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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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노량나루에 큰돌이(대석이)라는 노처녀가 살고 있었다.문안으로 시집을 가게 됐는데 첫날 밤부터 웃저고리 벗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를 미심쩍게 여긴 신랑이 어느날 곤히 잠든 큰돌이의 저고리를 벗겨 보았다.베나부랭이로 야물게 매놓은 팔뚝을 풀어보니 사나이 이름이 문신으로 입묵돼 있었다.우리 전통에 사랑의 불변을 약속하여 남자는 왼팔 여자는 오른팔에 서로의 이름을 문신하는 습속이 있었다. 이를 연비라고 했다. 이사실이 친정에 알려지고 친정 문중에서는 큰돌이를 업어와 물을 축인 조선종이를 얼굴에 겹겹으로 붙여 질식사시키는 도모지형을 가했다.큰돌이는 죽은 개처럼 종의 등에 업혀 강물에 버려진 것이다. 문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은 연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팔에 새긴 이름이 한 마을에 사는 동성동본의 근친으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데대한 응징이었다. 근친혼에 대한 일반 인식이 어땠는가를 가늠케 하는 사랑의 순교사건이다.고대 잉카왕국이며 하와이왕국 발리족 등 남방계 국가들에서 왕족은 근친혼이 원칙이다. 선택받은 신성한 피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이에비해 예나 몽골 등 북방계 국가들에선 근친혼이 없었다. 그래서북방계인 고구려 백제에는 근친혼이 없었고 남방계인 신라에는 근친혼이 왕성했다.신라왕족은 3촌에서 6촌에 이르는 결혼은 다반사였다. 이런 풍습이 고려왕실에 고스란히 전래되어 16대동안 총 63쌍의 근친혼이 있었다. 8촌간이 44쌍 4촌 이내가 28쌍 2촌간이라 할 형제 자매혼도 10쌍이나 됐다. 일반 백성들도 6촌 넘은 근친혼은 다반사였다.근친혼인을 엄금하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동성동본이 아니라 본관이 다르더라도 동성끼리의 결혼마저 금했다. 세종때 종친 이완이 본관이 다른 이씨와 결혼한 것이 말썽이 되어 이관의 어머니 성인 한씨로 성을 바꾸게 했다.임진왜란때 명재상인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말을 들은 명나라 장수가 {무슨 오랑캐 풍속인고 } 했다는 것을 보면 왕족이 아닌여염에서는 본관이 다른 동성간 결혼은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던 것같다.헌법재판소의 8촌넘긴 동성동본 결혼 허용은 풍속사상 6백여년만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큰돌이의 처절한 동성동본 사건이 있은지 1백여년 후의 일이고 . 하지만 법의 옷을 입혔다 해서 의식이 쉽게변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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