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출14:1-21)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살아 계신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으로 종되었던 애굽에서 해방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과 그 절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말해 주고 있다. 출애굽의 대역사….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이 육체적으로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소망에 찬 여정이다. 곧 우리 인생이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해방 되어,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새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을 보여 주고 있다. 출애굽기 12:37-39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고 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종되었던 애굽에서 풀려나 하나님이 주시마고 약속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야. 어찌 그 기쁨과 환희를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예수 이름을 믿고 구원 얻은 기쁨, 바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그 순간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과 찬양 아마도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도 잠시 뿐이었다.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그들에게 큰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홍해 바다였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장애물 홍해 바다였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종으로서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아왔다(출1:14). 일찍이 그들의 선조들도 목축을 하며 살아왔다(창46:34). 다시 말해서 바다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앞을 가로막은 홍해 바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생전 처음 바다를 바라보며 넘실대는 바닷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바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바다이다. 이 홍해 바다를 건너야 진정 출애굽이 되는 것이다. 홍해 바다를 건너지 못하면 결국 애굽의 영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큰 장애물인 홍해 바다를 바라보며, 진퇴양난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의에 빠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뒤돌아 보게 된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애굽의 바로 왕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그 기세가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홍해 바다를 앞에 두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자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세 당당함이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 그 환희 모두가 사라지고 없다. 실의와 절망, 낭패와 절망이 있다. 거기에다 바로 왕의 애굽 군대가 추격을 해 오고 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 성도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새 삶”을 살아가는 길에서 처하게 되는 장애물이다. 저 선민 이스라엘이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져 한다.
1.두려움이 있다. 본문 10절에“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눈을 들어” 자기의 뒤에 미친 애굽 사람들을 보았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지를 알았으리라. 선민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뒤를 보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의 애굽군 추격대를 바라보았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려움 뿐이다. 부르짖음 뿐이다.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환희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두려워 벌벌 떨고 있다. 잊어 버려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 버려도 너무 온통 깡그리 다 잊어버린다. 정말로 이해가 안되리 만큼 바보 같은 모습이다. 적어도 나 같으면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실상은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몸 주께 바칩니다. 우리의 결심이 약하여 깨어진 삶일까. “주 은혜 놀라와!”의 감격이 작아서 넘어지는 우리의 삶일까
⑴.앞에는 홍해 선민 이스라엘 백성 앞에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나타났다.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홍해 바다이다. 바다를 알지도 못하고, 바다에서 고기잡이도 해본적이 없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보지도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니 선민 이스라엘의 처한 실의와 절망감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기껏 그들이 경험한 것은 나일 강물 정도일 것이다. 홍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나일 강도 홍수로 범람을 하니 그 얼마나 무서운 물이던가.
⑵.뒤에는 바로 왕의 추격군 본문 9절에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 미치니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바로 왕이 이끄는 애굽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 곧 특별 병거 600승과 마병과 군대가 보였다. 참으로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추격 부대였다.
⑶.담대함은 어디로 가고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고 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하여 홍해 바닷가 비하히롯에 장막을 치기까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행진의 모습을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고 했다.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그들의 발걸음은 신명이 났고, 가벼웠고, 막힘이 없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래서 “담대히 나갔다”라고 한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바로 왕의 애굽 군대의 모습이 보였고, 순간 그들의 눈에는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와 바로 왕의 추격 군대의 모습이 서로 교차되면서. “담대히 나갔음이라”의 그 “담대함”은 사라져 버렸다.
⑷.무엇을 위한 부르짖음인가 본문 10절에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다. 왜 부르짖었을까 무엇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을까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부르짖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의뢰하는 믿음은 사라졌다.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백성들이 금은 패물을 내어 주며 “어서 속히 떠나 달라”고 항복하도록 열 재앙으로 치시던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민수기 14: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목소리이다.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부르짖어야 할 목소리이다. 열 재앙의 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라암셋을 출발하던 그날의 감격을 다시금 회상해야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날의 감격은 없어졌고, 오히려 바로 왕의 추격 군대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었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두는 우리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다. 마태복음 6: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했다.
