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번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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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개항과 함께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하게된다.선교사들은 먼저 인천으로 들어와 서울에서 베이스캠프를 차린 후 전국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기독교가 전파된 곳은 토네이도처럼 강력한 신교육과 신문화의 회오리 바람이 일어났고 그 힘은 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본보는 선교 초기부터 최근까지 기독교와 지역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신앙선배들의 선교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리즈 `미션로드'를 매주 목요일 연재한다.본보는 이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기독교가 어떤 경로를 따라 전국으로 전파되었는지,또 어떻게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를 해 왔는지 밝히고자 한다.인천은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의 관문도시였다.구한말 당시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항구였던 관계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인천을 통해 입국했다.따라서 인천은 자연히 기독교 선교 1번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고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인천은 일찍 새로운 서양문물을 접하게 됐고 다른 지역사람들보다 좀더 일찍 개화 된다.근대 개화기를 이끈 인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인천출신이라는 점은그 때문이다.인천시 중구 중앙동1가 18번지.지금은 인천항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언덕에 자리잡은 올림포스호텔 앞의 허름한 빈터에 불과하지만 개항 당시 이 곳은 제물포 내리동의 중심지였다.중국상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차이나타운'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에 아름다운 3층짜리 목조건물인 해리스호텔이 있었다.인천항이 개항되고 난 2년후인 1885년4월5일,미국인 선교사 세사람이 이 호텔에 투숙했다.그들은 미북감리교회 아펜젤러부부와 북장로교회 언더우드였다.아펜젤러부부는 곧바로 서울로 가려고 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상경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가 6월20일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인천항에 내린 아펜젤러는 초가집을 빌려 40여일 가까이 머무르며 한국선교를 구상했다.그 초가집이 남한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다.7월6일에는 미국에서 부쳤던 오르겐이 도착해 아펜젤러부부는 그 오르겐으로 첫 예배를드렸다.이것이 인천에서의 첫 공식예배였다.이 예배를 시작으로 기독교선교가 열린 인천은 교육과 의료 문화적인 측면에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서울로 간 아펜젤러는 1889년 5월 배재학당 출신인 노병일을 인천으로 보내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노병일은 초가집 교회를 팔아 현재 내리교회의 위치인 내동으로 옮겼다. 그 뒤 이곳에 국내에서 처음 벽돌로 지은 교회가 세워졌다.노병일은 질풍 노도처럼 여러 곳을 다니며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며 선교를 했다.그는 온몸을 바쳐 전도하다 6년 뒤 병으로 소천했다.당시 인천은 개항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 들었다.그들은 교회를 찾았다.그 이유는 자녀교육을 위해서였다.신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내리교회는 1903년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세웠다.이 학교에는 젊고 똑똑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그중 김기범은 한국감리교 최초의 목사가 됐다.갈홍기박사와 김활란박사 등도 영화학교 출신들이다.교 회는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학생들은 교회에서 밤을 새며 공부했다. 1899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한국 최초로 신학회가 열려 신학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내리교회는 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인근에 만수교회를 세웠으며 잇달아 화도교회 숭의교회 주안감리교회 율목교회 창영교회 등이 세워졌다.주안감리교회 한경수목사는 “인천이 항구고 바다를 대상으로 생업을 하는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신을 믿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자유정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바로 주민들의 정신세계를 일깨웠으며 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1896년에는 곽일이라는 사람이 `민권'을 바탕으로 자유당을 만들자는 통문을 돌린 사건은 기독교의 이념과 가치를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영화학교를 시작으로 출발한 미션계의 학교는 인성 중앙 등의 학교설립으로 이어졌다.미션계학교와 기독인들은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당시 교회는 성가대를 중심으로 음악인들을 길러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을 비롯해 장일남 ,윤학원,코메디언출신의 곽규섭목사,소프라노 김청숙 등 많은 예술인들을 배출했다.53년에는 내리교회 성가대가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메시아전장을 부르는 쾌거를 남겼다.이렇게 인천시에 뿌리내린 기독교는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설립으로 인천의 발전에 최고의 원동력을 제공하게 된다.인하공대는 인천 내리교회를 다니다 하와이에 이민 간 교민들이 보내온 돈으로 1954년 설립됐다. 하와이이민공사에서 모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에 내리교회 교인들이 1차와 2차로 나눠 모두 9천여명이 하와이로 떠났다.당시 일을 생생히 기억 하고 있는 내리교회 김인수장로(83)는 “부푼 꿈을 안고 이민을 간 내리교회 교인들은 하와이의 어려운 이민생활에서도 돈을 모아 호놀룰루교회를 세우고 고향인 인천에 공과대학을 세워달라며 15만달러를 보내왔다”고 그때 일을 회상했다.그들은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따서 `인하공대'로 학교명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산업화 과정에서 인천기독교는 곳곳에 도시근로자및 빈민선교교회를 세우고 산업선교에 헌신했다.현재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총무인 김종렬목사 등이 도시산업선교의 일꾼이었다.이들의 노력으로 근로자들은 근검 절약정신을 배웠으며 민주화운동에도 일조했다.인천시 교회들은 80년부터 인천성시화운동을 일으키고,인천을 안정감이 있고 고루 잘 사는 도시로 만드는데 노력해오고 있다.인천은 인구 2백50여만명 가운데 70여만명이 기독교인이다.교회는 2천3백여개나 된다.이때문에 인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이 지역 국회의원 12명 가운데 서정화 이강희 조한천 심정구 서한샘 이윤성의원 등 10명이 기독인이고 구청장 가운데도 70%가 교회에 출석한다.인천시기독교연합회는 지난 85년 인천항앞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을 건립했다.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한국선교를 기념하는 이 기념탑은 인천개항 100주년기념탑과 함께 항도 인천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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