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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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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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집의 제일 큰 대목은 섣달 그믐날이다. 북해정(北海亭)도 이 날만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보통 때는 12시 넘어서도 시끌벅적한 길가지만 저녁나절이 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빨라졌고 10시가 지나자 북해정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딱 그쳤다.이때쯤, 사람은 좋지만 묵뚝뚝한 주인대신 단골손님으로부터 '여주인'이라고 불리는 그의 처는 바빴던 하루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특별 상여금이 든주머니와 국수를 시간제 종업원의 손에 쥐여 돌려보냈다.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나가자 이제 슬슬 바깥의 문을 내릴까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이 드르륵 힘없이 열리며 한 여자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들어왔다. 여섯살, 열살정도의 남자 아이는 막 사입은 듯한 운동복 차림이었고, 여자는 계절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어서 오세요."라고 맞은 여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거리며 말했다."저…... 우동 한 그릇이라도...... 괜찮나요"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 보고 있었다."그럼요. 자 이리로 오세요."난로에 가까운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카운터 저쪽을 향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외쳤다.이 소리를 들은 주인은 슬쩍 이 일행을 보면서 "우동 한 그릇"이라고 대답하며 국수 1인분에 반 사람 몫을 더 얹어 삶았다. 손님과 여주인이 눈치채지 못한 서비스, 곱배기의 분량이었다.테이블에 내온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싸고 이마를 맞대며 음식을 먹고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에까지 나지막히 들려왔다."맛있네요."라고 말하는 형."어머니도 드세요."라며 국수 한 가닥을 집어서 어머니의 입에 갖다 대는 동생.우동을 다 먹고, 150엔을 내고 "잘 먹었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말하는 주인과 그의 처.새해를 맞은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매일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 또일년이 지나고 12월 31일이 되었다.지난해 이상으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바쁜 하루가 지나고 밤 10시가 되었다. 가게를 닫으려 하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며 남자 아이 둘과 한 여자가 들어왔다.여주인은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 무늬 반 코트를 보고 작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손님을 생각해 냈다."저...... 우동 한 그릇이라도 괜찮을까요"여주인은 지난해와 똑같은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한 그릇"이라고 크게 외쳤다. 주인은 대답하면서 막 꺼진 곤로에 불을 지폈다."여보 서비스하는 셈 치고 3인분 내줍시다."살짝 귀엣말을 건네는 여주인에게 "안돼. 그러면 오히려 신경을 쓰게되."이렇게 말하며 국수 한사람 반 분량을 삶는 남편을 보며 "당신도 묵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좋은 구석이 있군요."미소짓는 아내에게 역시 무덤덤하게 국수를 그릇에 담는 주인이다. 테이블위에 우동 한 그릇을 둘러싸고 이야기하는 모자 세 명의 대화가 카운터안팎에 있는 부부에게 들려온다."맛있어요.""금년에도 북해정 우동을 먹을 수 있게 되었네요.""내년에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식사를 마치고 나서 150엔을 내고 난뒤 나가는 세 사람의 뒤에 대고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날 수십번 되풀이 한 말을 했다.장사가 날로 번창해 가는 가운데 맞은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 북해정의 주인과 부인은 서로 말은 안 하지만 9시 반이 지나자 왠지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10시가 지나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건 메뉴판을차례로 뒤집었다. 금년 여름 가격이 올라 '우동 200엔'이라고 쓰인 메뉴판이 '150엔'으로 바뀌었다. 2번 테이블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여주인에 의해 놓여 있었다.10시 반이 되자 가게안의 손님이없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와아들, 세 명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교교복, 아우는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커다란 점버를 입고 있었다. 둘다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만어머니는 색바랜 바로 그 첵크무늬반 코트를 입은 모습이었다."저...... 우동 2인분이라도......괜찮을까요""예. 그럼요. 자, 이쪽으로"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거기에있던 '예약석'이라는 팻말을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감추고카운터를 향해"우동 2인분"이를 받아"우동 2인분"주인이 대답하며 국수 3인분을 끓는 물속에 집어 넣었다.