2.원망이 있다 본문 11절에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원망이 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던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를 돌아 보는 눈길에는 바로 왕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그로인한 두려움에서 결국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 놓았다.
⑴.열 재앙의 하나님 은혜를 잊음 종되었던 애굽에서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으로 바로 왕과 온 애굽 천지에 열 재앙을 내리심으로 금은 패물을 주면서 “속히 떠나 달라”는 승리를 주셨던 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왕의 추격군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그만 잊어 버렸다.
⑵.죽음의 공포 선민 이스라엘의 가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니, 곧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삶에 대한 소망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로 이끌어 와서 죽게 하느냐는 원망이다. 바로 매장지 타령이다.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입어, 그분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따라 자유를 찾아 달려온 이스라엘이 아닌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는 가나안을 향해 “담대히” 나아 온 저들이, 이제 와서 매장지 타령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뒤돌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선민 이스라엘이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내용이다. 이미 그들에게는 열 재앙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약속도 잊혀지고, 죽음의 공포로 실의와 절망에 가득차 원망을 하고 있다.
⑶.삽시간의 반전 민수기 14:3-4절에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케 한 열 정탐꾼들의 보고를 접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배반의 모습이다. 사탄의 책동은 언제나 불신의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 한다. 민수기 11:4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 했다. 문제는 이 섞여 사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섞여 사는 무리가 적지 않았다. “중다한 잡족”이라고 했다(출12:38). 또한 비류들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불심의 마음은 언제나 숫자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열 두 정탐꾼 중에서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 불신의 마음은 삽시간에 반전을 불러온다. 삽시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번져 나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상관치 않으신다. 오히려 적은 숫자로 큰 일을 행하여 가심을 우리는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원망이 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돌아 보았을 때, 거기에는 원망이 있었다. 우리 성도들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뒤돌아 볼 때 원망이 나오게 된다.
3.동경이 있다. 본문 12절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동경이 있다. 종되었던 애굽에 대한 동경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은 어디로 갔을까
⑴.죽는 것과 사는 것의 비교.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사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동경이다. 그들이 동경하고 소망해야 할 곳은 야속의 땅 가나안이다. 애굽은 그들이 버리고 나온 땅이다. 생과 사의 비교 진정 귀한 것이 무엇일까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살아 있다 해도 그는 종이다. 비록 이 광야에서 죽는다 해도 그는 자유인이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바로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차이이다(요일3:10). 우리 인간은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이지, 마귀의 자식으로 100년을 살아도 남는 것은 지옥밖에 없다.
⑵.버려두라 우리를 버려 두라. 바로 나온바 애굽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온바 본향”을 잊어버리고 살아간 아브라함이다.
⑶.애굽인 섬기리라 애굽에서 빌붙어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도 종으로 섬기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버리고, 애굽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⑷.돌아가자 민수기 14:4절에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온바 본향”을 향한 동경은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부르짖게 된다. 과거로 향한 동경이, 나온바 본향으로 향한 동경이, 끝내는 “애굽으로 돌아가자”로 그들의 마음이 달라지게 된다.
4.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온다. 본문 15-1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왕의 애굽군 추격대가 보였다. 그로인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원망이 되었다. 그래서 종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제의 해결은 하나도 없다. 돌아가 보어야 더 큰 징벌과 혹독한 고역이 기다릴 뿐이다. 참으로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낭패와 실망뿐이다. 그렇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의와 절망, 낭패와 좌절 속에 헤매이는 이 어려움의 문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온다. 뒤로 물러가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⑴.구원을 보라 본문 13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그 해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요, 실망이요, 좌절이지만, 모세와 같이 그 해법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그 해법의 열쇠가 바로 믿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열 재앙의 은혜로 종되었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모세에게는 문제가 없다. 본문 4절에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했다. 바로의 군사들이 뒤를 따라오리라는 사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애굽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선민 이스라엘, 믿음이 없는 그들의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가 능하신 하나님 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히11:24),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신33:1) 그렇지 않았다. 선민 이스라엘의뒤돌아 보는 눈길에는.실패와 낭패 뿐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모세의 눈에는 “여호와의 구원”이 보였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향하여 소리친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그들이 할 일은 사실은 없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라고 한다. 불기둥, 구름 기둥의 인도를 따라 행진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출13:21-22).
