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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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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넘쳐나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함께 성탄의 인사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시인 김현승 님은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집집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이 넘치는 가장 큰 영혼의 명절”입니다. 시인은 크리스마스를 영혼의 명절이라고 노래합니다. 왜 크리스마스가 우리 영혼의 명절이 될 수 있을까요
명절하면 고향과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이 생각납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 친지, 친구들이 만나서 삶을 서로 나누는 포근한 정이 생각납니다. 명절에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의 넉넉함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그런 점에서 우리 영혼의 명절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존재의 고향을 발견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납니다.
내 환경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더 풍성하게 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이런 놀라운 축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혼의 명절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식이 있습니다. 슬픈 소식이 있고,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들으면 기분이 좋은 소식이 있고, 기분이 꿀꿀해지는 소식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식은 상대적입니다. 같은 소식이라도 기쁜 소식이 되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Good News, 복음입니다. 왜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일까요
낮은 자에게 임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누가복음 2장 8절을 보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당시 '목자'하면 두 가지 보편적인 개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아니고 단순히 관리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양을 소홀히 돌보고 때로는 양을 훔쳐내고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못 믿을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목자의 일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인 비천하였고 종교적인 소외를 당했고 심지어는 자신들 마저 열등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하나는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직자들의 참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식구를 부양할 돈이 없다는 것도 해당되지만 더 큰 고통은 내가 몸 담고 있던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다.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쓸모없이 여겨졌다 것에 대한 분노와 아픔이 큽니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살아가던 비천한 목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9절을 보세요.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기대하지 못했던 황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서" 비천하고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 곁에 주의 사자가 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목자들을 무시하고, 비천한 자로 여겼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주의 사자, 영광" 이것은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나 관계 있는 얘기이지 그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는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에게 주의 사자를 보내시고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참 기쁨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끌어안고 아픔과 고통 속에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난함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지쳐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불어 넣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박대해도 우리 주님은 놀라우신 하늘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하고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성탄의 아침,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여러분의 시린 가슴과 상처난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싸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송 중에 하나가 “주님과 같이”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남모를 아픔과 고통의 상처가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우리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실 때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한분 한분을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존재로 여기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나를 부르시고, 일으켜 세우셔서, 하늘 영광의 보좌로 인도해주십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가장 낮은 나를 높여주시고, 연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고, 고통 받는 나를 치료하시고, 가난한 나를 부요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차별 없이 내리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0절부터 12절을 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 이니라"
목자들에게 보다 큰 음성으로 들린 내용은 "온 백성에게"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존귀한 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스스로 종교적인 경건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온 백성'입니다. 자신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빠졌는데 지금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열등감과 상처 속에 살던 비천한 목자들에게까지도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내리시는 사랑입니다. 이 땅에 얼마나 차별이 강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차별은 사람을 찢어 놓습니다. 대립하게 합니다. 증오하게 만듭니다.
며칠 전에 심방을 다녀오다가 라디오 방송에 들은 사연입니다. 한 주부가 보낸 편지사연인데요 자기 아들을 꼭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서 카 센터를 하겠다고 고집한답니다. 자기는 죽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애달픈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자기는 부유하고 명문 집 안에서 세 번째 며느리로 들어갔답니다. 집안 모든 사람들이 명문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랍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방대학을 나와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문제는 남편을 제외하고 집안 온 식구들이 따돌린다는 거예요. 공교롭게도 동서들이 같은 대학을 나왔는데, 모이면 자기는 생각지도 않고, 대학애기만 한 대요. 어쩌다 끼려고 하면 '뭐 아는체 하려고 하느냐'며 면박을 준답니다. 어느 날은 대학동창회에 같다오면서 큰 동서가 동문가방을 하나 주더랍니다. 그것을 본 둘째 동서가 아니 대학동창도 아닌데 어떻게 그 가방을 드느냐 수준에 어울리게 놀아야지 하면서 면박을 주더랍니다.
그래서 명문대학 나오면 대수냐 인간이 되야지 라면서 한 판 싸웠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는 자기 못 알아듣게 영어로 말하고, 자기가 알아 듯는 것 같으니까 그 다음에는 불어로 말하더래요. 이런 집안 참 한심하잖아요 그래서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 때문에 자기 자식은 차별을 받지 않게 하려고 명문대학 보내려고 했는데 카 센터하겠다니 억장이 무너진다는 사연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 간에도 서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 오늘 사회의 모습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좋지 못한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대학 나왔다고,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집안이라고 남을 은근히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인격의 문제요, 주님 보시기에 어쩌면 가장 볼썽사나운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정죄하고, 차별하고 무시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끌어안으시고, 차별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차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아직 내 가슴 속에 누군가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어제 소년부 뮤지컬 크리스마스 폴카에서처럼 왕따 당하던 쬐깐이를 끌어안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성탄의 중요한 메시지요, 그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금번 성탄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차별의 벽이 무너지고, 주님의 사랑과 평화로 가득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오심은 어두움과 흑암 가운데 살던 백성들에게 소망의 빛이 비춰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멍에를 꺾어주시고, 참 평화를 주시는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성탄의 아침, 성탄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참 소망과 사랑과, 평화의 빛이 가득하게 비추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슴에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며, 차별 없이 내려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영혼의 명절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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