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가장 은혜스러운 성회 (느8:1-12)

본문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개신교는 모든 신앙의식에 있어서 말씀이 중심부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헌금을 드린다거나 찬송을 드린다거나 성가대의 찬양이라든가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순서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 설교 시간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혼연 일체가 되어서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주일날 성가와 기도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마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을 떠난 은혜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의 신앙상태를 보기 위해서는 그 교회 교인들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육체가 건강한 사람이 음식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즐기는 것처럼 영적상태가 좋은 성도나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무척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수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70년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마감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파사 제국이 바벨론을 치고난 다음에 포로로 잡혔던 백성이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전 재건입니다.
이 땅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불원간에 이 땅에 통일을 허락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제일먼저 북한 땅에 올라가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혹자는 우스개 소리로 말하기를 만일 이 땅에 통일이 된다면 땅투기꾼들과 부동산 업자들이 쏜살 같이 달려가지 않겠냐고 추측들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재건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는 것은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보다 더욱소중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의 변화, 심령의 변화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이들이 죄와 교만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성전의 재건과 부흥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말씀을 통하여 그들 내적 성전인 심령의 부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제사장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들려 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말씀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니 일제히 일어서서 그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약6시간동안))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저들에게 놀라운 영적 각성이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도들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부흥강사들은 재미있는 예화나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성도들은 금방 거부의 반응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제사장 에스라가 6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율법을 봉독하는데 모든 사람이 기립한 상태에서 요동함이 없이 말씀을 듣습니다.
에스라가 오늘날의 부흥강사처럼 드라마틱한 간증이나 성도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만담을 한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서 말씀을 청종하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우리는 성회로 모입니다. 주일마다 은혜스러운 성회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은혜를 받으려면 말씀에 굶주려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받는 첫 걸음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굶주린 심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전쟁과 지진, 기근"을 언급하였습니다(마24장).
실제로, 전세계에는 무수한 전쟁과 지진이 지구인들의 가슴을 놀라게 하고 있으며 하루 3만 5천여명, 연간
1,30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사람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기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말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말씀에 대해서 사모함이 없는 인생들을 향해서 탄식하는 아모스 선지자, 아니 하나님의 아픔이며 안타까움입니다.
양식의 기근은 육체적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기근은 육체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데 육체의 양식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가지면서도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시편 107편 1절에 보면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2:2)
다윗은 시편19:1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펼 때에 모든 청중들이 일체히 일어섰습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 순서에 따라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귀찮은 생각이나 짜증이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난 것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에스라를 통해 율법이 낭독될 때, 강단을 중심으로 백성의 지도자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으며 백성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장장 6시간 동안이나 일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존경심과 외경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록 펠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록 펠러에게 일생동안 살아야 할 신앙의 지침을 남기면서 지켜달라고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드려라! 예배드릴 때 자리는 꼭 앞자리에 앉아라! 설교 말씀은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라!"
이것이 그 가정에 가훈과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놀라운 복을 받고 뉴욕 시민들의 모든 수도세를 그들이 부담해주고 있습니다.
3. 말씀을 들을 때 서서 아멘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아멘"이란, 지하다, 신뢰하다, 진실로라는 말입니다. 이는 대개 기도나 찬양, 또는 말씀의 선포에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동의와 믿음에 대한 표현이며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는 소원을 말합니다.
왜 우리들의 입에서 아멘이 잘 안나옵니까 심령상태가 건강하지 않으면 천국 언어인 "아멘"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아멘이 있는 심령이 건강한 심령입니다. 아멘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건물이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웅장한 파이프 올겐이 있는 교회보다는 주일 날 믿음의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진동할 때 파이프 올겐 소리보다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할 줄로 믿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호흡을 하며 말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말씀이 선포될 때 자동적으로 내 속에서 아멘이 나온다는 것은 그 심령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그 딱딱한 율법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아멘, 아멘"했습니다.
1) 통회자복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와 열조의 허물과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았습니다.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설교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와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합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거울에 자기의 심령을 비추어 더러운 죄인임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할 때 청중들이 우리가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가슴을 쳤습니다(행2:37).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예리한 수술칼이 되어 우리의 혼과 골수와 심령을 쪼갤때에 통회가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자복하는 심령이 됩니다(히4:12).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다 울었습니다.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2) 기뻐하고 즐거워 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십자가의 사유의 은총이 옵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이 솟아납니다.
신앙은 이런 순서입니다. 먼저 깨닫게 됩니다. 죄용서에 대한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유의 축복을 통해서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만약에 자기 죄를 깨닫기만 하고 사유의 기쁨과 축복이 없으면 불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라"(롬7:24-25)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먹보다 더 검은 나의 죄를 주의 보혈로 씻겨 주셨도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찬송가 313장)
죄 때문에 통회하고 가슴치다가도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기쁨이 옵니다. 기독교는 올 때와 갈 때가 다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왔다가 그 짐을 주님께 맡기고 돌아갑니다. 죄짐을 짊어지고 와서 주님 앞에 내놓고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문을 나서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난 다음에 회개하고 통회하고 용서함 받고 마음에 기쁨과 소망이 넘쳐서 찬송과 기쁨을 가지고 세상으로 진격해 나가야 합니다.
3) 충성과 봉사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서로 나눠주고 기뻐하며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취했습니다. 유월절을 준비키 위해 모든 백성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예배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용서해 주심을 믿고 기쁨으로 돌아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죄인이었는데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용서해 주셨구나 주님 때문에 살았구나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오리까"하고 거룩한 고민을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첫 번째, 두 번째는 잘 됩니다. 통회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잘합니다. 한국 사람은 정적인 요소가 많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가 안됩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설교 듣고 은혜를 받아도 실제로 하려면 안됩니다.
받은 은혜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받은 은혜가 충성과 봉사로표현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매주일 마다 거룩한 성회가 되고 은혜스러운 성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03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