⑵.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심 뒤에서 추격해 오는 바로 왕의 추격 군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이 물리쳐야 할 군대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싸우시고, 물리치실 군대이다. 바로 하나님의 문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로 잘못 알고 있다. 지난날에는 애굽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종되었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자녀가 당하는 어려운 문제는 바로 부모의 일이다.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자녀의 할 일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⑶.앞으로 나아가라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뒤돌아 보라”는 말이 아니다. 추격하는 바로의 애굽 군대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원망하라”는 것도 아니다. 지난날을 “동경하라”는 것도 아니다. 내게 부르짖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⑷.바다가 갈라지니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쫓아, 손을 들어 지팡이로 가리키는 홍해 바다를 향하여 그들은 행진을 하였고, 홍해 바다는 그들의 행진을 막을 수 없었고, 갈라져 길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앞을 가로막은 홍해 바다 전혀 길이 없었고, 어찌해 볼 수 없는 그 절망의 바다 그러나 소망은 바로 그 홍해 바다 속에 있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강나안을 바라보며 나아갔을 때, “여호와의 구원”은 그 바다 속에 있었다. 바다는 갈라져 그들 앞에 길을 열었고, 그들은 육지로 땅을 밟으며 홍해 바다를 건넜다. ⑸.도망하자. 여호와가 치신다. 본문 24-25절에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그 일의 양면성이다.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의 구원”이요, 바로 왕의 애굽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치심이다. 바로 왕과 애굽 군대가 이것을 깨닫고 “도망하자. 여호와가 치신다”고 외칠 때는 이미 애굽의 군대는 하나님이 쳐 놓으신 그물에 깊숙이 걸려 들었다.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바퀴가 벗겨지고 어두움이 짙어지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선민 이스라엘은 지켜보았다. 바로 왕의 애굽 군대가 모조리 홍해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할 뿐이다. 찬양할 뿐이다. 영광 돌릴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두려움이 있다. 원망이 있다. 지난날에 대한 동경이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기 위해 떠나온 애굽과 같은 세상이다. 마귀의 자식으로 죄에 얽매여 죄의 종노릇하던 세상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 세상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저 이스라엘 백성처럼 뒤돌아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나온바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나아가는 앞길에 건너지 못할 바다가 가로막고, 넘지 못할 산이 가로막아도 우리의 행진은 쉬지 말고 계속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행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열린다. 그 문제의 해결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저 믿고 순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기에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도 길을 열 수밖에 없다. 태산이 가로막아도 길은 열려질 수밖에 없다.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나라의 명절인 설날이 다가온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이 없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이 설 명절을 당하여 바로 왕의 추격 군대와 같이 신앙의 발길을 잡는 일들에 시달려야 하는 숱한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자. 나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맡기자. 그리고 순종하자. 홍해 바다를 갈라 길을 여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몫이다. 당신의 자녀를 지키고, 양육하고, 인도하는 일은. 바로 부모의 할 일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가 계시기에 두려움도, 걱정도, 실망도, 좌절도, 낭패도. 다 맡아 주시리라.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려움이 있다. 원망이 있다. 지난날을 향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돌아가자”가 되면 안 된다. 뒤돌아 가는 길에는 문제의 해결이 없다.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앞으로 나아가라!” 그렇다. 바로 여기에 해결책이 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문제의 해결이 있다.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가리키는 홍해 바다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을 때, 바다는 길을 열었고, 저들은 건넜다. 바로 문제의 해결은 여기에 있었다.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그들에게 큰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홍해 바다였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장애물 홍해 바다였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종으로서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아왔다(출1:14). 일찍이 그들의 선조들도 목축을 하며 살아왔다(창46:34). 다시 말해서 바다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앞을 가로막은 홍해 바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생전 처음 바다를 바라보며 넘실대는 바닷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바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바다이다. 이 홍해 바다를 건너야 진정 출애굽이 되는 것이다. 