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의 샘이 터져 홍수가 되다 (창6:1-12)
본문
1.축복을 빼앗긴 인간
얼마전 한 전직 검사가 법조계의 비리를 고발한 책을 쓴적이 있습니다. 한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이 글의 제목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 입니다.
아마 모르긴해도 잘나가는사람들의 무절제한 행태를 고발하겠다는 것이겟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저자 자신도 부산광안리의 모 카페에서 심야에 술을 마시다가 TV카메라에 얼굴이 잡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로 검사와 카메라기자의 길고 긴 전쟁이 시작 되었고 결국 책으로까지 자신들을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출판된 것입니다. 세상에 이유없는 무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데 제목 하나만은 잘 잡은것 같습니다. 좋은 차의 기준읁 아무래도 균형잡힌 가운데 잘 달리는 차이냐 아니냐 일 것입니다. 벤츠는 균형에 있어서는 잘달리는 차에 있어서나 타의 추종을 불허 합니다. 적어도 시속 240 키로미터는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달리는 벤츠에 티코에 장착하는 브레이크를 달았다고 합시다. 장애물이 나타나서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할때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이 땅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망하는 이유가 있다면 단 한가지 뿐 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너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잘 나간다는 것이지요. 잘나가는 것 만큼 잘 멈출줄 알아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항상 스스로 넘쳐서 그만 돌아올 수 없는 자리에 까지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좋은차는 좋은 엔진과 함께 좋은 브레이크도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똑똑 할수록 우리 인생을 콘트롤 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지도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제 1편은 이렇게 노래로 가르쳐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사람이 망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귀가 가리워서 잘듣지 못하고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하며 아예 듣는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은 내 인생의 브레이크를 달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내마음의 선한대로 생각하고 행동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 입니다.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18은 기록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축복은 막무가내로 받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의 길로 갈때 막아주는 것 또 패망의 길로 갈때 비켜가게 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속에 이 놀라운 인도하심의 축복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원 합니다.
2.멸망과 실패의 원인
인간이 가장 지혜로운 피조물로 이 땅에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돼지보다도 만족이 없고 개 보다도 보람이 없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우리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 교만함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가
첫째, 자기의 마음에 선한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브레이크 없는 벤츠인 것입니다. 사람이 오로지 자기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로 다고 합시다. 그러면 약육강식의 법칙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강한자만이 살아남고 약한자, 노인 그리고 지체부자유자들은 도저히 살아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수의 세계요 육축의 세계일 쁜이지 더 이상 사람사는 세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의 뜻은 오로지 육체의 쾌락만을 쫒아 살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선택 기준이 진리나 문학이나 이상이나 따위의 고상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편한가, 짜릿함이 있는가 이것이 선택의 기준이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쾌락때문에 자유를 외침니다.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를 외칩니다. 이 자유의 끝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동성연애입니다. 자유연애의 차원을 뛰어 넘어서 동성연애까지도 개인의 자유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부들중에도 동성연애자가 있다니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많은 동성연애자들을 가진 나라입니다. 동성연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이즈라는 천하에 몹쓸병이 생기었다는 것입니다. 이 병이 왜 무섭습니까 그 것은 우리몸의 모든 면역 기능을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서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용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짖궂은 사람이 이번에는 어떤 백신프로그램이라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컴퓨터는 일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에이즈가 이런 병입니다. 에이즈자체가 특정한 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되어있는 하체 프로그램을 폭파시키는 아주 이상하고도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의 대장속에서 만들어 지는 데 이것이 동성연애자들에게서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6-27을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렸으니 곧 저희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여기서 보면 순리라는 말과 역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순리는 영어로 natural relations 입니다. 역리는 unnatural relations 입니다. 결국 순리란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리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하고 바꾸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자연을 거스리면 그 보응을 인간은 받습니다. 그것이 에이즈 입니다. 엉터리 프로그램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 파괴도 그렇고 환경 오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는 인간세상을 그대로 보고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시대를 심판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킬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 사람의 씨앗조차 아니 남을까 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 세상사람 모두가 멸망을 받는다면 사탄이 얼마나 날뛰고 기고만장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보호하시고 복음으로 온 땅을 구원하시기위해 다수의 사람을 심판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악할 뿐임을 보시고” 만 것입니다(5절).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망적인 선포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만드는 첩경이었습니다. 자유로 말하면이야 하나님만큼이나 자유가 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사릴 권세도 있으며 인간이야 제멋대로 살던말던 자기들의 잘못으로 죄에 빠져 죽든말든 그 책임을 몽땅 인간에게 지우고 내 몰라라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반역에 대하여 몸살을 앓으면서까지 안스러워하고 책망하시고 의사로서 고치시고 급기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리에 복종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목숨하나 구원하고 죽은 벌레하나 살릴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그 조그마한 자유를 자유랍시고 얼마나 방탕하며 얼마나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까 마치 하룻살이가 불어가는 인간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이 자유의지를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그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은 마음껏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얻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고, 포기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때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이 영적인 진리를 꺠달아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갈 것 아니라 의와 화평을 쫓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순종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결론적으로
