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이 올 때 (룻1:1-5)
본문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기드온 사사시대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유다 베들레헴에-‘떡 집’에 흉년이다.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모압으로 갔다. 갈 때는 잠시 우거하려고 갔는데… 10년이다 (룻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룻1: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룻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룻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때때로 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인 고난과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의 징계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이며, 그 자녀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징계를 당할 때에 징계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보다는 만난 그 어려움의 현실만을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서 더 큰 낭패와 실패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징계가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흉년이란 어떤 것입니까 농사가 잘 안되어서 양식이 부족하고, 그래서 인심조차도 메마르고, 살기 어려운 때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 대개는 농사 짓는 사람들은 아니어서 기근이나, 흉년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합니다. 이전 같이 배고픈 시절에 이 말씀을 듣는다면 뼈저리게 느껴지겠지만 오늘 배 부른 때에 이 말씀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도 농경사회때와는 다르겠지만, 새로운, 그리고 다양한 흉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이 흉년 가운데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먼저, 경제적인 흉년이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되든지,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든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이런 경제적인 흉년을 당하지 않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또 인간관계라는 특별한 면의 흉년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떠합니까 당신 가정의 부부사이는 어떻습니까 지난 때 같이 마냥 좋고 탄력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법적으로만 부부지 실상은 메마르고 삭막한 부부관계는 아닙니까 부모와 자녀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복 가운데서 마음 속에 뿌듯한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고 사는 가정입니까 이 사회에서 많은 인인관계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어떻습니까 삶의 모든 고통이 다 아프지만, 인간관계의 갈등이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긴장과 어두움과 고통을 가져줍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들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흉년 보다도 더욱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영적인 흉년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영적인 생활이 어떻습니까 말씀이 은혜가 넘치고,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넘치고, 기도가 막히지 않고, 마음 속에서부터 찬송의 샘이 터쳐나오는 경험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처럼 신앙생활이 힘들어서야 어떻게 할꼬. 하면서 탄식과 피곤과 낙심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가 막히고, 말씀에 갈급이 없어진지 오래고, 양심은 무디어져서 죄를 범하고도 가첵의 아픔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나, 충성도 없이 날마다를 영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에는 흉년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룻기의 내용은 어느 날 한 가정이 그들에게 닥친 흉년으로 말미암아 먼 곳 까지 이주하게 되는 흉년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룻기는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게합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흉년이 도래할 때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를 대처하겠습니까
인생의 흉년이라는 바람이 불어올 때 사람들이 대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용기있게 흉년에 직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다가온 흉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과 더불어 대결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괴로운 것이고 어려운 것이지만, 그 현실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므로 오히려 감사하므로 인내하고, 그 고통의 현실과 부딪쳐 싸우는 용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에 종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고,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매우 바람직한 유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흉년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닥쳐온 현실은 흉년이라는 역경은 분명한데 그것을 부인해 버립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게 닥친 현실은 흉년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삶에 닥친 분명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잊으려고 합니다. 아주 낙천적인 것 같으면서도 괴로워서 그 현실을 바로 보지 않는 사람있습니다. 나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건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사업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영적인 상태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흉년에도 이 현상을 자기 두 눈을 감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 같이 부인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를 잊고 부인하기 위해서 술을 찾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이 여행이나 다녀오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누가 이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겠지 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아니면 세월지나면 어떻게 잘 되겠지하는 사람있습니다. 다 답답한 사람입니다. 또, 흉년이라는 상황에서부터 도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잡하고 고통스런 현실에서 나은 현실로 ‘도피’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본문의 가정에 가장인 ‘엘리멜렉’이란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좋은 뜻입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도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정은 그 가족의 이름만 봐도 대대로 믿음을 잘 지킨 가정이고, 그 고장에서도 유력한 가정인 것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삶의 왕이시다.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흉년이라는 바람이 베들레헴에 그 땅에 닥쳤는데, 이 흉년의 어려움이 이 가정에도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는 자기들에게 닥친 흉년을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이들은 그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은 흉년을 피하여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이방의 땅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의 이름은 ‘떡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이 양식이 풍부하고 기름진 곳이어서 이렇게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풍부하고, 기름진 떡 집 베들레헴에도 하나님께서 흉년을 주시면 별 수 없이 기근을 당합니다. 