홍해 바다를 건너지 못하면 결국 애굽의 영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큰 장애물인 홍해 바다를 바라보며, 진퇴양난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의에 빠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뒤돌아 보게 된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애굽의 바로 왕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그 기세가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홍해 바다를 앞에 두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자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세 당당함이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 그 환희 모두가 사라지고 없다. 실의와 절망, 낭패와 절망이 있다. 거기에다 바로 왕의 애굽 군대가 추격을 해 오고 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 성도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새 삶”을 살아가는 길에서 처하게 되는 장애물이다. 저 선민 이스라엘이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져 한다.
1.두려움이 있다. 본문 10절에“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눈을 들어” 자기의 뒤에 미친 애굽 사람들을 보았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지를 알았으리라. 선민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뒤를 보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의 애굽군 추격대를 바라보았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려움 뿐이다. 부르짖음 뿐이다.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환희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두려워 벌벌 떨고 있다. 잊어 버려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 버려도 너무 온통 깡그리 다 잊어버린다. 정말로 이해가 안되리 만큼 바보 같은 모습이다. 적어도 나 같으면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실상은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몸 주께 바칩니다. 우리의 결심이 약하여 깨어진 삶일까. “주 은혜 놀라와!”의 감격이 작아서 넘어지는 우리의 삶일까
⑴.앞에는 홍해 선민 이스라엘 백성 앞에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나타났다.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홍해 바다이다. 바다를 알지도 못하고, 바다에서 고기잡이도 해본적이 없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보지도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니 선민 이스라엘의 처한 실의와 절망감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기껏 그들이 경험한 것은 나일 강물 정도일 것이다. 홍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나일 강도 홍수로 범람을 하니 그 얼마나 무서운 물이던가.
⑵.뒤에는 바로 왕의 추격군 본문 9절에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 미치니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바로 왕이 이끄는 애굽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 곧 특별 병거 600승과 마병과 군대가 보였다. 참으로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추격 부대였다.
⑶.담대함은 어디로 가고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고 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하여 홍해 바닷가 비하히롯에 장막을 치기까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행진의 모습을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고 했다.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그들의 발걸음은 신명이 났고, 가벼웠고, 막힘이 없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래서 “담대히 나갔다”라고 한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바로 왕의 애굽 군대의 모습이 보였고, 순간 그들의 눈에는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와 바로 왕의 추격 군대의 모습이 서로 교차되면서. “담대히 나갔음이라”의 그 “담대함”은 사라져 버렸다.
⑷.무엇을 위한 부르짖음인가 본문 10절에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다. 왜 부르짖었을까 무엇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을까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부르짖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의뢰하는 믿음은 사라졌다.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백성들이 금은 패물을 내어 주며 “어서 속히 떠나 달라”고 항복하도록 열 재앙으로 치시던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민수기 14: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목소리이다.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부르짖어야 할 목소리이다. 열 재앙의 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라암셋을 출발하던 그날의 감격을 다시금 회상해야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날의 감격은 없어졌고, 오히려 바로 왕의 추격 군대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었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두는 우리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다. 마태복음 6: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했다.
2.원망이 있다 본문 11절에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원망이 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던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를 돌아 보는 눈길에는 바로 왕의 추격 군대가 보였다. 그로인한 두려움에서 결국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 놓았다.
