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의 형편 (계2:18-29)
본문
두아디라 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권면의 내용이 길다는 것과 다른 교회들에 비해 말씀의 주체를 직접적인 표현 방식을 통해 밝히고 계신다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주께서 칭찬하시는 바른 신앙 생활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기로 합니다.
1. 두아디라 지역의 개괄 두아디라 지역은 보잘 것 없는 지역 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저명한 저술가도 없었고, 어떤 분야에서도 두아디라를 자기 출생지라고 밝힌 유명인사는 없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어떤 도시도 하나의 요새로서 위풍이나 그 견고함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두아디라보다 못한 곳은 없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앞이 훤히 트인 골짜기에 위치하며, 완만히 경사진 언덕과 접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늘로 가리워진 곳 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 주는 전체적 인상은 연약하고 종속적이며 의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는 버가모에 이르는 카이쿠스 강 유역 입구를 방어하는 제 일차 방어선이라는 수비대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 이랍니다. 그 도시에서 사용한 동전들은 군인처럼 무장한 여인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두아디라는 자주 옷감과 의복을 파는 산업이 융성 했습니다. 자주색 상품과 의복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염료가 생산이 되었는데 이는 페니키아와 스파르타 해안 근해에서 잡히는 무렉스(Murex)라는 조개의 주둥이에서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두아디라에서 나는 염료가 종종 '터기 레드(Turkey red)의 뿌리에서 채취되었는데, 그것은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초록색 식물로서 두아디라 성 근처 여러 계곡에 무성히 자라는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엔 공업인 조합이 있어서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는 단체로서 종교에서 깊숙히 관여하였다고 합니다.
1.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
1)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가 해야할 사업들 즉, 구제와 봉사와 선교 등의 일을 부지런하여 성실히 수행 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열심히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사교 장소도 아니었고, 서로 칭찬만 해대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병약한 종교인만 수용하는 병원도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능동적으로 일하는데 힘이 넘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 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순서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은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이 부요한 듯 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어순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의 경건이 순리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 합니다.(살전1:3,3:6,5:8 참조) 사랑은,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여호와 하나님 중심 입니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 합니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지키지 않고, 포옹주의 사랑만 위주하다가 비진리 곧, 이세벧 이단같은 것을 포용하게 된 듯 합니다. 그것은 우선 순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한 잘 못으로 생긴 결과이다.
(3) 일의 발전을 칭찬 받는 교회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훨씬 휼륭한 교회로 칭찬받았습니다. 쓸모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을 넓어가고 깊어가는 교회였습니다. 교인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처음 구원을 얻었을 때 보다 더욱 신앙의 발전이 있는 교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2)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 이세벨 여인을 용납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자칭 선지라는 하는 이세벨에 의해 좌우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20)
(1) 구약의 이세벨과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의 관계성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우상숭배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시도한 여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이세벨은 시돈 왕 옛 바알의 딸이었고 바알의 철저한 추종자였습니다.(왕상16:31). 그녀는 바알의 여 대제사장이었고 종교적 음행과 술수를 이스라엘에 들여오는 것을 책임졌던 인물입니다. 이 여인과의 결혼에 의해 성립된 시돈과의 거래로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번영과 큰 부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합 왕과 그 백성이 이세벨에 의해 매료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세벨은 그들에게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여 그들을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끓게 하였습니다. 두아디라의 이세벨 또한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합 왕후는 이스라엘의 모든 일에 관계하였고, 새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에 관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매력과 정열을 가지고 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교회는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의 중심에서 떠나가셨고 영적생활의 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엘리야가 이 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 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왕하 9:33),
(2) 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라고 하였는데(왕상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왕하9:6-37).
(3)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습니다.(왕상 19:40)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의 세 큰 위협과 부합 합니다. 계시록에 이세벨에게 대하여 보이신 세 큰 위협은 1 그 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이다.(22절),
2 그와 음행하는 자,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진다. 3 그의 자녀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한 자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외래의 이교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 입니다.
