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삼하2:24-28)
본문
1.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임기 중에 인기있는 대통령이 되기 보다는 임기 후에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 다고 말했습니다. 시작보다는 나중에, 다시말해 뒷맛이 괜찮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은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98년도 한 해의 시작이 비록 쓰다할지라도 그 뒷맛까지는 쓰지 않 기를 바랍니다.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세 아들이 전사하고 사울마저 자 결하므로 사울의 왕권이 끝이 나고 그의 가문 역시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된 다윗은 망명지 시글락 에서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 땅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오직 유다 지파만을 통치하는 불완전한 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 울의 마지막 남은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계승하 여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 윗은 이스보셋과 대립하면서 전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과제, 즉 민족 통일의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던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어 국가의 존립에 큰 위기가 닥쳤고, 백성들은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 져 누군가 능력있는 왕이 나타나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끌어 줄 것을 고 대했었던 때에 다윗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 왕은 흩어진 온 이스 라엘의 마음을 하나로 연합시키기에 충분한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즉, 사 울과 요나단을 위한 그의 애가(1:17-27),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베푼 공정한 호의(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지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복을 빌고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는 점,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내편이든 원수편이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 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공의로운 통치였습니다. 4-7절), 적군 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군대와의 대치에서 보여 준 수동적 방어 자세 (12-15절), 적장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일(
3'31-34) 등등 그가 백성들 앞 에서 보여 준 행동 하나하나는 바로 그의 연단된 인격에서 나온 보배로 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그의 연단된 훌릉한 인격 안에서 분단된 국가를 하나의 통일 국가로 연합시켰던 것입니다(5:1-5). 이렇게 볼 때, 다윗이 그간 약 15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방황한 것은 그를 신정왕국의 강력한 왕으로 세우기 위해 불로 연단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연 단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제 때가 되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이와 같이 빈틈없는 하나님의 완전 무결한 섭리를 믿고, 그 고난을 자기의 신앙 인격을 키워나가는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신앙을 가 야 할 것입니다(약 1:2-4). 그야말로 인생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어떠한 삶의 고난과 아픔도 신의 성품,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신앙의 인격 성장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사울왕이 죽은 뒤, 왕자 이스보셋을 옹립하는 이스라엘 왕조 계승파 와 다윗을 왕으로 모시고 유다 왕국을 창설한 파로 민족 분열을 가져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곳곳마다 다윗 편이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왕의 참모총장이었던 넬 장군의 아들 아 브넬이 청년장군으로서 이스라엘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전세가 기울어 지자 부하들을 이끌고 요단 강 건너편으로 멀즉이 피신길에 오릅니다. 이 망명군을 추격한 것이 유다의 3총사라는 3형제 장군 요압과 아비새와 아 사헬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쫓는 자나 쫓기는 자나 얼마 전만 해 도 같은 왕 사울 밑에서 용맹을 떨치던 동족이며 친구이며 전우들이었습니다. 암마산 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이 추격하는 요압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 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 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이 번역은 영어번역(RSV)이 잘 살리고 있습니다.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뒷맛이 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칼이 우리 민족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줄 아느냐 네가 형제인 나 를 죽여 봐야 뒷맛이 쓸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를 듣고 요압은 추격을 중단하고 돌아가버립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할 인생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 냐"하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먼저, 아브넬이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질문으로서 요압의 반성 을 촉구한 내용은 일시적인 성취가 성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은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최후의 일격으로서 그 의 목을 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를 후세까지 내다볼 때 동족상잔과 형제의 피를 홀린 것이 정말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것은 뒷맛이 쓸 것이 분명하므로 실패인 것입니다. "일시적인 성취를 생각할 것인가 나의 인생 전체를 내다보며 뒷맛이 쓰지 않을 발자욱을 남 길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인생의 뒷맛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던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자신하 고 예수께 찾아갔지만 그가 소유한 많은 재물을 처분하고 예수를 좇으라는 말씀에 쓴 맛을 다시고 예수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도덕 수준과 경제 수준이 제아무리 높을지라도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아니하면 인 생의 뒷맛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 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 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 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자기 스승을 배반하고 삶의 쓴 맛을 마시고 말 았습니다.