중국 고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나뭇꾼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아침부터 밤늦도록 한번도 쉬지않고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나뭇꾼은 열심히 하는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나 한사람보다 나무를 많이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서 나무하는것을 멈추고 나무를 많이하는 그 사람을 훔쳐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무를 하다가 한참을 쉬는데 그 사이에 도끼를 숯돌에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디어딘 도끼로 하루종일 나무했던 사람보다 쉬면서 그 쉬는 시간에 도끼도 갈고 휴식도 취하여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평법한것 같지만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 앞에 사는 인간이 제힘으로 살아간다면 언제나 열심히해도 지치고 얻은것이 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고 에너지를 얻으며 말씀을 따라 인도함을 받으며 늦게 가는것 같고 천천히 하는것 같지만 결코 실패가 없는 성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모든것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마음먹은데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삼가하고 말씀을 따라 계획하고 하나님의 순리에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시판을 내리시기로 다시 마음을 조굳히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몇 사람을 심판하시므로 비뚤어져 가는 인류의 역사를 되 잡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니다. 모른채 할 수 있는 자유, 내 팽개칠 수 잇는 자유를 포기하시고 귀찮지만 다시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의 우리 조상들은 그 좋은 환경속에서도 반역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말해 인간의 타락은 환경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좋은 환경에도 만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 이르러서 인간은 또 하나의 좋은 환경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것은 하늘의 궁창이 터지는 것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강한 자외선을 막아 따뜻하고 퐁요로운 대기를 형성해 주던 하늘의 궁창이 그만 터져 진노의 샘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반역하고 범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면 축복이었던 샘도, 진노와 저주의 샘이 되어 우리에게 일순간에 쏟아부어져서 홍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려고 예비해 놓으셨던 진노가 도리어 바뀌어 축복의 샘이 되도록 합시다. 오히려 저주가 바뀌어서 축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이요, 축복생활이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노가 변하여 축복의 홍수가 되게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꼐서 노아를 향하여 베푸셨던 은혜를 보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야 합니다.
9절은 증거하기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동행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며 생각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교제하며 통신했다는 것입니다. 망망대해를 가는 한척의 난파선이 낮에는 태양의 위치를 보고 길을 잡고 밤에는 별을 보고 기준을 삼아 항해하듯이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진리를 알고 내세가 있음도 알아 바르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 망하는 길의 시작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 제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실패하고 패망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하면 이길 것입니다.
딤후3:16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6:33에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는 시류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100사람이며 100사람의 생각이 각기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또 내가 알고 있는 크리스챤도 그렇게 적당하게 사는데 나라고 무엇 별수가 이는가 그러니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며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스펄젼목사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란 결코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적당주의 혼합주의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풍속을 쫓아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대로 행하면 필경은 망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남을 짓밟더라도 나와 내 가족만은 노후를 보장 받아야 되겠다고 아우성을 친다합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뒤를 묵묵히 쫓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무소유의 자유’입니다. 샘은 특징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고 계속솟아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젖을 물리는 엄마의 유방은 아이가 빨기를 멈출 때까지 계속 나옵니다. 젖을 짜주지 않으면 묽어지고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사도들의 발앞에 다 갖다 놓았습니다. 결과 그들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6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철저하리만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요, 그것이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이나 사람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완벽해서 나서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며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두면 곧 훈수드는 사람이 붙고 급기야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야구보러 갔다가 난장판 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없는것은 없는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행위 때문에 구원하시지도 축복하시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먹을때도 있습니다. 매듭이 꼬이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말씀이 공급되는 사람은 늘 새로운 물이 솟아나서 씻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살수록 더욱 자주 씻어야만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삶이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내 자신의 열매로 나가지 맙시다. 호세아처럼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무화과 나무에 열매 없고 밭에 소출이 없어도 오직 하나니뫄 관계 맺는 것으로 즐거워하시는 삶 사시기 바랍니다.
