리는 입으로 먹고 영은 인격의 양식을 마음에 깨달음으로 생각으로 먹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을 말하고, ‘생명의 과실’은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진리의 은혜와 성령님의 은혜를 날마다 받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사명, 요구, 의무, 책임, 본분을 깨달음으로 신앙행위를 다 이루어 네 구원을 다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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