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지라." 여러분 삶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브넬이 자기를 추격하는 젊은 장교 요압들 향하여 "네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뒷맛을 쓰게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외친 내용은 적어도 한 인생의 결론을 생각하라는 반성의 촉구였습니다. 요압이 아브 넬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면 새로운 왕국 유다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목을 잘라 영웅이 되는 것이 요압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과연 성공일까 사람은 죽는 순간에 가서 후회를 안남기도록 살아야 합니다. 인생 도중에서 갖는 몇 번의 쾌감이나 수차의 성공감이 문제가 아니다. 나의 인생의 막이 내릴 때 뒷맛이 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날마 다의 문제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결정과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에 결부시킬 문제입니다. 권력을 탐하던 제자들에 게 예수님은 "너희가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이 무슨 잔인줄도 모르고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발을 옮겼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전진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중에 예수를 존경하는 인사가 있었 습니다. 그는 헤롯당의 내부기밀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권력층 내부 의 인사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찾아와 귓뜸을 해주었습니다. "여보십쇼, 헤롯일당이 당신을 살해 할 계획을 추진 중이니 예루살렘에는 가지마시 오." 이때 예수는 결연히 말했습니다. "그 여우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 해 주오.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자기의 길을 계속 갈 것 이라고."(눅 13:33)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신의 길, 십자가의 길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나사렛 시골뜨기라고 흉을 보든 말든, 술을 좋아하는 자라고 욕하고, 창녀와 세리와 어울린다고 비 난하고, 어머니와 형제들까지도 이해해주지 않고, 제자들마저 예수의 길 을 돌이키게 하려하고, 위협과 공갈히 길을 막았지만 그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겠다는 결의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현재는 썼지만 뒷맛을 쓰게 만들지 않은 성공의 비결이 었다. 카나다의 유모어에는 뉴피(뉴 파운드랜드 사람을 격멸하는 "촌놈"에 해당하는 말)에 대한 이 야기가 많으며 모두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뉴 파 운드랜드의 하이웨이를 두 차가 교차했는데 두차의 운전하던 사람은 모 두 죽고 차체는 둘 다 상한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운전하던 사람들이 고 개를 창 밖으로 내밀고 서로 구경하다가 얼굴끼리만 부딪친 것입니다. 이 유머어는 자기 갈 곳이나 똑바로 바라볼 것이지 남의 운전에 관여하지 말라는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 내 길,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다."고 선언한 예수의 인생태도가 뒷 맛이 쓰지 않는 생애를 위한 정답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크 리스찬으로서 "내가 갈 길"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즉 "나는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하는 결정입니다. 후회함이 없는 삶의 길을 가기 위해서 진리와 생명, 그리고 길이 되신 예수의 길, 십자가의 길, 좁지만 생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요압이 "너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는 아브넬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개인적 성취보다는 민족을 생각했고, 일시적 성공보다는 장래를 생각했으 며, 순간적 쾌감보다는 뒷맛을 생각한 것처럼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생애, 한번 사는 나의 인생을 성공시키기 위하여는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고상 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갔던 복음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장차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그 뒷맛이 달콤한 삶의 길입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 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3. 마지막으로, 십자가 복음의 길의 뒷맛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왕 다윗측과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 이스보셋측과의 군사적 충돌인 기브온 전투가 발발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에 의의 세력과 불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 세우신 참다운 왕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하고 있었는데 도 불구하고(4절) 마하나임에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한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 점(8-11절)은 부득블 두 세력간의 충돌을 가져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기브온 전투가 발발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기브온 못을 차지하기 위한 이스보셋측의 야망 에 찬 전쟁 제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하2:12)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 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삼하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 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 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삼하2:14)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지형적 특성상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하였습니다. 당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던 기브온 못은 이스보셋측의 탐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기브온 못은 양 진영이 탐을 낼 만큼 많은 물을 담아 놓을 수 있었던 큰 저수지였습니다.