흉년이 온 것도 우연이나,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삶에도 때때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여기실 때에 흉년도 도구로 사용합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서 흉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1. 흉년은 하나님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 확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연단하시는 시험으로 흉년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진정성, 그 진실은 어려움이 닥쳐오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 까지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욥에게 닥친 흉년이 이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이 흉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땜에 주신 흉년이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에 주신 시험이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려움이 닥칠 때에 드러납니다. 아무도 어려움이 오기 전에는 믿음이 있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보여주시고, 믿음이 더 자라도록 하시고, 우리 믿음을 더 깨끗하게 하시는 목적으로 흉년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2. 또 흉년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에 닥친 흉년은 그 가정에만 닥친 흉년이 아닙니다. 1절을 보시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했습니다.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 때는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그들에게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왕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을 지도하는 자가 없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 조차 저버리고 없었던 때 입니다. 이 때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때입니다. 그 결과가 암흑이고, 혼돈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말씀없이 사는 것이 자유같으나, 이 때가 믿는 자에게는 방종이요, 방탕이요, 어두움이요, 혼돈과 멸망의 때입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서 매를 드셨습니다. 그 징계가 바로 흉년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가 밤죄했을 때에 매를 드는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따뜻하고 평안하던 가정이 흔들립니다. 잘해 나오던 사업이 비틀거립니다. 건강에 이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적신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결코 포기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내 신앙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내리치시는 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흉년이 찾아올 때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흉년이 올 때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 있고, 그 흉년을 피하여 세상으로 더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직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갑니까 그러면 참으로 복있습니다. 잘 연단되고, 징계로 인한 흉년이라도 잘 참으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유형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나, 고통스런 현실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도피를 선택했습니다. 장소만 옮기면, 해결될 것입이다. 이혼만하면 된다. 사업의 업종을 바꾸면 된다. 교회를 옮기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피한다고 징계가 그쳐지지 않습니다.
징계의 목적으로 때리신 하나님의 흉년은 떠나지 않을 것이고, 더 커다란 고통만 만들게 됩니다. 이 가정은 왜 도피를 선택했습니까
1. 육신의 문제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면보다는 육신적인 면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당장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이들은 도피를 결심했습니다. 이 가정은 삶의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 보다는 순간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 이들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신앙의 가정입니다. 이들이 흉년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뻐하는 삶이 있었지만, 흉년이 왔을 때는 그 믿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환난의 때에나 평안의 때나 변함 없는 믿음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믿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입술로만 아니라, 입술의 고백이나, 찬양에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 나의 삶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 이 고통과 어려움의 환난 가운데서도 바를 보시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전능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모든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나를 훈련시켜 놀라운 뜻을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도피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더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된 나오미는 나중에 자기 이름을 마라(1:20) 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배신한 가정에 찾아온 것은 죽음과 고통 뿐입니다. 그들이 잠시 우거하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살게됩니다. 모압에서 그 가정은 어떤 어려움을 당합니까 우선 집안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는 두 아들 마저 죽어 버립니다. 남자 셋은 다 죽고, 과부만 셋이 남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말론인데, 그 이름의 뜻은 질병입니다.
둘째의 이름은 기룐인데, 그 이름의 뜻은 상실한다,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두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 떠난 그 가정의 유랑의 생활의 결과에 대한 상징적인 이름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취하기 위해서 하나님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사는 생활. 그 결과는 불행이요, 죽음이요, 다 잃어버리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도피는 결코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흉년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연단하시려는 목적도 있고, 징계로 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만나는 흉년에 우리들이 취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이 흉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이 흉년을 통해 나를 만드시고, 고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합니다. 흉년을 직면해야합니다. 정면돌파해야합니다. 찾아온 고난을 피하지 말고, 똑 바로 바라보고 고난의 의미를 잘 분석을 해야합니다. 모든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회개할 것과 순종할 것을 그 현실에서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합니다. 내게 닥친 흉년이 경제적이든지, 인인관계의 흉년이든지, 영적인 면의 흉년이든지 그 흉년이라는 고난을 내 것으로 안고 고난을 이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비겁하지 맙시다.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현실을 피하려하지 말고, 그 현실을 이기고, 이용해야합니다. 그 현실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합니다. 그 현실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야합니다. 