얼마전 한 전직 검사가 법조계의 비리를 고발한 책을 쓴적이 있습니다. 한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이 글의 제목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 입니다.
아마 모르긴해도 잘나가는사람들의 무절제한 행태를 고발하겠다는 것이겟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저자 자신도 부산광안리의 모 카페에서 심야에 술을 마시다가 TV카메라에 얼굴이 잡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로 검사와 카메라기자의 길고 긴 전쟁이 시작 되었고 결국 책으로까지 자신들을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출판된 것입니다. 세상에 이유없는 무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데 제목 하나만은 잘 잡은것 같습니다. 좋은 차의 기준읁 아무래도 균형잡힌 가운데 잘 달리는 차이냐 아니냐 일 것입니다. 벤츠는 균형에 있어서는 잘달리는 차에 있어서나 타의 추종을 불허 합니다. 적어도 시속 240 키로미터는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달리는 벤츠에 티코에 장착하는 브레이크를 달았다고 합시다. 장애물이 나타나서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할때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이 땅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망하는 이유가 있다면 단 한가지 뿐 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너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잘 나간다는 것이지요. 잘나가는 것 만큼 잘 멈출줄 알아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항상 스스로 넘쳐서 그만 돌아올 수 없는 자리에 까지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좋은차는 좋은 엔진과 함께 좋은 브레이크도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똑똑 할수록 우리 인생을 콘트롤 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지도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제 1편은 이렇게 노래로 가르쳐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사람이 망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귀가 가리워서 잘듣지 못하고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하며 아예 듣는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은 내 인생의 브레이크를 달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내마음의 선한대로 생각하고 행동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 입니다.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18은 기록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축복은 막무가내로 받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의 길로 갈때 막아주는 것 또 패망의 길로 갈때 비켜가게 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속에 이 놀라운 인도하심의 축복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원 합니다.
2.멸망과 실패의 원인
인간이 가장 지혜로운 피조물로 이 땅에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돼지보다도 만족이 없고 개 보다도 보람이 없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우리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 교만함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가
첫째, 자기의 마음에 선한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브레이크 없는 벤츠인 것입니다. 사람이 오로지 자기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로 다고 합시다. 그러면 약육강식의 법칙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강한자만이 살아남고 약한자, 노인 그리고 지체부자유자들은 도저히 살아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수의 세계요 육축의 세계일 쁜이지 더 이상 사람사는 세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의 뜻은 오로지 육체의 쾌락만을 쫒아 살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선택 기준이 진리나 문학이나 이상이나 따위의 고상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편한가, 짜릿함이 있는가 이것이 선택의 기준이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쾌락때문에 자유를 외침니다.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를 외칩니다. 이 자유의 끝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동성연애입니다. 자유연애의 차원을 뛰어 넘어서 동성연애까지도 개인의 자유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부들중에도 동성연애자가 있다니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많은 동성연애자들을 가진 나라입니다. 동성연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이즈라는 천하에 몹쓸병이 생기었다는 것입니다. 이 병이 왜 무섭습니까 그 것은 우리몸의 모든 면역 기능을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서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용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짖궂은 사람이 이번에는 어떤 백신프로그램이라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컴퓨터는 일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에이즈가 이런 병입니다. 에이즈자체가 특정한 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되어있는 하체 프로그램을 폭파시키는 아주 이상하고도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의 대장속에서 만들어 지는 데 이것이 동성연애자들에게서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6-27을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렸으니 곧 저희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여기서 보면 순리라는 말과 역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순리는 영어로 natural relations 입니다. 역리는 unnatural relations 입니다. 결국 순리란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리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하고 바꾸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자연을 거스리면 그 보응을 인간은 받습니다. 그것이 에이즈 입니다. 엉터리 프로그램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 파괴도 그렇고 환경 오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는 인간세상을 그대로 보고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시대를 심판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킬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 사람의 씨앗조차 아니 남을까 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 세상사람 모두가 멸망을 받는다면 사탄이 얼마나 날뛰고 기고만장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보호하시고 복음으로 온 땅을 구원하시기위해 다수의 사람을 심판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악할 뿐임을 보시고” 만 것입니다(5절).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망적인 선포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만드는 첩경이었습니다. 자유로 말하면이야 하나님만큼이나 자유가 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사릴 권세도 있으며 인간이야 제멋대로 살던말던 자기들의 잘못으로 죄에 빠져 죽든말든 그 책임을 몽땅 인간에게 지우고 내 몰라라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반역에 대하여 몸살을 앓으면서까지 안스러워하고 책망하시고 의사로서 고치시고 급기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리에 복종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목숨하나 구원하고 죽은 벌레하나 살릴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그 조그마한 자유를 자유랍시고 얼마나 방탕하며 얼마나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까 마치 하룻살이가 불어가는 인간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이 자유의지를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그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은 마음껏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얻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고, 포기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때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이 영적인 진리를 꺠달아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갈 것 아니라 의와 화평을 쫓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순종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결론적으로
