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마26:36-42)
본문
인간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라는 방식을 통해 서로를 경험합니다. 때로는 도움을 청하는 대화가 있고, 또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알기 위해 대화의 자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여러종류의 형태로서 대화가 있지만 그 모두의 목적은 너와 나의 문제해결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특별한 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만나는 대화의 시간입니다. 특별한 대화가 아니더라도 특별할 수 밖에 없는 대화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그 시간일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정의 내릴 때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보통 말합니다. 맞는 정의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보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이 땅에 끌어 내리는 주술적인 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초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때때로는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고자 하였을 때 경험하는 것이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속에 항상 필요한 경험은 아닌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항상 기도하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그리워하며 또 그런 관계를 누리기 위해서는 “항상” 혹은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는 꼭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 보다는 더 가지기를 원하는 욕심으로 구한다는데 기도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셨을 때 그 능력의 대부분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굶주림의 순간이나 생명이 죽어가는 순간에 나타내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표적은 영생이라는 은혜와 형제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신앙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완성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친히 언급하신 기도를 통하여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구체적으로 기도에 대해 언급한 일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과 다른 기도 즉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과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 요17장의 고백과 오늘 본문에 언급된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각함으로 참된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의 배경(마26:37-38) 겟세마네의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슈퍼맨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와 같이 육체의 한계를 똑같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육체의 연약함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제자들에게 고백하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 드리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진지하고 절실하게 부르던 이 기도의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기도의 동기는 예수님의 절박한 고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심한 마음의 고민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 그리고 아무도 나의 고통을 도와 줄 수 없다는 판단이 생겼을 때 우리는 하나님앞에 이렇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찾아 왔을 때 희희락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셨으며 사람의 위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외로움으로 철저하게 경험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피곤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40).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인간을 이해하시면서도 그런 인간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통해 위로받기 보다는 이해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다른 상황에서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으며 문제 없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욕과 고통과 배신, 그리고 모두에게 버림받는 그런 끔찍한 순간을 인간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절박감 앞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상황에 드려지는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내용(마26:39,42)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화의 서두를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또 42절에서는 이렇게 확신있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의 내용을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기준으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인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은 강력한 유혹앞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탄한 환경과 안정된 정서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뜻은 하나님의 뜻앞에 즐겁게 순종되지 않는 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제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상담할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를 위해 혼자의 시간을 가졌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을 밝힌 부분은 요17장과 바로 이 겟세마네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호소하던 장면은 이 곳에서 밖에는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도의 최종적인 결단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마무리 짓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게 해 달라고 긴 시간을 눈물로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대화의 주권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결단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앞에 순종하기 위한 신앙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믿음의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인 수단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 자신의 뜻을 이루는 특별한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기도를 통한 우리의 문제해결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열심과 열망을 멈추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습관적인 신앙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인생을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는 항상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기분좋은 설교보다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를 하기 원합니다. 거짓된 소망을 통해 위로받는 신앙보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신앙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기도가 우리의 욕심을 이루게 하는 유일한 신앙의 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 우리의 열심과 헌신과 믿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거짓된 증언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기도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찾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이 여러분의 인생을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결단하기 어려운 유혹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진통시키는 순간의 위로를 위한 기도이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뜻으로 이루어지는 자신의 인생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능력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항상 기도하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그리워하며 또 그런 관계를 누리기 위해서는 “항상” 혹은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는 꼭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 보다는 더 가지기를 원하는 욕심으로 구한다는데 기도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셨을 때 그 능력의 대부분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굶주림의 순간이나 생명이 죽어가는 순간에 나타내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표적은 영생이라는 은혜와 형제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신앙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완성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친히 언급하신 기도를 통하여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구체적으로 기도에 대해 언급한 일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과 다른 기도 즉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과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 요17장의 고백과 오늘 본문에 언급된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각함으로 참된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의 배경(마26:37-38) 겟세마네의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슈퍼맨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와 같이 육체의 한계를 똑같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육체의 연약함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제자들에게 고백하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 드리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진지하고 절실하게 부르던 이 기도의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기도의 동기는 예수님의 절박한 고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심한 마음의 고민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 그리고 아무도 나의 고통을 도와 줄 수 없다는 판단이 생겼을 때 우리는 하나님앞에 이렇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찾아 왔을 때 희희락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셨으며 사람의 위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외로움으로 철저하게 경험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피곤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40).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인간을 이해하시면서도 그런 인간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통해 위로받기 보다는 이해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다른 상황에서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으며 문제 없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욕과 고통과 배신, 그리고 모두에게 버림받는 그런 끔찍한 순간을 인간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절박감 앞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상황에 드려지는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내용(마26:39,42)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화의 서두를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또 42절에서는 이렇게 확신있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의 내용을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기준으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인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은 강력한 유혹앞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탄한 환경과 안정된 정서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뜻은 하나님의 뜻앞에 즐겁게 순종되지 않는 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제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상담할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를 위해 혼자의 시간을 가졌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을 밝힌 부분은 요17장과 바로 이 겟세마네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호소하던 장면은 이 곳에서 밖에는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도의 최종적인 결단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마무리 짓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게 해 달라고 긴 시간을 눈물로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대화의 주권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결단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앞에 순종하기 위한 신앙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믿음의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인 수단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 자신의 뜻을 이루는 특별한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기도를 통한 우리의 문제해결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열심과 열망을 멈추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습관적인 신앙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인생을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는 항상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기분좋은 설교보다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를 하기 원합니다. 거짓된 소망을 통해 위로받는 신앙보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신앙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기도가 우리의 욕심을 이루게 하는 유일한 신앙의 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 우리의 열심과 헌신과 믿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거짓된 증언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기도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찾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이 여러분의 인생을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결단하기 어려운 유혹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진통시키는 순간의 위로를 위한 기도이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뜻으로 이루어지는 자신의 인생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능력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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