이곳에 물을 채우면 약 6천여명이 마실 수 있는 저장 량으로 당분간 성이 포위되더라도 물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이 처럼 물이 귀한 가나안에서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으며 전략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군사 적 충돌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브온 전투는 이스보셋측의 뜻대 로 진행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쌍방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나 기는 하였지만 대세는 다윗측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원인은 이스보셋과 다윗은 서로 그 즉위 배경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보셋 왕국이 근본적으로 출발 부터 잘못된 인본주의적 왕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인정 속에 왕이 되었으나 (삼상 16:1-13) 이스보셋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유다 사람들 곧 장로들이 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으나(4절) 이스보셋은 아브넬 개인의 세력을 바탕 삼아 즉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스보셋의 즉위는 사실 이스보셋을 앞에 내세워 통치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 한 아브넬의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말미암 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아군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양군의 동족성을 내세워 요압에게 휴전을 제의합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 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 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그러자 요압은 비록 아브넬의 제안이 못마땅했지만 피흘리기를 싫어하는 자기 군주 다윗 왕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터라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삼하2:27)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 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 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2:28)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삼하 2:29)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휴전 결과를 살펴보니 유다의 전사자는 19명과 아사헬, 이스라엘의 전 사자는 360명이었습니다(30-32절).
우리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투에서는 승자나 패자없이 모두 슬 픔을 맛보았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간의 분쟁에서 승 리하는 것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 오직 바깥 세상의 원수들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쓸데없는 분쟁을 일삼을 때 득을 얻는 자는 오직 사단뿐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마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 라.(민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 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 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이스보셋이 무려 열 한 지파라는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왕이었다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과 그 나라의 뒷맛 은 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세력은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뒷맛이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의의 세력은 분열과 동족 상잔보다는, 그리고 일시적은 성공과 성취감보다는 하나가 되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십자가로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돈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교권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고 사는 그 앞에 십자가의 쓴맛이 기다린다해도 그 뒷맛은 부 활, 영생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예수 믿는 믿음 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사 울의 마지막 남은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계승하 여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 윗은 이스보셋과 대립하면서 전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과제, 즉 민족 통일의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던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어 국가의 존립에 큰 위기가 닥쳤고, 백성들은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 져 누군가 능력있는 왕이 나타나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끌어 줄 것을 고 대했었던 때에 다윗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 왕은 흩어진 온 이스 라엘의 마음을 하나로 연합시키기에 충분한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즉, 사 울과 요나단을 위한 그의 애가(1:17-27),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베푼 공정한 호의(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지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복을 빌고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는 점,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내편이든 원수편이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 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공의로운 통치였습니다. 4-7절), 적군 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군대와의 대치에서 보여 준 수동적 방어 자세 (12-15절), 적장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일(
