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막3:31-35)
본문
하나님의 뜻이란 크리스챤들의 특수한 용어입니다. 기쁜 일, 행복한 일, 성공적인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 이러한 축복을 해 주셨다고 감사하는가 하면 또한 반대로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참고 견디고 어떤 소망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뜻을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게 될 때 책임 의뢰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입학시험에 낙제한 아들을 위로하는 인사가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여기에 대답이 “하나님의 뜻이니 별수 있나요”라고 했습니다. 낙제가 아들의 부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다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만나서 입원 중인 환자를 위로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지요 한다면 이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팔자인가 보지요 함과, 운명이지요 하는 말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 중대한 신앙적 의의를 상실하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의의를 찾아서 이 말을 바로 써야겠습니다. 우리가 객지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찾아오신다면 모든 일을 그만두고 역전에 나가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가 먼 곳에서 예수를 만나러 왔을 때 예수의 대답은 “누가 내 어머니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다 내 어머니요 동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동양인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구절에서 효도의 관념을 찾는다면 유교 학자들이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 제사 없는 종교라고 비난한 바와 같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문제의 본문은 효도에 관한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효도라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지상의 효도보다 영혼의 아버지를 섬기는 천상의 효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비록 인간 윤리의 효는 말하지 않지만 인간의 영적 효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를 등한히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한 사람이요 또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그 홀로 남아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이 염려스러워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육신의 효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육신의 효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 효도에 대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이며 그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건이 우리 인간의 뜻대로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제일로 하고 인간의 뜻을 다음으로 한다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의지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기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무슨 일을 하도록 한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 자신의 의지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기보다 인간의 하나님의 뜻대로 무슨 일을 하도록 한다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위치를 질서 있게 지키는 생활입니다. 마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란 결코 푸른 창공에 있는 왕궁이 아닙니다. 물 밑에 용궁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한국적인 신화의 표현이라면 천국, 천당이란 말은 성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길,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런 장애가 없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힘이나 재간,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완전히 생각되는 곳입니다. 이런 마음과 상태가 곧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며 이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자격은 주여, 주여 하고 형식적인 종교생활이나 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 신앙의 형식보다 그 생활이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종교적 형식과 윤리적 생활과의 조화에 대하여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손에는 형제를 죽인 피가 있으면서도 그 손으로 소나 양이나 물질로써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인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수양의 기름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에서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시기를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1) 십자가의 고통을 되도록이면 피해보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소원대로 될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의지의 대결은 심각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옛날 신화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신이 무서웠습니다. 그의 벌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신의 공포와 그 전제적인 독단에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의 의지라 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취미, 자기 시간, 자기의 자랑, 자기의 소유를 하나님이나 종교나 신앙의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것까지도 원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여유 있을 때, 대접 받을 때, 평안할 때, 남에게 자랑스러울 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 아래 신앙적 종교적 강요를 원치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어느 하나를 취할 때 남에게 굴욕당하기 싫은 내가 있어 내 뜻을 세웁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뜻을 내세우므로 만족이 될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배반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실패를 봅니다. 내게 손해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괴롬과 희생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요한 1서 2장 17절에 보면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개념입니다. 영원을 영원하지 못한 것과 대결시켰습니다. 이 세상,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가진 욕심들, 육체의 욕심, 물질의 욕심, 자기 위주의 정신적인 욕심, 생에 대한 기본적인 욕심 등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허무를 노래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 40:6)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에는 영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1서 기자는 영원에 대한 자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정육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간다고 했습니다. 영원은 사람의 인격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인간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입술ㄹ만 주여 주여 하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있어서 선한 생활로 올바른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활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만족과 자유와 자랑으로 느껴 사는 사람입니다.
(4) 자기의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쁘게 기꺼이 바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1) 십자가의 고통을 되도록이면 피해보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소원대로 될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의지의 대결은 심각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옛날 신화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신이 무서웠습니다. 그의 벌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신의 공포와 그 전제적인 독단에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의 의지라 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취미, 자기 시간, 자기의 자랑, 자기의 소유를 하나님이나 종교나 신앙의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것까지도 원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여유 있을 때, 대접 받을 때, 평안할 때, 남에게 자랑스러울 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뜻이란 이름 아래 신앙적 종교적 강요를 원치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어느 하나를 취할 때 남에게 굴욕당하기 싫은 내가 있어 내 뜻을 세웁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뜻을 내세우므로 만족이 될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배반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실패를 봅니다. 내게 손해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괴롬과 희생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요한 1서 2장 17절에 보면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새로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개념입니다. 영원을 영원하지 못한 것과 대결시켰습니다. 이 세상,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가진 욕심들, 육체의 욕심, 물질의 욕심, 자기 위주의 정신적인 욕심, 생에 대한 기본적인 욕심 등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허무를 노래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 40:6)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에는 영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1서 기자는 영원에 대한 자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정육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간다고 했습니다. 영원은 사람의 인격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인간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입술ㄹ만 주여 주여 하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있어서 선한 생활로 올바른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활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만족과 자유와 자랑으로 느껴 사는 사람입니다.
(4) 자기의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쁘게 기꺼이 바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