두 그릇의 우동을 나눠 먹는 세 사람의 밝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운터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마주보며 미소짓는 여주인과 주인. 주인은 늘 그러했듯이 묵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형아야, 준이야...... 오늘은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고맙다니요 왜요""실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로 8명이나 다쳤단다. 보험으로도갚을 수 없었던 비용을 매월 5만엔씩 내고 있었어.""예, 알고 있어요."형이 대답했다. 여주인과 주인은 가만히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원래는 내년 3월까지 돈을 내게 되어 있었는데 실은 오늘 전부 돈을갚을 수 있었단다. ""정말이에요 어머니.""정말이야. 형아가 신문 배달을 해 주며 애써 주었고, 준이가 매일같이시장보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해 준 덕택이란다. 엄마는 안심하고 일을할 수 있었거든. 열심히 했다고 회사에서 특별 수당도 받았단다. 그걸로 빚은 전부 갚을 수가 있었단다. ""저도 신문 배달을 계속 할래요. 준이야 힘내자, 응"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지금이니까 얘기 하겠지만, 준이하고 저, 어머니에게 비밀로 한 일이있어요. 실은..... 지난 11월 어느 일요일, 준이의 수업 참관 안내가 학교에서 있었잖아요 그때 준이는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한 통 더 받아 왔었어요. 준이가 쓴 작문이 북해도 대표로 뽑혀서 전국 콩쿨에 출전하게 됫기 때문에 참관일에 그 작문을 읽게 됫다고... 선생님 편지를 어머님께 보여 드리면 무리하게 회사를 쉬시게 될 것 같아서, 준이가 그걸 감췄어요. 그 얘기를 준이 친구한테서 듣고 제가 참관일에 갔어요.""그래...... 그랬니 ....... 그래서""선생님이 '당신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라는 제목으로학생 모두에게 작문을 쓰게 했어요. 준이는 '우동 한 그릇'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고 그 작문으로 상을 받았대요. '우동 한 그릇'이라는 말을 듣고 북해정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준이 놈, 왜 그렇게 창피한 글을 썼을까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작문은요,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 가시고 많은 빚이 남았다는 일, 어머니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고 계시다는 일, 제가 조간과 석간 신문을 돌리고 있다는 일등......전부 읽었어요.그리고 12월 31일날 밤, 셋이서 먹은 우동 한 그릇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세 명이서 단 한 그릇밖에 주문하지 않았는데, 국수집의 아줌마 아저씨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말해준 일. 그 목소리가 '지지 말아라! 힘내라!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그래서 준이는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세요! 행복해지세요!'라는마음을 갖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국수집 주인이 되고 싶다고 큰 소리로 읽어 나갔어요."카운터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깊숙이 쭈그려 앉은 두 사람은 한장의 타월 양쪽 끝을 서로 끌어 잡아 당기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작문을 다 읽자 선생님께서 준이의 형이 어머니대신 와주었으니 여기에서 인사하자고 했어요.""그래 그래서 형아는 어떻게 했니""갑자기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이 안나왔지만...... '모두들 언제나 준이와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마워요.동생은 매일 저녁 식사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클럽활동 중간에 집에 돌아가서 폐를 끼치고있는 것 같아요. 지금,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저는 창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작문을 읽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는 사이,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한 그릇의 우동을 부탁한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준이와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이렇게 말했어요."서로의 손을 꼭 잡기도 하고 재미나 죽겠다는 듯이 웃으며 서로 어깨를두드리는 등 이들은 지난해와는 전혀 다르게, 즐겁게 이야기하며 한 해를보내는 국수를 먹었다.식사를 하고 300엔을 낸 뒤 "잘 먹었습니다."라며 머리를 깊이 숙이면서나가는 세 사람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1년을 마감하는 큰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외쳤다.그로부터 1년 뒤. 북해정에서는 밤 9시부터 '예약석'팻말을 2번 테이블위에 놓고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그 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2번 테이블을 비워두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나타나지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날로 번창하여 가게안을 새로 꾸미게 되었다. 