우리는 이 현실에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현실이 우리의 것입니다. 현실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현실의 밥이 됩니다. 구원도 실패요, 세상의 모든 것도 다 실패입니다. 인생의 항해 길에 모진 바람이 불어도 그 풍랑 때문에 더 빨리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복되고, 그것을 피하여 세상을 향해가는 길은 더 낭패만 당하게 됩니다.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징계를 당할 때에 징계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보다는 만난 그 어려움의 현실만을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서 더 큰 낭패와 실패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징계가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흉년이란 어떤 것입니까 농사가 잘 안되어서 양식이 부족하고, 그래서 인심조차도 메마르고, 살기 어려운 때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 대개는 농사 짓는 사람들은 아니어서 기근이나, 흉년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합니다. 이전 같이 배고픈 시절에 이 말씀을 듣는다면 뼈저리게 느껴지겠지만 오늘 배 부른 때에 이 말씀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도 농경사회때와는 다르겠지만, 새로운, 그리고 다양한 흉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이 흉년 가운데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먼저, 경제적인 흉년이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되든지,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든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이런 경제적인 흉년을 당하지 않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또 인간관계라는 특별한 면의 흉년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떠합니까 당신 가정의 부부사이는 어떻습니까 지난 때 같이 마냥 좋고 탄력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법적으로만 부부지 실상은 메마르고 삭막한 부부관계는 아닙니까 부모와 자녀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복 가운데서 마음 속에 뿌듯한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고 사는 가정입니까 이 사회에서 많은 인인관계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어떻습니까 삶의 모든 고통이 다 아프지만, 인간관계의 갈등이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긴장과 어두움과 고통을 가져줍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들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흉년 보다도 더욱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영적인 흉년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영적인 생활이 어떻습니까 말씀이 은혜가 넘치고,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넘치고, 기도가 막히지 않고, 마음 속에서부터 찬송의 샘이 터쳐나오는 경험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처럼 신앙생활이 힘들어서야 어떻게 할꼬. 하면서 탄식과 피곤과 낙심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가 막히고, 말씀에 갈급이 없어진지 오래고, 양심은 무디어져서 죄를 범하고도 가첵의 아픔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나, 충성도 없이 날마다를 영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에는 흉년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룻기의 내용은 어느 날 한 가정이 그들에게 닥친 흉년으로 말미암아 먼 곳 까지 이주하게 되는 흉년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룻기는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게합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흉년이 도래할 때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를 대처하겠습니까
인생의 흉년이라는 바람이 불어올 때 사람들이 대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용기있게 흉년에 직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다가온 흉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과 더불어 대결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괴로운 것이고 어려운 것이지만, 그 현실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므로 오히려 감사하므로 인내하고, 그 고통의 현실과 부딪쳐 싸우는 용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에 종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고,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매우 바람직한 유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흉년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닥쳐온 현실은 흉년이라는 역경은 분명한데 그것을 부인해 버립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게 닥친 현실은 흉년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삶에 닥친 분명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잊으려고 합니다. 아주 낙천적인 것 같으면서도 괴로워서 그 현실을 바로 보지 않는 사람있습니다. 나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건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사업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영적인 상태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흉년에도 이 현상을 자기 두 눈을 감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 같이 부인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를 잊고 부인하기 위해서 술을 찾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이 여행이나 다녀오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누가 이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겠지 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아니면 세월지나면 어떻게 잘 되겠지하는 사람있습니다. 다 답답한 사람입니다. 또, 흉년이라는 상황에서부터 도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잡하고 고통스런 현실에서 나은 현실로 ‘도피’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본문의 가정에 가장인 ‘엘리멜렉’이란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좋은 뜻입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도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정은 그 가족의 이름만 봐도 대대로 믿음을 잘 지킨 가정이고, 그 고장에서도 유력한 가정인 것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삶의 왕이시다.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흉년이라는 바람이 베들레헴에 그 땅에 닥쳤는데, 이 흉년의 어려움이 이 가정에도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는 자기들에게 닥친 흉년을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이들은 그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은 흉년을 피하여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이방의 땅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의 이름은 ‘떡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이 양식이 풍부하고 기름진 곳이어서 이렇게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풍부하고, 기름진 떡 집 베들레헴에도 하나님께서 흉년을 주시면 별 수 없이 기근을 당합니다. 흉년이 온 것도 우연이나,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삶에도 때때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여기실 때에 흉년도 도구로 사용합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서 흉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1. 