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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능력이니라 (막9:14-23)

본문

우리의 6월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회색(灰色)톤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밝은 연두 같은 신록의 3월, 라일락이 피는 보라 같은 4월, 장미와 함께 더욱 신록이 짙어가는 초록의 5월을 지나 원호의 달, 보훈의 달 6월을 맞으면 어느새 눈물과 아픔과 한이 서려있 잔무거운 기운을 곳곳에서 접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기본정서는 누가 뭐래도 한(恨)인데 이 한이 가장 짙게 배어있는 달이 바로 이 6월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 이리 치대이고 저리 부대껴오면서 속 깊은 가슴앓이를 해온 겨레의 마음은 아직 채 흘리지 못한 눈물이 출렁거리고 있고 그 앙금을 끌어안고 힘 餠堞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6월의 표어를 '눈물과 아픔과 한을 씻어주는 사람이어라'로 정했습니다. 굳이 어떤 거창한 역사적 상처나 이웃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오늘 이 '고통의 바다'라고 불리워지는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많은 아픔과 힘겨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육체적 건강, 경제적 위기, 가정적 혼란, 그리고 인간관계의 경직, 실존적 고민 등 이대로 계속된다면 한이 되어 가슴에 응어리져질 그런 일들이, 꼭 풀려지고 해결되어야할 문제들이 우리에게도 산재해 있습니다. 한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새롭게 전환시키는 동력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삶의 기력을 앗아가는 분노나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을 승화시켜면 삶의 동력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한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고난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면 箏앳옛시인의 고백처럼 더할 수 없는 유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익 내지는 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겨지고 아픔은 치유되고 한은 풀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주요 과제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이러한 자신과 이웃의 한 서린 마음들을 풀 것입니까 그리고 그 가슴아픈 이웃의 삶에 어떻게 다가갈 것입니까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는 어찌해야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교회나 성도는 이러한 일을 해결하고 또 해결해 줄 수 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안팎으로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요 사명입니다. '눈물과 슬픔과 한을 씻어주는 교회', 그리고 그러한 '하나 의 백성'이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이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걸까요 무엇으로 그것을 가능한 현실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한 귀신들린 아이를 구해내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다가 다시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산밑으로 내려 왔을 때 많은 무리에 둘러싸인 제자들이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 裏 주님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좀 똘똘하다는 세 제자조차 없는 상황에서 논쟁의 대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면 제자들이 그 거센 파도를 어떻게 감당했는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저들 모두가 무의미한 논쟁에 자신들을 소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후좌우를 살펴볼 때 지금 이 상황은 논쟁에 몰두할 때가 아니라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내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제자나 율법학자나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쓸모 없는 말 恝遲막涇사태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했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자신의 병든 아들을 위해 빌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 아이를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성과가 없었노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하소연은 본질을 비껴나서 서로 '저 잘났다'고 입씨름이나 하고는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분노인 동시에 또한 저가 처한 현실적인 고통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거기 모인 모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주님께서 논쟁을 벌이는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일이 논쟁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해결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믿음은 없고 모두의 관심이 그럴싸한 논리적 설득으로 치중되어 있는데 대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저들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상실한 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아닌 말 뜀무성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이를 내게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짚어내는 말씀이자 그 해결의 핵심이 무엇인지도 일깨우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이를 앞에다 세움으로서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십니다. 그 아들의 상태는 아이 아버지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아이는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이는 넘어지고 입에 거품을 흘리기도 하고 몸이 뻣뻣해지며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간질 증세에 가까운 질환입니다. 이렇게 식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것입니다. 한이 되어 그 마음에 응어리졌을 것입니다. 아이의 상태를 본 주님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이가 저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소' 이 물음은 병자의 상태가 심각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자기 방어능력이 없는 때부터 아이는 이런 질고에 척玭좆都募잔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담한 심정으로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께 '어떻게 손을 좀 써주십사' 부탁하면서 '할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할 있으면이 무슨 말이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당황한 아이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고는 바로 이어서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 이 아버지의 '할 수 있다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이어라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의사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한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절 育岵涇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의 발언이었습니다. 혹 만의 하나 가능하다면, 할 수 있다면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론 자기 자신의 믿음없음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그렇게 인정할 믿음이 그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도 많이 실망하고 속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용하다가는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신통하 募잔능력자들은 다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낫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점점 '이 아이는 안되는구나' 라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주님을 찾아온 것도 고쳐질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여지껏 해온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도 琉뜰이라는 마음이 아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아이 아버지의 소심한 태도를 문제삼고 본격적인 신앙에로 들어가지 못한 아버지의 태도를 바로 잡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부분의 해석에 유의해야 할 것은 흔히들 이 '할 수 있다면'을 놓고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서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겼다'라로만 해석하는데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당신 자신의 능력'이 아닌 '이 아버지의 믿음의 능력에 淪堀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아비의 말을 듣고 당신께 대한 저의 확신이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을 나무라시는 게 아니라 이 아비가 믿음으로 발휘하게 될 능력이 없다는 데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즉 저가 믿음이 없음으로 어떤 역사도 일어날 수 없고 일 나지도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으로 아이를 괴롭히는 악한 영과 힘차게 대결할 것인가의 여부에 있습니다. 이것이 아들의 치유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의 치유는 아버지의 믿음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약으로도 안 품泣 민간요법으로도 안되고, 오직 믿음으로서만이 이 치유와 살림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버지에겐 그럴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용한 의원도 찾아가 보았고, 능력있다는 점술가도 찾아가 보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그에겐 없었습다. 믿음 하나 빼고서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병낫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 기울인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그 믿음 하나 없음으로 인하여 아들은 오랜 세월 귀신에 사로잡혀 고침을 받질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나와 이것은 꼭 '주님 자신이 나서야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없어도 제자들의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 아버지의 믿음만 있으면 해결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문제를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무리와 아이 아버지가 풀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여!' 그 다음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여기 ' 뺐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되겠느냐'는 말은 아직 저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저들을 떠나지 못하고 저들 곁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만 있으면 지금 당신이 없다해도 문제가 해결되고 풀리겠지만 믿음이 없다보니 당신이 없으면 문제 풀지 못하는 것이고 그런 현실 때문에 주님은 그들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만 있으면 주님이 없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도 율법학자들도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도 쩔쩔매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고통당하는 자의 심정에 다가가서 위로하고 도우시지만 그 문제 해결은 결국 그 당사자나 가족이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해결의 주 가 되지 못하고 늘 누군가에게 의존적이 되며 결국 그 심령이 노예화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버나움의 한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병자는 친구들이 병상째 들고 주님을 찾아가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고침을 받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저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막2:5절에 보 芮'주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의 병도 낫게 하시고 저의 죄도 사함받게 하십니다.