새로 들여놓은 테이블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딱 하나 낡은 테이블이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왜 이게 여기 있지요"이상하게 생각하는 손님들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 그릇'이야기를하고는, "이 테이블을 보면서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으며, 언젠가 그 세 명의 손님이 와 주실 지도 모르므로 그러면 이 테이블로 모시고 싶다."고 설명했다.이 이야기가 '행복의 테이블'로 손님들에게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서찾아와 국수를 먹고 가는 여학생도 있었고, 그 테이블이 비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문하는 젊은 커플도 있는 등 인기를 모았다.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흐른 12월 31일 밤의 일이었다. 북해정에는 같은 마을 상점회 회원으로 가족같이 지내는 친구들이 각각 가게문을 닫고모여 있었다. 북해정에서 한 해를 보내는 국수를 먹은 뒤 제야의 종소리를들으면서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지내는 것이 5,6년 전부터의 연례 행사였다. 이날 밤도 9시가 지나가 생선 가게집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담은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언제나 모이는 동료 30여명이 술이나 안주를 들고 차례로 모여왔다. 가게안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됫다. 2번 테이블의 유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입밖에는 내지 않지만 아마도 올해 역시 빈 자리로 새해를 맞이하게 될 '섣달 그믐날 10시 이후의예약석'을 그대로 둔 채, 좁다란 자리에 전원 조금씩 몸을 비켜 늦게 온동료들을 맞아 들였다.국수를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가지고 온 요리에 손을 뻗는 사람, 카운터안에 들어가 도와주는 사람, 자기 멋대로 냉장고를 열어 뭔가끄집어 내는 사람도 있다. 물건을 왕창 판 이야기, 해수욕장에서 있었던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났다는 이야기 등으로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10시반쯤, 입구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몇 사람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지자 갑자기 모두 조용해졌다. 오버 코트를 손에 들고, 양복을 입은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모두 '다행이다'라는듯이 숨을 내 쉬며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여주인이 미안하다는얼굴로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어서요.'라며 나가 달라는 요청을 하려는 찰나, 기모노를 입은 부인이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들어와 청년 둘 사이에섰다.가게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기모노를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저...... 우동 3인분인데 괜찮을까요"이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바뀐다. 10여년전의 세월로 순간, 되돌아가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 두명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 모습에 겹쳐졌다.카운터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주인과 지금 들어온 세 명의 손님을 번갈아 가리키며 "아, 여보!"라며 어쩔 줄 모르는 여주인에게 청년중 하나가 말했다."저희들은 14년 전의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세 명이서 한 그릇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의 우동 한 그릇의 힘을 얻어 세 명이서 힘을 모아 살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후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시가겐으로 이사했지요. 저는 올해 국가 시험인 의사 자격 시험에 합격을 해서 교토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의 후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내년 4월부터는 삿포로의 종합 병원에서 일 할 계획입니다. 그 병원에 인사하고, 아버지의 산소에 이사실을 보고하는 김에 국수집 주인은 되지 않았지만 교토의 은행에 근무하는 동생과 상의해서지금까지 살아온 중에서 제일 호화스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니와 세 명이서 삿포로에 있는 북해정을 찾아 3인분의우동을 부탁하는 일이었지요."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입구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던 채소가게 주인은 국수를 입에 담은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결국 국수를 삼켜버리고 벌떡 일어났다."이봐요, 여주인! 뭘하고 있는거야! 10년동안 이 날을 위해 준비하고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이후의 예약석'이 아닌가 빨리 안내해야지 안내!"그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어서 오세요. 자, 이쪽으로. 여보! 2번 테이블에 우동 세 그릇!"뜻하지 않게 터져 나온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떠들썩한 가게. 밖에는 방금전까지 흩날리던 눈도 멎었다. 신설(新雪)에 반사되 더욱 밝아진 창문 빛이 '북해정'이라고 쓰인 발을 환히 비추었다. 이 발을 종종 걸음 치듯 불던 정월 바람이 흔들고 있었다.** 구로 료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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