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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기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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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기독교 역사는 올해로 1백9년이 되었다.구한말 최대의 항구였던 부산은 선교사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따라서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등 서구의 선교사들은 부산에 들어와 인천 서울 등으로 올라가 정착하는 일이 많았다.부산지역은 복음과의 접촉에서도 관서지방이나 서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를 처음 의결한 곳이고 해방후에는 교회 재건운동,특히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또한 6·25전쟁 중에는 신앙으로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 기도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그러나 부산은 워낙 왜색이 짙고 이동인구가 많아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부산지역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첫번째 노력은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으로 알려져 있다.이때 약 2천권의 복음서가 반포되었는데 그 기간이 워낙 짧아 지역 복음화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선교의 문을 연 사람은 1889년,1년 6개월동안 활동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다.그는 `전환기의 한국'이라는 저서와 한국의 문법책과 사전을 편찬한 외에도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인의 협조를 얻어 `사역 신약전서'를 완성,발행하기도 했다.부산선교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던 사람은 호주선교사 헨리 데이비스.그는 누이 메리 데이비스와 1889년 10월 부산항에 입항,인천과 서울에서 지내다가 90년 다시 부산지방의 선교를 위해 찾게 되지만 폐렴으로 사망한다.그가 한국땅을 밟은지 6개월만이었다.데이비스의 죽음으로 부산선교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그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1890년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맥케이를 선교사로 파송했다.같은해 호주장로교 여선교회연합회도 창립과 함께 맨지스 등 3명의 여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다.그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가 부산에 오면서 본격적인 기독교선교가 시작됐다.그는 영선현에 자리잡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곳이 북장로교의 선교의 중심지이자 훗날 부산 초량교회의 모체가 되었다.그는 자신의 방을 개방,사랑방으로 활용해 전도거점으로 삼았다.그의 광범위한 순회전도를 돕기 위해 초기신자중 한사람이자 최초의 매서인이었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가 1892년 부산으로 내려와 베어드를 도와 순회 전도에 힘쓰기도 했다.호주 선교사 맥케이 부부와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 파송을 받은 맨지스를 비롯한 세사람의 미혼 여선교사들은 부산진으로 이동,현재의 부산진교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여선교사들은 3명의 한국 고아를 집으로 데리고가 돌보기 시작했다.1895년에는 소녀들을 모아 주간학교를 시작했고 그 학교의 이름은 날마다 새롭다는 뜻의 `일신'이라고 지었다.여선교사들이 여성교육을 중시한 것은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일신여학교는 여학생뿐만 아니라 뒤에는 남학생들도 입학을 허용했고 비신자 자녀들에게도 문을 열었다.이같은 노력으로 일신여학교는 복음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 이 학교 출신 박순천 김차숙은 부산지역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현재 이 학교는 재정난을 견디다 못해 다른 종교재단으로 넘어간 상태다.부산지역의 첫 세례식은 1894년 4월22일에 있었다.세례식은 베어드 선교사가 집례했는데 심상현 이도염 등 3명이 받았다.일반적으로 심서방으로 알려진 심상현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2년간 맨지스의 어학선생으로 일을 했다.이들은 호주 선교부의 첫 결실이자 부산지방 첫 기독교 열매라고 할 수 있다.그후에도 간간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신앙을 얻기 위한 순순한 동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 선교사를 찾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두 교회는 동구 초량동의 초량교회와 부산진구 좌천동의 부산진교회라고 할 수 있다.초량교회는 베어드 선교사가 거점으로 잡은 영선현에서 출발,영주동에 이어 현재 초량동으로 옮겼다.순교자인 주기철목사가 3대 담임을 맡기도 했던 초량교회는 유구한 역사 아래 연산제일교회 반송교회 재송제일교회 부산남부교회 등을 개척,부산 복음화에 앞장섰다.주기철 목사는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삼일 어린이집을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초량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다.부산진교회는 왕길지목사를 1대로 맞으면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최초의 세례식과 부산 최초의 서양결혼식이 부산진교회에서 있었다.교회가 부흥하면서 장신교회 동은교회 용호제일교회 시레교회 연산교회등 많은 교회들을 개척했는데 현재는 모교회보다 더 눈부신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양 교회를 필두로 부산지역에 뿌리 내린 기독교는 부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신의료원 침례병원 등을 통해 기독교의 사랑을 전파했으며 수많은 교회를 개척,민중들에게 소망과 새날을 주는 희망으로 작용했다.걸출한 인물들도 배출,고 장기려박사,인제대총장 전종휘박사,고신대학교 설립자 고 한상동박사,부산신학교 학장을 지낸 방계성 박사,부산시장을 지낸 양성봉 장로 등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다.그러나 부산은 지역적 특성 때문에 복음화율이 미약하다.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이같은 이유를 “유난히 불교세와 민간신앙 왜색신앙이 강한 지역적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부산지역의 한 원로 기독사학자는 부산의 기독교세가 미약한 것은 복음을 지키기에 힘썼을 뿐 전파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최근 부산지역 기독교계 인사들은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미약한 복음화율을 높이기 위해 고신 합동 통합 등의 강단교류를 시작했다.이같은 노력들이 21세기 세계를 향해 도약하고 있는 부산에 새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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