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초기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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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일본을 거쳐 제물포항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선교사와 감리회의 아펜젤러선교사의 최종 목적지는 조선의 도읍인 한양이었다.마치 사도바울이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로마에 들어가기를 소망했던 것 처럼 이들은 서울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이들은 서울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경우 조선의 복음화는 자연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그들의 판단은 맞았다.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두 선교사의 미션로드는 변화를 바라는 한국민중들의 요구와 맞물려 초기의 오솔길이 대로로 닦여져 갔다.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서울에서 발아됐고 이후 서울은 기독교선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이땅의 복음화를 견인했다.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들어간 두 선교사는 각각 교회개척과 교육사업에 열중했다.1887년 9월27일 언더우드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개종시킨 14명의 초대교인들과 함께 한국최초의 조직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설립당시의 이름은 정동장로교회로 서상륜,백홍준,로스선교사 등이 참석했다.이들가운데 한명이 세례를 받았고 두사람이 장로로 피택됐다.교회는 1907년 현재의 위치인 신문로에 새로운 터를 잡고 벽돌예배당으로 신축됐다.아펜젤러선교사는 10월9일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축이 된 7명의 교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이후 아펜젤러선교사는 활발하게 국내외 모금활동을 펼쳐 1897년 12월26일에 교회의 헌당예배를 드렸다.교회는 배재·이화학당 학생들의 열성적인 성경공부 등으로 빠르게 발전해 갔고 일제하 민족운동의 진원지가 됐다.현재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 사학계의 적지않은 이론이 있기에 어느측이 한국최초의 교회라고 못박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회를 정식 설립한 일자는 새문안교회가 빠르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미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조직적인 신앙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시각에 따라서는 새문안교회보다 교회개척이 더 빠르다고 말할 수 있다.아무튼 이 두 교회는 모두 서구선교사들이 만주에서 세례받고 들어온 신앙인들과 그들의 전도결과로 얻어진 개종자들,일본에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은 학생 등과 협력해서 설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두 교회를 시초로 이후 상동교회,승동교회 연동교회 남대문교회 안동교회 등 많은 역사깊은 교회들이 서울에 설립됐다.초기 서울의 선교역사에서 정동일대는 아주 의미로운 지역이다.선교초기 서울의 교회들과 기독교계 학교들은 대부분 정동지역에 자리잡았다.새문안 교회와 정동감리교회,배재학당,이화학당 등이 정동일원에서 둥지를 틀었다.많은 외국공관들이 들어선 정동지역은 당시 조선의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였고 자연 선교사들은 영향력 파급이란 측면에서 정동지역의 선교공략에 치중했다는 분석이 나올 수 있다.1890년대에 들어서 서울에는 이 두선교사외에 감리회가 파송한 스크랜턴선교사,영국 성공회의 코르프신부,미국 남장로회의 테이트,레이놀즈선교사 등 적지않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사실 초기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한국적응과 선교방법상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개인간의 반목도 심해 미국 공사관의 공의로 파송돼 활동하던 알렌선교사는 언더우드를 “위선자요 수다장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이들은 함께 선교사 수련회를 갖는 등 협력해 나가기 시작했다.이들 선교사들이 열중한 것은 교회개척만이 아니었다.1885년 8월에 아펜젤러선교사는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세웠고 1886년 5월에는 스크랜턴선교사가 정동에 여성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했다.감리교가 최초로 서울에 배재와 이화학당을 세우자 장로교도 이어 경신학교,정신학교를 세웠으며 배화학당,연희전문 등 기독교계 학교들은 미몽에 허덕이던 한국민중들을 계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장로교와 감리교 뿐 아니라 이후 성공회와 구세군 등 각 교파들도 서울에서 정력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1890년 영국성공회에서 파송된 랜디스와 코프주교는 정동에 성누가병원을 지어 선교근거지를 마련했다.코프주교가 1890년 12월21일 정동의 성당터에서 첫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성공회는 공식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게 됐다.자선냄비로 상징되는 구세군은 1908년 10월 한국구세군 초대사령관인 영국출신의 호가드정령이 내한,서울에서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구세군의 정신이 펼쳐졌다.당시 구세군은 금주 금연 아편금지 축첩금지 등 사회악 해소운동을 전개하면서 서서히 한국민중들에게 다가갔다.초창기 서울에는 이들 선교사들 뿐 아니라 관서지역에서 미리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자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적지않게 활동했었다.언더우드선교사가 당시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에서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밝힌 것처럼 1백여년전 서울에는 이미 지금의 선교한국을 선도해 나갈 잠재력이 있었다.선교사들과 자생적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적인 선교로 서울은 점차 복음의 도시로 바꿔져 갔다.일제시대에 교회는 서울의 민중들에게 반봉건과 반식민지투쟁에 앞장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비록 한국교회는 신사참배결정 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민중의 계몽과 왕실의 개방,개화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해방후 서울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운동을 펼치면서 한국 정치와 사회변동사의 핵심역할을 했다.70년대와 80년대 서울은 세계가 주목한 기독교 부흥의 핵심지였다.엑스플러대회 등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1백만명 이상의 초대형집회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열려 한국의 선교역량을 세계에 과시했다.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최초의 교회를 세운지 1백12년이 지난 지금,서울은 1만여교회,2백50여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는 기독교의 중심지로 변모했다.이제 서울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선교를 위한 21세기 미션로드의 출발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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