(2)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이세벨이 여인이기 때문에 정죄받는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그 사역의 마귀적 성질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랍비적 전통에따라 여성에게 부가된 제한성을 인정하셨지만 여성의 신분에 어떤 훼손이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여인들의 사역을 통해서(롬 16:13-5,6,12,15) 대단한 유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행 16:13;고전 11:13)와 손님 접대 및 교회의 모임 장소와 가르침을 위해 그들의 집을 내어 준 사실을 통해서(행 16:15, 40;18:1-3, 24-26; 롬16:3-5; 고전16:19) 적지않은 유익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영적은사가 인정받게 되었고(행 21:9) 심지어 공적 예배에서 까지 발휘 되였습니다.(고전11:5) 우리는 적어도 뵈뵈가 집사라는 공적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롬 16:1). 우리 임의대로 그들이 활약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서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두 구절(고전 14:34, 딤전 2:12)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 입니다.
(3) 교우들의 자기 진단 초기 주석가들 중에서 되풀이된 한 주제는 이세벨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행16:14)와 일치하는 여인이라고 한 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어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 한다면, 그것은 초기의 영적 생활에 아주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는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내려 간 것으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족히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주요한 요점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 예수는 마음을 아는 분 입니다.(행1:24) '마음을 아는 자'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칭호 입니다.(행1:24;15:8). 사람은 외모에 너무나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수가 없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한 사진작가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지만 필름을 현상해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면서도 이상한 반점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이 사진작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행여 카메라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여성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딸이 어렸을 때 홍역을 앓았다고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카메라의 면밀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실때,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실 수있습니다. 우리의 삶들을 망치게 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2) 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갚아 주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3절)는 말씀은 이세벨을 따른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짧은 구절은 심판이 개개인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두아디라에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이지만, 성경이나 역사 모두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갑자기 내린 형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타협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 어떤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주께서는 빛 가운데서나 어두움 가운데서나 우리를 보시는 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를 보실 수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웃으면서 [웃기지 마시요, 우리가 밤에 방안에 있으면 얼마나 컴컴한테 누가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쌍한 아프리카 토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우리처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아디라교회의 죄인을 보셨듯이 오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3) 현재의 심판과 장차 임할 심판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감독하시기도 하고 심판도 게을리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심판과 최종적 사건으로서의 심판 양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보고에서 살펴본 대로 '촛대'는 회중에게서 다른데로 옮겨질 수도 있습니다(계2:5). 촛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해 완고하게 불순종하면 옮겨지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습관적으로 불순종 하지만 않는다면 전혀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1. 두아디라 지역의 개괄 두아디라 지역은 보잘 것 없는 지역 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저명한 저술가도 없었고, 어떤 분야에서도 두아디라를 자기 출생지라고 밝힌 유명인사는 없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어떤 도시도 하나의 요새로서 위풍이나 그 견고함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두아디라보다 못한 곳은 없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앞이 훤히 트인 골짜기에 위치하며, 완만히 경사진 언덕과 접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늘로 가리워진 곳 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 주는 전체적 인상은 연약하고 종속적이며 의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는 버가모에 이르는 카이쿠스 강 유역 입구를 방어하는 제 일차 방어선이라는 수비대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 이랍니다. 그 도시에서 사용한 동전들은 군인처럼 무장한 여인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두아디라는 자주 옷감과 의복을 파는 산업이 융성 했습니다. 자주색 상품과 의복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염료가 생산이 되었는데 이는 페니키아와 스파르타 해안 근해에서 잡히는 무렉스(Murex)라는 조개의 주둥이에서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두아디라에서 나는 염료가 종종 '터기 레드(Turkey red)의 뿌리에서 채취되었는데, 그것은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초록색 식물로서 두아디라 성 근처 여러 계곡에 무성히 자라는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엔 공업인 조합이 있어서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는 단체로서 종교에서 깊숙히 관여하였다고 합니다.
1.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
1)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가 해야할 사업들 즉, 구제와 봉사와 선교 등의 일을 부지런하여 성실히 수행 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열심히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사교 장소도 아니었고, 서로 칭찬만 해대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고 병약한 종교인만 수용하는 병원도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능동적으로 일하는데 힘이 넘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2) 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순서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은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이 부요한 듯 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어순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의 경건이 순리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 합니다.(살전1:3,3:6,5:8 참조) 사랑은,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여호와 하나님 중심 입니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 합니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지키지 않고, 포옹주의 사랑만 위주하다가 비진리 곧, 이세벧 이단같은 것을 포용하게 된 듯 합니다. 그것은 우선 순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한 잘 못으로 생긴 결과이다.