3'31-34) 등등 그가 백성들 앞 에서 보여 준 행동 하나하나는 바로 그의 연단된 인격에서 나온 보배로 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그의 연단된 훌릉한 인격 안에서 분단된 국가를 하나의 통일 국가로 연합시켰던 것입니다(5:1-5). 이렇게 볼 때, 다윗이 그간 약 15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방황한 것은 그를 신정왕국의 강력한 왕으로 세우기 위해 불로 연단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연 단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제 때가 되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이와 같이 빈틈없는 하나님의 완전 무결한 섭리를 믿고, 그 고난을 자기의 신앙 인격을 키워나가는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신앙을 가 야 할 것입니다(약 1:2-4). 그야말로 인생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어떠한 삶의 고난과 아픔도 신의 성품,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신앙의 인격 성장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사울왕이 죽은 뒤, 왕자 이스보셋을 옹립하는 이스라엘 왕조 계승파 와 다윗을 왕으로 모시고 유다 왕국을 창설한 파로 민족 분열을 가져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곳곳마다 다윗 편이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왕의 참모총장이었던 넬 장군의 아들 아 브넬이 청년장군으로서 이스라엘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전세가 기울어 지자 부하들을 이끌고 요단 강 건너편으로 멀즉이 피신길에 오릅니다. 이 망명군을 추격한 것이 유다의 3총사라는 3형제 장군 요압과 아비새와 아 사헬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쫓는 자나 쫓기는 자나 얼마 전만 해 도 같은 왕 사울 밑에서 용맹을 떨치던 동족이며 친구이며 전우들이었습니다. 암마산 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이 추격하는 요압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 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 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이 번역은 영어번역(RSV)이 잘 살리고 있습니다.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뒷맛이 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칼이 우리 민족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줄 아느냐 네가 형제인 나 를 죽여 봐야 뒷맛이 쓸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를 듣고 요압은 추격을 중단하고 돌아가버립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할 인생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 냐"하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먼저, 아브넬이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질문으로서 요압의 반성 을 촉구한 내용은 일시적인 성취가 성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봉우리에 몰린 아브넬은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최후의 일격으로서 그 의 목을 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를 후세까지 내다볼 때 동족상잔과 형제의 피를 홀린 것이 정말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것은 뒷맛이 쓸 것이 분명하므로 실패인 것입니다. "일시적인 성취를 생각할 것인가 나의 인생 전체를 내다보며 뒷맛이 쓰지 않을 발자욱을 남 길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인생의 뒷맛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던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자신하 고 예수께 찾아갔지만 그가 소유한 많은 재물을 처분하고 예수를 좇으라는 말씀에 쓴 맛을 다시고 예수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도덕 수준과 경제 수준이 제아무리 높을지라도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아니하면 인 생의 뒷맛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 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 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 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자기 스승을 배반하고 삶의 쓴 맛을 마시고 말 았습니다.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지라." 여러분 삶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브넬이 자기를 추격하는 젊은 장교 요압들 향하여 "네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뒷맛을 쓰게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외친 내용은 적어도 한 인생의 결론을 생각하라는 반성의 촉구였습니다. 요압이 아브 넬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면 새로운 왕국 유다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목을 잘라 영웅이 되는 것이 요압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과연 성공일까 사람은 죽는 순간에 가서 후회를 안남기도록 살아야 합니다. 인생 도중에서 갖는 몇 번의 쾌감이나 수차의 성공감이 문제가 아니다. 나의 인생의 막이 내릴 때 뒷맛이 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날마 다의 문제입니다.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결정과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에 결부시킬 문제입니다. 권력을 탐하던 제자들에 게 예수님은 "너희가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이 무슨 잔인줄도 모르고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발을 옮겼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전진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중에 예수를 존경하는 인사가 있었 습니다. 그는 헤롯당의 내부기밀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권력층 내부 의 인사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찾아와 귓뜸을 해주었습니다. "여보십쇼, 헤롯일당이 당신을 살해 할 계획을 추진 중이니 예루살렘에는 가지마시 오." 이때 예수는 결연히 말했습니다. "그 여우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 해 주오.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자기의 길을 계속 갈 것 이라고."(눅 13:33)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신의 길, 십자가의 길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나사렛 시골뜨기라고 흉을 보든 말든, 술을 좋아하는 자라고 욕하고, 창녀와 세리와 어울린다고 비 난하고, 어머니와 형제들까지도 이해해주지 않고, 제자들마저 예수의 길 을 돌이키게 하려하고, 위협과 공갈히 길을 막았지만 그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겠다는 결의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현재는 썼지만 뒷맛을 쓰게 만들지 않은 성공의 비결이 었다. 카나다의 유모어에는 뉴피(뉴 파운드랜드 사람을 격멸하는 "촌놈"에 해당하는 말)에 대한 이 야기가 많으며 모두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뉴 파 운드랜드의 하이웨이를 두 차가 교차했는데 두차의 운전하던 사람은 모 두 죽고 차체는 둘 다 상한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운전하던 사람들이 고 개를 창 밖으로 내밀고 서로 구경하다가 얼굴끼리만 부딪친 것입니다. 이 유머어는 자기 갈 곳이나 똑바로 바라볼 것이지 남의 운전에 관여하지 말라는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 내 길,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다."고 선언한 예수의 인생태도가 뒷 맛이 쓰지 않는 생애를 위한 정답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크 리스찬으로서 "내가 갈 길"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즉 "나는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하는 결정입니다. 