중국 고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나뭇꾼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아침부터 밤늦도록 한번도 쉬지않고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나뭇꾼은 열심히 하는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나 한사람보다 나무를 많이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서 나무하는것을 멈추고 나무를 많이하는 그 사람을 훔쳐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무를 하다가 한참을 쉬는데 그 사이에 도끼를 숯돌에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디어딘 도끼로 하루종일 나무했던 사람보다 쉬면서 그 쉬는 시간에 도끼도 갈고 휴식도 취하여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평법한것 같지만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 앞에 사는 인간이 제힘으로 살아간다면 언제나 열심히해도 지치고 얻은것이 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고 에너지를 얻으며 말씀을 따라 인도함을 받으며 늦게 가는것 같고 천천히 하는것 같지만 결코 실패가 없는 성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모든것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마음먹은데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삼가하고 말씀을 따라 계획하고 하나님의 순리에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시판을 내리시기로 다시 마음을 조굳히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몇 사람을 심판하시므로 비뚤어져 가는 인류의 역사를 되 잡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니다. 모른채 할 수 있는 자유, 내 팽개칠 수 잇는 자유를 포기하시고 귀찮지만 다시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의 우리 조상들은 그 좋은 환경속에서도 반역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말해 인간의 타락은 환경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좋은 환경에도 만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 이르러서 인간은 또 하나의 좋은 환경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것은 하늘의 궁창이 터지는 것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강한 자외선을 막아 따뜻하고 퐁요로운 대기를 형성해 주던 하늘의 궁창이 그만 터져 진노의 샘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반역하고 범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면 축복이었던 샘도, 진노와 저주의 샘이 되어 우리에게 일순간에 쏟아부어져서 홍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려고 예비해 놓으셨던 진노가 도리어 바뀌어 축복의 샘이 되도록 합시다. 오히려 저주가 바뀌어서 축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이요, 축복생활이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노가 변하여 축복의 홍수가 되게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꼐서 노아를 향하여 베푸셨던 은혜를 보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야 합니다.
9절은 증거하기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동행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며 생각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교제하며 통신했다는 것입니다. 망망대해를 가는 한척의 난파선이 낮에는 태양의 위치를 보고 길을 잡고 밤에는 별을 보고 기준을 삼아 항해하듯이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진리를 알고 내세가 있음도 알아 바르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 망하는 길의 시작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 제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실패하고 패망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하면 이길 것입니다.
딤후3:16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6:33에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는 시류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100사람이며 100사람의 생각이 각기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또 내가 알고 있는 크리스챤도 그렇게 적당하게 사는데 나라고 무엇 별수가 이는가 그러니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며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스펄젼목사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란 결코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적당주의 혼합주의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풍속을 쫓아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대로 행하면 필경은 망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남을 짓밟더라도 나와 내 가족만은 노후를 보장 받아야 되겠다고 아우성을 친다합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뒤를 묵묵히 쫓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무소유의 자유’입니다. 샘은 특징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고 계속솟아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젖을 물리는 엄마의 유방은 아이가 빨기를 멈출 때까지 계속 나옵니다. 젖을 짜주지 않으면 묽어지고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사도들의 발앞에 다 갖다 놓았습니다. 결과 그들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6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철저하리만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요, 그것이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이나 사람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완벽해서 나서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며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두면 곧 훈수드는 사람이 붙고 급기야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야구보러 갔다가 난장판 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없는것은 없는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행위 때문에 구원하시지도 축복하시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먹을때도 있습니다. 매듭이 꼬이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말씀이 공급되는 사람은 늘 새로운 물이 솟아나서 씻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살수록 더욱 자주 씻어야만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삶이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내 자신의 열매로 나가지 맙시다. 호세아처럼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무화과 나무에 열매 없고 밭에 소출이 없어도 오직 하나니뫄 관계 맺는 것으로 즐거워하시는 삶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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