⑴.열 재앙의 하나님 은혜를 잊음 종되었던 애굽에서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으로 바로 왕과 온 애굽 천지에 열 재앙을 내리심으로 금은 패물을 주면서 “속히 떠나 달라”는 승리를 주셨던 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왕의 추격군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그만 잊어 버렸다.
⑵.죽음의 공포 선민 이스라엘의 가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니, 곧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삶에 대한 소망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로 이끌어 와서 죽게 하느냐는 원망이다. 바로 매장지 타령이다.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입어, 그분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따라 자유를 찾아 달려온 이스라엘이 아닌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는 가나안을 향해 “담대히” 나아 온 저들이, 이제 와서 매장지 타령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뒤돌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선민 이스라엘이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내용이다. 이미 그들에게는 열 재앙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약속도 잊혀지고, 죽음의 공포로 실의와 절망에 가득차 원망을 하고 있다.
⑶.삽시간의 반전 민수기 14:3-4절에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케 한 열 정탐꾼들의 보고를 접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배반의 모습이다. 사탄의 책동은 언제나 불신의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 한다. 민수기 11:4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 했다. 문제는 이 섞여 사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섞여 사는 무리가 적지 않았다. “중다한 잡족”이라고 했다(출12:38). 또한 비류들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불심의 마음은 언제나 숫자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열 두 정탐꾼 중에서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 불신의 마음은 삽시간에 반전을 불러온다. 삽시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번져 나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상관치 않으신다. 오히려 적은 숫자로 큰 일을 행하여 가심을 우리는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원망이 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앞을 바라보지 않고 뒤돌아 보았을 때, 거기에는 원망이 있었다. 우리 성도들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뒤돌아 볼 때 원망이 나오게 된다.
3.동경이 있다. 본문 12절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동경이 있다. 종되었던 애굽에 대한 동경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라암셋을 출발할 때의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은 어디로 갔을까
⑴.죽는 것과 사는 것의 비교.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사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동경이다. 그들이 동경하고 소망해야 할 곳은 야속의 땅 가나안이다. 애굽은 그들이 버리고 나온 땅이다. 생과 사의 비교 진정 귀한 것이 무엇일까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살아 있다 해도 그는 종이다. 비록 이 광야에서 죽는다 해도 그는 자유인이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바로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의 차이이다(요일3:10). 우리 인간은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이지, 마귀의 자식으로 100년을 살아도 남는 것은 지옥밖에 없다.
⑵.버려두라 우리를 버려 두라. 바로 나온바 애굽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온바 본향”을 잊어버리고 살아간 아브라함이다.
⑶.애굽인 섬기리라 애굽에서 빌붙어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도 종으로 섬기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버리고, 애굽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⑷.돌아가자 민수기 14:4절에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온바 본향”을 향한 동경은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부르짖게 된다. 과거로 향한 동경이, 나온바 본향으로 향한 동경이, 끝내는 “애굽으로 돌아가자”로 그들의 마음이 달라지게 된다.
4.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온다. 본문 15-1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했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왕의 애굽군 추격대가 보였다. 그로인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원망이 되었다. 그래서 종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제의 해결은 하나도 없다. 돌아가 보어야 더 큰 징벌과 혹독한 고역이 기다릴 뿐이다. 참으로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낭패와 실망뿐이다. 그렇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의와 절망, 낭패와 좌절 속에 헤매이는 이 어려움의 문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온다. 뒤로 물러가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⑴.구원을 보라 본문 13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그 해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요, 실망이요, 좌절이지만, 모세와 같이 그 해법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그 해법의 열쇠가 바로 믿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열 재앙의 은혜로 종되었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모세에게는 문제가 없다. 본문 4절에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했다. 바로의 군사들이 뒤를 따라오리라는 사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애굽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선민 이스라엘, 믿음이 없는 그들의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가 능하신 하나님 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히11:24),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신33:1) 그렇지 않았다. 선민 이스라엘의뒤돌아 보는 눈길에는.실패와 낭패 뿐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모세의 눈에는 “여호와의 구원”이 보였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향하여 소리친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그들이 할 일은 사실은 없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라고 한다. 불기둥, 구름 기둥의 인도를 따라 행진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출13:21-22).