후회함이 없는 삶의 길을 가기 위해서 진리와 생명, 그리고 길이 되신 예수의 길, 십자가의 길, 좁지만 생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요압이 "너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는 아브넬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개인적 성취보다는 민족을 생각했고, 일시적 성공보다는 장래를 생각했으 며, 순간적 쾌감보다는 뒷맛을 생각한 것처럼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생애, 한번 사는 나의 인생을 성공시키기 위하여는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고상 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갔던 복음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장차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그 뒷맛이 달콤한 삶의 길입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 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3. 마지막으로, 십자가 복음의 길의 뒷맛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왕 다윗측과 이스라엘 열 한 지파의 왕 이스보셋측과의 군사적 충돌인 기브온 전투가 발발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에 의의 세력과 불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 세우신 참다운 왕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하고 있었는데 도 불구하고(4절) 마하나임에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한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 점(8-11절)은 부득블 두 세력간의 충돌을 가져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기브온 전투가 발발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기브온 못을 차지하기 위한 이스보셋측의 야망 에 찬 전쟁 제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하2:12)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 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삼하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 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 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삼하2:14)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지형적 특성상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하였습니다. 당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던 기브온 못은 이스보셋측의 탐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기브온 못은 양 진영이 탐을 낼 만큼 많은 물을 담아 놓을 수 있었던 큰 저수지였습니다.
이곳에 물을 채우면 약 6천여명이 마실 수 있는 저장 량으로 당분간 성이 포위되더라도 물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이 처럼 물이 귀한 가나안에서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으며 전략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군사 적 충돌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브온 전투는 이스보셋측의 뜻대 로 진행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쌍방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나 기는 하였지만 대세는 다윗측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원인은 이스보셋과 다윗은 서로 그 즉위 배경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보셋 왕국이 근본적으로 출발 부터 잘못된 인본주의적 왕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인정 속에 왕이 되었으나 (삼상 16:1-13) 이스보셋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유다 사람들 곧 장로들이 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으나(4절) 이스보셋은 아브넬 개인의 세력을 바탕 삼아 즉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스보셋의 즉위는 사실 이스보셋을 앞에 내세워 통치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 한 아브넬의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말미암 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아군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양군의 동족성을 내세워 요압에게 휴전을 제의합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 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 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그러자 요압은 비록 아브넬의 제안이 못마땅했지만 피흘리기를 싫어하는 자기 군주 다윗 왕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터라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삼하2:27)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 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 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2:28)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삼하 2:29)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휴전 결과를 살펴보니 유다의 전사자는 19명과 아사헬, 이스라엘의 전 사자는 360명이었습니다(30-32절).
우리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투에서는 승자나 패자없이 모두 슬 픔을 맛보았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간의 분쟁에서 승 리하는 것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 오직 바깥 세상의 원수들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쓸데없는 분쟁을 일삼을 때 득을 얻는 자는 오직 사단뿐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마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 라.(민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 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 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이스보셋이 무려 열 한 지파라는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왕이었다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과 그 나라의 뒷맛 은 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세력은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뒷맛이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의의 세력은 분열과 동족 상잔보다는, 그리고 일시적은 성공과 성취감보다는 하나가 되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십자가로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돈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교권에 맛들인 사람들이여, 그 뒷맛이 쓰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고 사는 그 앞에 십자가의 쓴맛이 기다린다해도 그 뒷맛은 부 활, 영생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뒷맛이 쓰지 않도록 예수 믿는 믿음 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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