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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청년 (행20:7-12)

본문

사도 바울이 드로아란 곳에서 일주일동안 머물며 부흥회를 했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 성만찬을 하고 부흥회를 마쳤는데 그 다음날 강사인 바울이 떠나게 되어 있어 그날밤 드로아교회 교인들은 밤이 늦도록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중에는 유디코란 청년이 어른들과 섞여서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가 젊은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리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해 창문에 걸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청년이 사고를 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지루하게 이어지니까 졸다가 그만 창문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 보니까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바울이 설교를 중단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떨어진 청년을 부등켜 안고 기도를 한 결과 청년을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다시 살아나고, 그 때문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제가 청년 때 이 설교를 들으면서 주로 들은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설교를 할 때 졸지 말고 잘 들어야지 졸면 유디코처럼 떨어져 죽는다. 졸면서 설교를 들으면 천국에 못간다는 위협적인 내용으로 주로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해설을 붙여놓은 어느 성경에 중요 인물란에도 유디코란 청년을 소개하는데 그렇게 소개해 놓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앉아 열심히 경청하지 않고 창문에 걸터앉아 듣다가 졸았던 것은 유두고의 잘못으로 오늘날 말씀을 듣는 바른 자세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이 성경말씀은 이런 식으로 청년들의 버릇없는 자세를 나무라는 교훈적 설교에 늘 인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교회가 청년에 대해서 대하는 태도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눈여겨 살펴볼 수 있는 점은 바울이 설교하는데 대부분 어른들이 와 있는데 거기에 유디코란 청년이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서양교회와 가장 크게 다르고 희망적인 모습중에 하나가 청년들이 교회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연세많으신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 됩니다만 서양교회에 가면 노인들만 한 30명 있을 뿐 청년들이라고는 안보이는데 여기에 서양교회의 비극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놀러갈 때도 많고 다른 재미있는 곳도 많을 것인데 또 교회가 다소 청년들에겐 따분할 것인데도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려는 그 자세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귀감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청년이 바울의 설교하는 현장에, 교회안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 칭찬을 하기는 커녕 조는 것만 가지고 청년을 질타하고 꾸중하는데 교회의 인색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청년들이란 원래 좀 궤도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하는 게 청년이고 젊은이들의 특성인데 그들을 너무 어른들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제한하려는데 교회의 인색함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청년들에게 칭찬에는 인색하고 꾸중에는 열심인 모습입니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교회공동체안에 있다는 것 자체로서 우리는 격려하고 고무하는 일을 꾸중하는 일보다는 더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 보면 어디든지 꾸중의 대상이지 격려의 대상이 아니어 왔습니다. 학교에서도 꾸중, 사회에서도 꾸중, 직장에서도 꾸중, 꾸중이 그들의 양식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우리 한국사회는 청년들에게 인색해 온 것을 우리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좀더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믿어주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청년들의 입장에서 이 본문을 새롭게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졸면서 설교를 듣는 태만한 태도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청년이 졸다가 떨어진 사건을 둘러싸고 교회는 청년에게 어떻게 대해 왔으며 청년이 교회안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째로 교회에 청년의 설 자리가 충분히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오늘 문제의 발단은 유디코란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졸음이 와서 발생을 했습니다. 청년이 창문에 앉았다는 것에서 청년들이란게 창문같은데 걸터앉는 것을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자리가 엄연히 있는데 거기에 앉겠습니까 바울 사도의 근처 모든 좋은 자리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차지했을 것이고 어른들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저는 유디코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는데서 오늘 교회가 청년들에게 자리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연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교회에는 청년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제가 90년 11월에 바젤의 한 회의에 참여했는데 그 때 바젤 칸톤 교회 총회장이 오늘의 교회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늘 저는 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그 총회장이 그 이튿날 바젤교회 임시총회를 하는데 의제가 교회문을 반을 닫아야 하느냐, 재정이 들어도 열어놓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야기 한 것은 10년전에 바젤교회가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전통이 중요하니까 전통을 지킬 것인가 하는 논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교회의 전통이 더 중요하니까 전통을 지키는 방향으로 결정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한 세대, 즉 25세-35세의 젊은이들을 교회는 잃게 되었다고 그 총회장이 말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두고 두고 음미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80년대 한국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을 때 정부에서는 학생들이 좌경화한다고 선전해 댈 때 교회도 청년들, 솔직히 말씀드리면 똑똑한 청년들은 다 데모에 참여한 청년들인데 그 청년들을 교회에서 몰아내 버렸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보면서 늘 저는 1920년대를 회상합니다.