(3) 일의 발전을 칭찬 받는 교회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훨씬 휼륭한 교회로 칭찬받았습니다. 쓸모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을 넓어가고 깊어가는 교회였습니다. 교인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처음 구원을 얻었을 때 보다 더욱 신앙의 발전이 있는 교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2)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 이세벨 여인을 용납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자칭 선지라는 하는 이세벨에 의해 좌우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20)
(1) 구약의 이세벨과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의 관계성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우상숭배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시도한 여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이세벨은 시돈 왕 옛 바알의 딸이었고 바알의 철저한 추종자였습니다.(왕상16:31). 그녀는 바알의 여 대제사장이었고 종교적 음행과 술수를 이스라엘에 들여오는 것을 책임졌던 인물입니다. 이 여인과의 결혼에 의해 성립된 시돈과의 거래로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번영과 큰 부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합 왕과 그 백성이 이세벨에 의해 매료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세벨은 그들에게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여 그들을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끓게 하였습니다. 두아디라의 이세벨 또한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합 왕후는 이스라엘의 모든 일에 관계하였고, 새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에 관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매력과 정열을 가지고 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교회는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의 중심에서 떠나가셨고 영적생활의 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엘리야가 이 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 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왕하 9:33),
(2) 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라고 하였는데(왕상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왕하9:6-37).
(3)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습니다.(왕상 19:40)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의 세 큰 위협과 부합 합니다. 계시록에 이세벨에게 대하여 보이신 세 큰 위협은 1 그 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이다.(22절),
2 그와 음행하는 자,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진다. 3 그의 자녀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한 자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외래의 이교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 입니다.
(2)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이세벨이 여인이기 때문에 정죄받는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그 사역의 마귀적 성질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랍비적 전통에따라 여성에게 부가된 제한성을 인정하셨지만 여성의 신분에 어떤 훼손이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여인들의 사역을 통해서(롬 16:13-5,6,12,15) 대단한 유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행 16:13;고전 11:13)와 손님 접대 및 교회의 모임 장소와 가르침을 위해 그들의 집을 내어 준 사실을 통해서(행 16:15, 40;18:1-3, 24-26; 롬16:3-5; 고전16:19) 적지않은 유익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영적은사가 인정받게 되었고(행 21:9) 심지어 공적 예배에서 까지 발휘 되였습니다.(고전11:5) 우리는 적어도 뵈뵈가 집사라는 공적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롬 16:1). 우리 임의대로 그들이 활약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서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두 구절(고전 14:34, 딤전 2:12)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 입니다.
(3) 교우들의 자기 진단 초기 주석가들 중에서 되풀이된 한 주제는 이세벨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디아(행16:14)와 일치하는 여인이라고 한 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어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 한다면, 그것은 초기의 영적 생활에 아주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는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내려 간 것으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족히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주요한 요점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습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 예수는 마음을 아는 분 입니다.(행1:24) '마음을 아는 자'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칭호 입니다.(행1:24;15:8). 사람은 외모에 너무나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수가 없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한 사진작가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지만 필름을 현상해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면서도 이상한 반점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이 사진작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행여 카메라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여성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딸이 어렸을 때 홍역을 앓았다고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카메라의 면밀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 보실때,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실 수있습니다. 우리의 삶들을 망치게 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2) 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갚아 주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3절)는 말씀은 이세벨을 따른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짧은 구절은 심판이 개개인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두아디라에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이지만, 성경이나 역사 모두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갑자기 내린 형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타협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 어떤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주께서는 빛 가운데서나 어두움 가운데서나 우리를 보시는 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를 보실 수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웃으면서 [웃기지 마시요, 우리가 밤에 방안에 있으면 얼마나 컴컴한테 누가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쌍한 아프리카 토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우리처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아디라교회의 죄인을 보셨듯이 오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3) 현재의 심판과 장차 임할 심판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감독하시기도 하고 심판도 게을리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이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심판과 최종적 사건으로서의 심판 양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보고에서 살펴본 대로 '촛대'는 회중에게서 다른데로 옮겨질 수도 있습니다(계2:5). 촛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해 완고하게 불순종하면 옮겨지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습관적으로 불순종 하지만 않는다면 전혀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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