여기 '저희'란 바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허락한 병자의 믿음이기도 하고, 치유를 확신하고 그를 지붕을 뜯으면서까지 주님 앞에 려다 놓는 친구들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문제해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고 당신은 그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키는 바로 '아이 아버지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 아이를 고칠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 아이를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 熾都잔지금 그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본문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종종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했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우리는 아무런 믿음 없이 냥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다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의 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수 문제를 무조건 대신 쓰윽쓰윽 풀어주는 선생은 좋은 선생이 아닙니다. 좋은 선생은 스스로 풀게 합니다. 틀려도, 오래 걸려도 스스로 풀게 하는 선생이 좋은 선생입니다. 좋은 선생은 그 아이가 그 문제를 풀도록 곁에서 도와줄지언정 결국 답은 학생 스스로 리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조차 앞서서 다 해결해놓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해결하도록 도와주시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무 믿음 없이 그냥 막연히 나의 문제를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믿음의 현실을 점검하고 진단하지 않고 그냥 교역자가, 내 구역식구들이, 나를 아는 교우들이 다 알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은 기도하지 않고, 믿음으로 매어달리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노력과 기도와 애씀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가 말입니다. 그것도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되면 좋은 것이고 안되면 마는 것이 ' 하는 심정으로. 이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바로 그 당사자의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믿음이 없으면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일단 본인이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거기에 함께 돕는 마음들이 모여 泡때에 비로소 문제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제사 그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일깨움 속에서 무엇보다도 자기의 믿음이 아들을 살리는 절대요소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믿음없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됩 求裏 그래서 곧 이어 간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주님,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 '믿어야 하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의 믿음 없음을 주님이 좀 도와주소서.' 이 고백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정말 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라는 베드로의 고백보다도 더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자신의 신앙이 신앙이 아니며 누군가가 믿음없는 자 綬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참된 신앙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한번은 친구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실물보다 조금 더 힘차 보이고 커 보였습니다. 그 그림을 본 비 보떳E㈃잔머리를 흔들면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저렇게 보이나 아니야, 저것은 내가 아니야.' 그리고는 돌아서서 반대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게 바로 나야!.' 그 그림은 바다 위를 걸으며 주님을 향해 가던 베드로 파도를 보고나서 바다 밑으로 빠져드는 당혹스런 얼굴의 그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그 모습은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일 때 다른 것을 주시하다가 실패하는 인생들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거대한 물결이 덮칠 때 믿음은 달아나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밀려오는 세파 속에 정작 가장 중요한 믿음은 잃어버린 채 십 수년을 허둥대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아이 아버지의 '믿음 없는 자기를 도와달라'는 청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하고 주님의 수고에만 맡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최선을 다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믿음을 갖고 믿음의 행동을 할 터이니 주님께서 자 탔肝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즉 이 문제 해결의 주체는 자신이고 주님은 보조자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언급하시면서 그분은 '보혜사(保惠師)'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보혜사'란 우리말로 풀면 '도와주시는 은혜의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믿음의 주체로 세워주시는 보조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 텝위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대상은 결국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저 껍데기로 여기시고 모든 일을 다 당신께서 알아서 해결해놓는 그런 방식으로 인간사를 풀어나가시는 분이 아님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책임적인 주체입니다. 그게 바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저 해 은 밥상에 얹어진 반찬을 먹고 지내면 그만인 그런 꼭두각시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은 아팠지만 믿음은 손놓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랜 세월, 오늘의 이 순간까지도 아이의 나음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마음속 깊이 믿음을 가지고 그 능력에 기대어 아이의 고통을 해결 曼막졀煮잔시도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세월 동안 아이는 아버지의 믿음의 결단이 없어 그토록 오랜 고생을 해온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주님께 도움을 청하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풀 문제를 다른 방법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논쟁도 적절한 방법이 아니고, 남을 기대는 것도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퓨潁 찾아가거나 신통한 자를 찾아간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공교한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갈 때 풀릴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무엇인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이 아이를 고치신 후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러자 주 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믿음이란 그런 겁니다. 믿음은 삶의 악세사리도 아니고 추상적인 관념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것화 하는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깊은 고난을 겪고 있다 해도 지금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하면 누구도 손쓰지 못했던 사태가 몰라보리만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즉 문제의 뿌리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한을 만들어 내는 환경적 요인에 우리가 무기력하게 굴복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그러한 환경적 요인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능력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바로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는 거기에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풀어야할 문제가 있습니까 삶의 고민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서 우리 생은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풀고, 믿음으로 이웃의 문제를 풀어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아름다운 대화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꼭 풀려지고 해결되어야할 삶의 문제들을 믿음으로 풀어가 지혜로운 우리 영락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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