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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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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 가운데 가장 단명인 것이 1년을 못 넘긴다는 호조판서다.나라 살림인 재정을 주무르기 때문일 것이다.이 고정관념을 깨고 10년이나 지탱한 최장수 호조판서가 정홍순이다.영조 때의 사람으로 워낙 깐깐하고 작은 신의마저도 저버리지 않기로 소문난 분이었다.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임금의 동구릉(東九陵) 행차가 있던 날 정홍순도 많은 구경꾼 틈에 끼여 이 성대한 행차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비 가릴 곳이 없는 산릉이어서 구경꾼들이 좌왕우왕하였다. 장마철인지라, 정홍순은 우립을 마련해 갖고 갔었다. 비 오는 날 우립 없는 남을 위해 우립공덕을 베풀라는 불심 돈독한 할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그는 항상 우립 두 개를 겹쳐 쓰고 다녔다.우립 없이 당황하는 한 젊은 선비에게 우립 하나를 벗어 주고 동행하여 돌아왔다.회동 동구에서 헤어질 때까지도 비가 멎질 않자 선비는 내일 우립을 돌려 주겠다 하고 헤어졌다.비가 개고 사흘이 지나도록 돌려 주지 않자 정홍순은 행장을 갖추고는 이 선비를 수소문, 찾아갔다. 마침 우중에 사돈 한 분이 찾아와서 쓰고 갔으니 사흘만 더 기다려달라 했다. 그 사흘이 지나도록 돌려 주지 않자 다시 찾아갔더니 낡은 우립 하나 갖고 그렇게 극성이고 성화냐고 화를 내면서 갓장수가 지나가면 새 우립을 사주겠다고 했다.정홍순은 `내가 돌려받고 싶은 것은 우립이 아니라, 신의요' 하면서 백리 길인 사돈네 집까지 찾아가 그 우립을 찾아오고 있다.그런 일이 있은 지 20여 년 후의 일이다.정홍순이 호조판서로 당상에 앉았는데, 호조좌랑이 신임인사를 하러 들어왔다.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어보았더니 바로 20년 전 우립을 돌려 주지 않았던 바로 그 선비였다.`하찮은 우립 하나를 두고도 신의를 못 지키는 자에게 어떻게 나라의 큰 돈주머니를 맡기겠는가' 하고 돌려보내고 있다.꼭지 빠진 우산을 판 우산장수를 찾아가 10여 차례 바꿔달라고 했으나 바꿔 주지 않자 송사를 걸어 항소심에서 우산값을 돌려받은 70대 노인의 집념도 작은 일 같지만 우리 사회의 기강을 유지시키는 엄청난 큰 일인 것이다.링컨 대통령의 흑인 해방이라는 그 큰 위업도 다친 흑인 소녀의 피를 닦아주었던 산보길의 작은 만남에서 시작되었고, 록펠러의 그 엄청난 거부(巨富)도 굴러간 1센트짜리 동전을 사흘이나 걸쳐 찾아내고 말았던-, 그 작은 검약에서 시작되고 있다.그러하듯이 풀뿌리 민주주의는 일상 주변의 작은 분노, 작은 고발, 작은 절약, 작은 친절, 작은 협동, 작은 봉사, 작은 자선, 작은 신의, 작은 황홀, 작은 행복으로부터 싹터 그 작은 것들의 많은 확대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가상한 우산 노인의 집념이 아닐 수 없다. 9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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