흉년은 하나님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 확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연단하시는 시험으로 흉년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진정성, 그 진실은 어려움이 닥쳐오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 까지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욥에게 닥친 흉년이 이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이 흉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땜에 주신 흉년이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에 주신 시험이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려움이 닥칠 때에 드러납니다. 아무도 어려움이 오기 전에는 믿음이 있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보여주시고, 믿음이 더 자라도록 하시고, 우리 믿음을 더 깨끗하게 하시는 목적으로 흉년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2. 또 흉년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에 닥친 흉년은 그 가정에만 닥친 흉년이 아닙니다. 1절을 보시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했습니다.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 때는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그들에게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왕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을 지도하는 자가 없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 조차 저버리고 없었던 때 입니다. 이 때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때입니다. 그 결과가 암흑이고, 혼돈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말씀없이 사는 것이 자유같으나, 이 때가 믿는 자에게는 방종이요, 방탕이요, 어두움이요, 혼돈과 멸망의 때입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서 매를 드셨습니다. 그 징계가 바로 흉년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가 밤죄했을 때에 매를 드는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따뜻하고 평안하던 가정이 흔들립니다. 잘해 나오던 사업이 비틀거립니다. 건강에 이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적신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결코 포기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내 신앙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내리치시는 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흉년이 찾아올 때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흉년이 올 때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 있고, 그 흉년을 피하여 세상으로 더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직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갑니까 그러면 참으로 복있습니다. 잘 연단되고, 징계로 인한 흉년이라도 잘 참으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유형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나, 고통스런 현실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도피를 선택했습니다. 장소만 옮기면, 해결될 것입이다. 이혼만하면 된다. 사업의 업종을 바꾸면 된다. 교회를 옮기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피한다고 징계가 그쳐지지 않습니다.
징계의 목적으로 때리신 하나님의 흉년은 떠나지 않을 것이고, 더 커다란 고통만 만들게 됩니다. 이 가정은 왜 도피를 선택했습니까
1. 육신의 문제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면보다는 육신적인 면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당장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이들은 도피를 결심했습니다. 이 가정은 삶의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 보다는 순간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 이들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신앙의 가정입니다. 이들이 흉년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뻐하는 삶이 있었지만, 흉년이 왔을 때는 그 믿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환난의 때에나 평안의 때나 변함 없는 믿음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믿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입술로만 아니라, 입술의 고백이나, 찬양에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 나의 삶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 이 고통과 어려움의 환난 가운데서도 바를 보시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전능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모든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나를 훈련시켜 놀라운 뜻을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도피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더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된 나오미는 나중에 자기 이름을 마라(1:20) 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배신한 가정에 찾아온 것은 죽음과 고통 뿐입니다. 그들이 잠시 우거하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10년을 살게됩니다. 모압에서 그 가정은 어떤 어려움을 당합니까 우선 집안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는 두 아들 마저 죽어 버립니다. 남자 셋은 다 죽고, 과부만 셋이 남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말론인데, 그 이름의 뜻은 질병입니다.
둘째의 이름은 기룐인데, 그 이름의 뜻은 상실한다,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두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 떠난 그 가정의 유랑의 생활의 결과에 대한 상징적인 이름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취하기 위해서 하나님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사는 생활. 그 결과는 불행이요, 죽음이요, 다 잃어버리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도피는 결코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흉년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연단하시려는 목적도 있고, 징계로 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만나는 흉년에 우리들이 취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이 흉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이 흉년을 통해 나를 만드시고, 고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합니다. 흉년을 직면해야합니다. 정면돌파해야합니다. 찾아온 고난을 피하지 말고, 똑 바로 바라보고 고난의 의미를 잘 분석을 해야합니다. 모든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회개할 것과 순종할 것을 그 현실에서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합니다. 내게 닥친 흉년이 경제적이든지, 인인관계의 흉년이든지, 영적인 면의 흉년이든지 그 흉년이라는 고난을 내 것으로 안고 고난을 이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비겁하지 맙시다.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현실을 피하려하지 말고, 그 현실을 이기고, 이용해야합니다. 그 현실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합니다. 그 현실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야합니다. 우리는 이 현실에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현실이 우리의 것입니다. 현실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현실의 밥이 됩니다. 구원도 실패요, 세상의 모든 것도 다 실패입니다. 인생의 항해 길에 모진 바람이 불어도 그 풍랑 때문에 더 빨리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복되고, 그것을 피하여 세상을 향해가는 길은 더 낭패만 당하게 됩니다.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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