그때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민족독립에 고심하고 있던 때이라 많은 청년들이 두 가지 사상이 민족독립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는 당시에 한창 소개되던 사회주의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실망스런 면이 있긴 하지만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청년들이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교회안에서 복음과 일치하여 민족독립에 기여할 생각을 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순수복음을 주장하는 교회어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청년들을 다 쫓아내어서 쫓겨난 청년들이 공산당으로 가버렸습니다. 저는 이 역사적 사실을 두고 항상 한국공산당의 생성에는 보수적인 교회가 일정 기여를 하엿다고 늘 이야기하곤 합니다. 80년대에도 교회는 진보적인 청년들을 교회에서 수용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과격한 진보사상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유디코가 졸다가 창문에서 떨어졌는데 조는 것은 청년의 특징입니다. 노인들이나 잠이 없지 청년들이란 자도 자도 모자라는 게 잠입니다. 우리는 가끔 어른들의 기준에서 젊은이들을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중 고등학생들은 신체적으로 몸에 비해 팔다리가 유난히 깁니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는데 유난히 팔이나 다리때문에 물건을 쓰러뜨린다거나 엎지른다거나 받친다거나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좀 조심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는데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팔다리가 그 나이에는 비정상적이리만큼 길게 자라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이 특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디코의 존 사건이 문제가 되었는데 청년들의 조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조는 것은 작은 실수인데 우리는 청년들의 실수에 대해 관대해야 합니다.
유디코가 존 것은 그가 그 신앙공동체안에 들어있었다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실수입니까
그런데 청년들이 교회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한 일인데 작은 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작은 실수를 들어 교회에서 청년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실수들, 현실을 모르는 이상적인 소리들, 때로는 과격한 주장들, 모두 창조적인 청년의 기상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유디코가 존 것은 바울의 설교가 지루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청년이 설교시간에 조는 것, 그것은 당연하였는지 모릅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어지니까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깊이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설교란 것이 사실 지루한 것입니다. 저도 이제까지 그래왔습니다만 설교란 것이 늘 어른들 위주입니다. 기성세대위주고 권위주의적인 말씀 일변도입니다.
교훈일변도입니다.
청년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 청년들이 의문을 갖고 있는 것, 현실를 좇아 타협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어도 어른들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소리를 발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주장은 늘 철없는 것으로, 아직 세상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로 밀어제쳐졌습니다.
저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설교와 교회의 이야기들에는 청년들의 고민과 관심도 분명히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세번째 힌트는 교회가 청년들에게 자리를 주지 않는 반면 사도바울은 청년 유디고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는 청년이 떨어지자 바울이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와 청년을 부등켜 안고 살려주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설교의 권위를 생각하기 전에, 청년이 설교시간에 졸다가 떨어지는 실수를 생각하기 전에 설교를 중단하고 뛰어내려와 청년을 부등켜 안고 그를 살려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년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청년들의 마음을 바로 새우게 하고 뜨겁게 하는 방법이고 청년들로 하여금 어른들과 신앙공동체에 함께 머물게 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조는 것을 야단칠 일이 아니라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와 청년을 부등켜 안고 살려주는데서 교회가 해야 하고 청년들의 탈선이나 고뇌를 철없는 일이라고 탓하기 전에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 안고 씨름하며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서 교회의 청년에 대한 애정이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것을 통해서 청년은 고무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본문 마지막에 보면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며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른들과 청년이 한 신앙공동체안에서 화목하게 어울어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차원에서 보면 중요한 3 가지 의미가 이 이야기속에 있습니다.
첫째는 비록 교회가 청년들의 관심에 비추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기는 하더라고 교회공동체에 발을 담그고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좋은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 창문에 걸터앉는 자리일찌라도 그 자리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청년은 기성세대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 심은 나무가 햇빛을 받지 못하고 물을 적절하게 흡수하지 못하면 죽어가듯이 청년들이 기성세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적절하게 인생의 교훈인 말씀과 신앙을 배우지 못하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워내기가 어렵습니다.
성서의 마지막 본문,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 했는데 여기에서 청년과 기성세대가 신앙안에서 어울어지는 것이 청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이 아무리 독특하다 하더라도 기성세대와 어울어지지 않고 독보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기성세대와 대립만 하여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성세대는 관대함으로,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사랑과 교훈속에서 어울어져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동기가 되면 그 이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없겠습니다.
우리 부산진교회는 청년들에게 마음껏 꿈을 발휘할 수 있는 확고한 자리를 주고 청년들은 자기들만이 아닌 기성세대의 사랑과 교훈의 품속에 안김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전통을 앞으로 세울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하시기를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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