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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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코리아 리뷰를 창간,서방세계에 한국을 소개했고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로파견돼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알렸던 헐버트선교사의 묘역이50주기를 맞아 새롭게 단장된다.헐버트선교사기념사업회(회장 신복룡교수)는 5일 오전 10시30분 서울 합정동양화진외국인묘역에 있는 헐버트선교사묘지에서 묘비와 기념비제막식및 단장식을갖는다.그동안 헐버트선교사의 묘비엔 한국이름이 빠져있던 상태.이번 제막되는묘비명에는 김대중대통령이 직접 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휘호가 새겨졌다.기념사업회는 이승만대통령이 휘호를 써주겠다고 했으나 6.25로 성사되지 못했다며김대통령이 써줄 것을 요청,휘호를 받았다.한국이름 흘법,할보로 불렸던 헐버트선교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다트머스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나왔으며 1886년 한국정부가 운영하던육영공원교사로 내한했다.그는 이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간이천문지리서라 할수있는 ‘사민필지’를 순 한글로 저술했다.이책은 후에 일반학교의 필수교재가 되었다.그는 1891년 육영공원이 축소되려 하자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가 2년 후목사안수를 받고 감리교선교사로 다시 내한했으며 감리교가 운영하는 삼문출판사의책임자로 문서선교를 했다.또 영문 한국학 연구지인 ‘코리아 레포지토리’를발행,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대한 글을 실었고 1901년 코리아 리뷰지를창간,본격적인 한국학 논문을 게재했다.그는 이런 연구들을 통해 한국을 깊이 이해하게 됐고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자주독립을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됐다.1905년 일본의한국병합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고종은 그를 밀사로 서방에 파견했으며 후에 다시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됐다.황성 기독교청년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지나치게사회참여적이라 선교에 지장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1907년 미국으로 떠났다.한국이 해방된 후에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다시 한국에 왔던 그는 여독을이기지 못하고 1949년 8월5일 소천받았다.장례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사회장으로 치러졌다.그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웨스터민스터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묘비명에는 이 유언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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