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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은혜 넘치는 기쁨 (고후8:1-11)

본문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 아가야(그리스 남부)지방의 수도로 동서 무역의 요충지 였습니다. 그곳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부요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거쳐 지나는 곳으로 문명이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비너스(Venus)라는 귀신을 숭배하는 본거지로 특히 음란했던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귀신의 숭배를 미끼로 신전에서는 공공연히 음란 행위가 벌어졌고 또한 이 도시는 매춘이 활발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고린도 지역의 외곽지역에 우뚝 선 작은 돌산이 있느데 이 산을 ‘아크로 고린도 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 산에는 큰 신전이 있었고 1,000명의 여사제가 있었다고 합이다. 이 신전의 여사제들이 곧 신전 창녀였던 것 입니다. 그들은 이 신전에 있는 여사제와 음행을 하면서 이것이 신과 접촉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들은 ‘고린도인 처럼 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최근 이 아크로 고린도 산 밑에 거대한 고린도 유적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지진에 의해 4-8m의 지하에 묻혔던 고대 고린도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음란한 형상의 물체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크로 고린도 산의 신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음란의 도시가 형성 되었었고 여호와 하나님은 무려 21차례 크고 작은 지진으로 이 도시를 심판하신 것 입니다. 그렇게 죄악이 팽배한 도시 고린도를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바울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 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후 50년경에 제2차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반대와 배척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머문 1년반 동안 많은 회심자를 얻게 하셨고, 또한 회당장 그리스보까지 회심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하셨던 것 입니다.(행 18:8). 그때 그들과 함께 세운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없는 사이 고린도 교회 안에는 세상적인 지혜와 도시의 악한 관습이 들어오고 또한 그것에 유혹되어 심한 시련과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면서 음행과 온갖 죄를 용납하고 타락해 가는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랄하게 책망하는 내용을 서신으로 보냈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 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받아든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은 냉담 했습니다. 바울이 직접 고린도를 찾아가 책망도 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고후 2:1,
5).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동역자 디도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 마게도냐에서 만난 디도는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악행을 회개하였고 바울을 사모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의 정체도 밝혀졌습니다. 특히 거짓 교사들은 ‘사도의 자격도 없는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다는 구실로 헌금을 거두어 착복하려고 한다’고 모함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또한 편의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가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고린도 후서입니다. 사실 목사가 가장 바르게 가르쳐야할 것이면서도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부분이 헌금생활 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더 풍성한 수확으로 되돌아오지만(9:6) 이 성경적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가까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연보의 바른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기 원하시는 분은 집에 돌아가셔서 8장과 9장을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넘치는 은혜가 가져올 넘치는 기쁨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한다.
1. 마게도냐의 은혜를 우리도 성취하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8:1).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8:1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 라고 했고, 8:4을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6에도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행위자체를 은혜로 해석한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감사행위이기 때문 입니다. 은혜는 순수한 것입니다. 은혜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는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넘칠 뿐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한다면 드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드릴 수 있고,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만 금을 가지고 있어도 죽어버리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고 또 드릴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면 드릴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은 은혜인 것 입니다. 건강한 것, 드릴 수 있게 된 것, 드릴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들은 어떻게 은혜를 성취했는가
첫째,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당시 마게도냐 교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에게 많은 천연자원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심한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 거의 죽게 되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 내동댕이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환난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위축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둘째,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오늘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까닭에 극한 가난까지 이르렀지만 남에게 도움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은 부자가 봉사를 많이 하고, 연보를 많이 드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 믿음의 부자가 봉사 합니다. 재산이 아무리 많은 부자라 해도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위해 한 푼도 쓰지 못합니다. 홍콩에 거지가 한명 있었는데 그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가 깔고앉은 가마니 밑에 엄청난 달러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실로 엄청난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거지라 불렀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나누어지지 않는 부는 부가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의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부자였으나 그는 실로 가난뱅이로 살다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로부터 이미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혹시 우리의 이 모든 풍성함과 아름다움과 부요함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홍콩거지가 따로 없습니다. 그가 홍콩거지 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을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재산은 많았지만 믿음은 가난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이 돈 많은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 부자 집으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부자였기에 마지막 식량까지 선지자에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게도냐 교회가 모범을 보인 것처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풍성히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강요를 하거나, 떠밀리듯 분위기에 편승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은혜 받은 결과 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한국 교육계의 태두이자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전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본래 시골에서 논 다섯 마지기를 가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백 박사의 아버지는 일찍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생활과 행동이 진실한 신자로서 교회의 일에 충성하는 모범적인 일군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 박사의 아버지도 교회 건축 헌금을 원했는데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 아버지는 가정의 생활의 터전이며 보루인 논 다섯마지기를 모두 하나님께 바치자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드린다고 생각한 그는 구차한 미련없이 논 다섯마지기를 모두 팔아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 뒤 백 박사의 가정 형편은 어려워지고 굶기를 밥먹듯이 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교회에서 백 박사 가정에 대하여 미국인 선교사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 박사 아버지는 교회의 사찰로 일을 하게 되어 생활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백 박사 아버지가 사찰로 시무하는 동안 워낙 영리했던 백낙준은 미국인 선교사와 친해지고 사랑을 받아 외국 유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백 박사는 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백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의 교육계에 끼친 영향과 공헌은 재론할 여지도 없을 만큼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 같이 가난한 중에도 자기의 전 소유를 드린 백 박사 아버지의 신앙이 백 박사를 낳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우리는 이방인들과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방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생을 걱정해야 되기 때문에 ‘염려’가 삶의 한 방편이지민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다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2.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성취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 생활의 모범 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생활해 오셨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분의 삶을 본받는 것이 곧 은혜를 성취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부요 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나님의 나라에 계실 때는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때는 가장 가난한 모습이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누우실 곳도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허기진 나머지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입니다. 이것은 오직 가난하고 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난은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벳세다 광야에 모인 5,000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예수님은 그 후에도 4,000명의 남자들에게 흡족하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궁핍함이 없게 하실 것을 보여주신 예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더 부자가 되려고 애쓴다면 주님은 우리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실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가난해 지고자 할 때, 주님은 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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