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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 (눅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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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누구냐"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은 그분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규명해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과연 그 분은 누구실까요 그분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의 진리며 새로운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분이 이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들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엄청나고 위대한 일을 하셨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을 하셨고 결국에는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그분, 역사의 AD와 BC를 정확하게 갈라 놓으시고 인생들에게 새 삶을 주신 그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시간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눈물을 멈추게 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은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에 하늘나라에 가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눈물은 고통과 죽음과 슬픔과 불행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의 눈물이 그칠 때는 하늘나라에 가서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에는 고통과 모든 눈물을 흘리는 슬픔의 요소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에서 우리는 인생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과부의 슬픔을 상상해 봅시다. 남편과 사별하고서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던 독자마저 잃었기에 하늘이 무너지는 큰 아픔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부모를 잃은 자녀나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보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슬픔이 더욱 크다는 것을 목회를 통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장사 지내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장사 지낸다남편이 죽으면 뒷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앞산에다 묻는다"고 말했겠지요.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스런 아들을 관속에 넣고 그 뒤를 따르는 여인의 비애와 눈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인은 이 상황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한탄스럽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례행렬이 예수님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은 여인을 보고 울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상가에 가서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많이 합니다만 모두가 인사치례가 될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인사치례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때에 주님이 여인에게 "여인이여 참 안됐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무상한 것, 할 수 있겠습니까 울어야 소용없으니 이제 잊어버리세요"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 "청년아! 일어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이 현장을 보십시오. 그 과부의 기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우는 자에게 울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앞에 나올 때에 무슨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까 오늘 이시간 주님으로부터 "울지말라"는 위로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슬픈 사연이 있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과부의 슬픔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에게 울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과부의 눈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울지 말라고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5:4)고 울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울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도성에 가증한 일로 울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통회하며 애통하라고 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오르는 주님을 따르는 백성과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울 때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7-29)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울어야 할 일에는 눈물 한방울도 안흘리면서 조금만 억울해도 울고 일이 안된다고 괴롭다고 웁니다. 억울하고 손해보아서 애통해 우는 눈물은 가치가 없습니다.
죄때문이라면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그쳐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나인성도상(道上)의 죽은 청년을 관에 담고가는 죽음의 행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시체앞에 당당히 서 계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체앞에 서신 주님은 그 관에다 손을 대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이것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인류역사에 일찌기 이러한 역사가 있지 못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사망을 고삐를 쥐듯이, 꽈-악 움켜잡고 죽음의 행진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사망의 행진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망권세, 어둠의 권세, 멸망의 행진을 이제 주님이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정지됩니다. 이제 인류를 꼼짝 못하게 했던 그 위력을 떨치던 사망권세가 예수님에 의해서 그 기나긴 행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사망의 행진앞에 가서 "죽은 자여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모시면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앞에 나오지 못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 입니다. 불쌍한 자입니다.
우리의 삶은 분명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날 나인성도상에 이 장례 행렬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든지 그냥 비켜 가 버렸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그 행렬은 슬픔의 행렬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슬픔의 행렬이 주님앞에 나오니 축제의 행렬로 바뀌어 졌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과 마주쳐야 합니다. 비켜가서는 안됩니다. 마주쳐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얼마나 피곤하여 지쳐있었던 가요
그렇다면 주님앞에 나오십시오. 주님은 우리들의 행진을 축제의 행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날 나인성 부근 길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망의 무리들과 생명의 무리들이 서로 마주 섰습니다. 이제 그들은 공동 묘지로 가던 발길을 다시 돌려 주님과 더불어 나인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공동묘지로 가던 장례 행렬이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축제의 행렬로 바뀌였습니다. 장례식이 결혼식장과 같이 되었습니다. "나인"성이란 것이 원래 "사랑스러운"이라는 의미인데, 슬픔의 도성이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말그대로 "사랑스러운" 도성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도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인간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 조차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이 허락하사 축복으로 해결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그 어머니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큰 권력을 가지고도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사람들이 물질만능이라고 하지만 돈 가지고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인아! 울지말라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주고 네 문제를 대신 져 주겠노라. 나를 믿고 이제는 울음을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앞에 가면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앞에 가면 해결안되는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명 병든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 "나인성"의 모습입니다. 나인성의 도상(道上)처럼 통곡의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의 통곡소리를 아무도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고치시고 살리시고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일어서는 종교입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듣고 모두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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