⑵.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심 뒤에서 추격해 오는 바로 왕의 추격 군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이 물리쳐야 할 군대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싸우시고, 물리치실 군대이다. 바로 하나님의 문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로 잘못 알고 있다. 지난날에는 애굽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종되었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자녀가 당하는 어려운 문제는 바로 부모의 일이다.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인도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자녀의 할 일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⑶.앞으로 나아가라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뒤돌아 보라”는 말이 아니다. 추격하는 바로의 애굽 군대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원망하라”는 것도 아니다. 지난날을 “동경하라”는 것도 아니다. 내게 부르짖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⑷.바다가 갈라지니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쫓아, 손을 들어 지팡이로 가리키는 홍해 바다를 향하여 그들은 행진을 하였고, 홍해 바다는 그들의 행진을 막을 수 없었고, 갈라져 길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앞을 가로막은 홍해 바다 전혀 길이 없었고, 어찌해 볼 수 없는 그 절망의 바다 그러나 소망은 바로 그 홍해 바다 속에 있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강나안을 바라보며 나아갔을 때, “여호와의 구원”은 그 바다 속에 있었다. 바다는 갈라져 그들 앞에 길을 열었고, 그들은 육지로 땅을 밟으며 홍해 바다를 건넜다. ⑸.도망하자. 여호와가 치신다. 본문 24-25절에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그 일의 양면성이다.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의 구원”이요, 바로 왕의 애굽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치심이다. 바로 왕과 애굽 군대가 이것을 깨닫고 “도망하자. 여호와가 치신다”고 외칠 때는 이미 애굽의 군대는 하나님이 쳐 놓으신 그물에 깊숙이 걸려 들었다.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바퀴가 벗겨지고 어두움이 짙어지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선민 이스라엘은 지켜보았다. 바로 왕의 애굽 군대가 모조리 홍해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할 뿐이다. 찬양할 뿐이다. 영광 돌릴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두려움이 있다. 원망이 있다. 지난날에 대한 동경이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기 위해 떠나온 애굽과 같은 세상이다. 마귀의 자식으로 죄에 얽매여 죄의 종노릇하던 세상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 세상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저 이스라엘 백성처럼 뒤돌아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나온바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나아가는 앞길에 건너지 못할 바다가 가로막고, 넘지 못할 산이 가로막아도 우리의 행진은 쉬지 말고 계속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행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문제의 해결”이 열린다. 그 문제의 해결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저 믿고 순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기에 앞을 가로막는 홍해 바다도 길을 열 수밖에 없다. 태산이 가로막아도 길은 열려질 수밖에 없다.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나라의 명절인 설날이 다가온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이 없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이 설 명절을 당하여 바로 왕의 추격 군대와 같이 신앙의 발길을 잡는 일들에 시달려야 하는 숱한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자. 나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맡기자. 그리고 순종하자. 홍해 바다를 갈라 길을 여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몫이다. 당신의 자녀를 지키고, 양육하고, 인도하는 일은. 바로 부모의 할 일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가 계시기에 두려움도, 걱정도, 실망도, 좌절도, 낭패도. 다 맡아 주시리라. 뒤돌아 보는 눈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려움이 있다. 원망이 있다. 지난날을 향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돌아가자”가 되면 안 된다. 뒤돌아 가는 길에는 문제의 해결이 없다.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앞으로 나아가라!” 그렇다. 바로 여기에 해결책이 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문제의 해결이 있다.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가리키는 홍해 바다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을 때, 바다는 길을 열었고, 저들은 건넜다. 바로 문제의 해결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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