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 (눅9:57-62)

본문

요즘 인기 있는 사람으로 두 사람을 꼽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노 전 대통령 부정축재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안 강민 대검 중수부장이고 또한 사람은 12.12 당시 수경사령관으로 쿠데타 세력과 끝까지 싸우고자 했던 장 태완 씨입니다. 당시 보안사에서 군수뇌부의 전화를 도청한 테이프가 최근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자료에는 12일 오후 10시16분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건영 3군사령관과의 통화에서 경복궁 30 경비단에 모여있던 유학성,차규헌,황영시 중장 등 합수부측의 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무력진압 의사를 강력하게 밝힌 내용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유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장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와. 당신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 한테 전화 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진데 왜 그래. 너 이리 와’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라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있고 나도 와 있는데 마 이리와’ ‘무슨혼자 다 해 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입영 영장을 받으면 모두가 군인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군인이 진정한 군인은 아닙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버리겠다는 군인이 진정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구원 초청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진정한 제자가 추구해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의 삶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쫓으라”고 하면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주님의 행동을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스승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 교육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을 본받는 것을 일평생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을 본받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동양윤리의 근간이 되는 삼강 오륜 가운데 삼강 즉, 군위신강, 부위부강, 부위자강의 뜻은 한마디로 본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군왕은 신하에게 본을 보여야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본을 보여야 하고,아버지는 아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수법의 황금률은 바로 스승이 제자에게 생활을 통하여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의 황금률도 바로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의 삶은 희생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좇겠다고 자원한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마8:19).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상관치 않고 따르겠다고 굳은 결심을 나타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거부되었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거부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용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1)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 하며 질문하던 부자 청년을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2:32을 보십시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본문도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나를 좇으라”고 부르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좇겠다고 하는 사람을 마다하겠습니까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받아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따라오기를 진정으로 고대하십니다.
2)예수님은 그가 제자의 삶의 실상을 바로 이해하고 좇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단지 그분이 나아가는 길이 평탄한 것이 아니고 험난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자의 삶에 수반되는 희생과 어려움을 충분히 예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한 때의 감상적인 기분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흥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그 삶의 이모저모를 완전히 이해한 후 결단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미리부터 이러한 희생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 좇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순교의 길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시이저가 주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다.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먼저 그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크리소스톰은 대답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곳을 뚫고 도적질 할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너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키겠다”라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저에게 결코 저를 떠나시지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크리소스톰, 그 자신은 그의 환경, 즉 속박과 투옥,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상관없이 정말로 자유로웠다.
셋째로, 제자의 삶은 신속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번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좇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주님께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얼마 전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는 친구 목사가 주일에 하나 남은 남동생 결혼식이 부산에서 있다고 휴무를 청했는데 본교회 목사님이 바로 이 말씀을 하면서 거부하셨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친구가 크게 낙담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말씀이 그처럼 무자비하고 냉정한 것처럼 여겨집니까 주님께서 부모의 장례식 치르는 것까지금지하시는 것이라고 여겨집니까 저도 전에는 이 말씀을 대하면 주님을 원망하기도 뭣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기도 뭣하고 해서 깊은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습니다. 이 사람은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 시점에 죽은 것은 단정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집에서 시신 곁에 있어야지 거리에 나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병이 들어서 조만간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늙은 아버지가 여생을 보낼 때까지는 곁에 있다가 사후에 좇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마냥 지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속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제자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59절은 “나를 좇으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데 생을 바치셨는 데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제자의 삶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세번째 사람은 “주여 내가 주를 좇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하고 간청했습니다. 주님의 답변은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기로 하는 사람은 가족에게 기별도 없이 다른 지역으로 훌쩍 떠나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사로 해외로 가더라도 가족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가 가족이 헤어짐을 생각하고 흘리는 눈물에 자칫 마음에 결심한 것이 흔들릴까봐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뒤를 돌아본 사람”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롯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불과 유황에 휩싸인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자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는 세상의 그 어는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 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장 장군은 그 당시를 그린 TV 드라마를 통해서도 진정한 군인상으로 부각되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당에서 영입하려고 힘깨나 쓰는 모양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본문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1.예수님은 좇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을 물리치시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좇으라고 부르셨다. 그분의 부르심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2.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부친을 장사하지 말아야 한다.
3.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어도 작별 인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오해가 풀렸으리라 믿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0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