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교회-만국권세와새벽별 (계2:18-29)
본문
세계에서 가장 큰 통치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클린턴 그는 단지 세계 경찰의 경찰 총장일 뿐입니다. 한때는 레닌이 세계에서 가장 큰 통치자인 듯 보였습니다. 세계 절반이 그의 사상과 정치 노선을 따랐고 레닌과 함께 이상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내세가 아닌 현세적 이상이란 결론적으 로 배부르고 등따신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빵이 없는 이상을 대 중은 쫓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 이상은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큰 통치자일까 부처 예수 알라 성경은 큰 통치자의 개념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참 여호와 하나님이신 여호와요 또 하나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피지배자인 인간은 둘 중에 어느 쪽 이든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여기서 다원주의 시각으로 보일 염려가 있어 미리 밝히는바 마귀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자는 하나님 한 분밖 에 없으시다.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성도의 구원을 위해 마귀는 호응 (呼應)하는 존재이다. 이를 대립적 호응(對立的 呼應)이라고 한다. 마귀도 하늘의 태양이나 바다의 바람과 같이 성도의 구원에 이용되는 이용물에 불 과하다. 다만 통치 생존본능의 존재인 인간은 어느쪽이든 선악간(善惡間) 소속되게 되어 있으며 이 소속 개념으로 볼 때 통치권이 양분되는 현상으 로 보일 뿐이다.) 이제 질문 한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의 통치를 받고 계 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이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은 신분(身分)상 명분(名分)상 가지고 있는 이름일 뿐입니다. 구한말 이 나라 백성이 말로는 조선 사람이지만 실질적 으로는 일본의 지배와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1) 만국을 다스려라 고려가 망한 이유를 여러 가지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무신 정치(武臣 政治)입니다. 정치를 할 만한 실력도 없는데 누구누구의 힘을 등에 없고 정치를 하다 보니 그 자는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주관이 없고 실력도 없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고인 물은 썩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해하지 못할 말씀한 구절을 듣습니다. 본문에 말하기를 예수만 잘 믿으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빽으로 황제쯤은 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나 나나 집안에서 안사람에게나 큰소리 치고 이 불 속에서나 힘쓸 줄 알지 황제자리에 앉혀 놓으면 오줌 싸며 도망칠 필 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만국을 다스릴 황제의 보좌에 앉힌 다 그것이 천국이겠습니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예수님 앞에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대뜸 하는 말이 돌덩이로 빵을 만들라고 하더니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3:8-9]]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믿음의 보상으로 마귀가 보여준 천하 만국과 영광을 꿈꾸고 있 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말인데도 [[만국을 다스 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을 만국을 다스릴 부귀공명 이라는 세상 영광적 개념으로 이해를 해 버리고 믿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목에다 핏대 세우실 분들 많으실 겁니다. 아니라고 그 무슨 말이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열변 을 토하실 것입니다. 또 실지로 그렇게 믿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니 김 집사는 기와집 박 목사는 초가집에 살더라 하는 말이 왜 나옵니 까 우리가 하도 집 없는 세상에 사니까 천국에 가서라도 좋은 집에 살고 자 하는 소망이 이런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그렇게들 믿고 있습니다. 전국에 가면 금은보석이 산 처럼 쌓이고 아버지의 집에는 날마다 연 락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 가면 좋은 집에 살고 호화롭게 연락하고 하는 그것이 구원의 본질입니까 천국에 가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까 만국을 다스릴 권세라는 말은 실질적 통치 권이 아니라 통치권을 비유로 든 구원 계시입니다.
A)통치권으로 비유된 구원 계시 앞서 누가 세상에서 제일 큰 통치자냐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연관지어 생각해 봅시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란 통치 자적 개념입니다. 그러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은 무관한 것인가 세상의 통치 개념으로는 유관한 것입니다. 현군(賢君)이든 폭군(暴君)이든 그 권세를 가지고 누리는 영광은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암시적(暗示的) 개념 은 다분히 세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사람이 되어 진리로서 만국 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세상 만국의 모든 일과 사건을 볼 때에 그것이 진리 적인 사건이냐 비 진리 적인 사건이냐 하는 것과 그것이 구원에 이로운 것 이냐 무익한 것이냐 하는 것-보다는 권세를 누리는 영광에 그 관심이 집 중되어 있습니다. 한때 고려를 지배했던 원(元)나라는 고려의 왕통을 이을 왕자를 자기의 나라로 데려가 자기 나라 공주와 결혼을 시키기고 원나라의 교육을 시켜 원나라의 사람을 만들어서 고려의 왕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왕들 중 우리가 잘 아는 왕이 공민왕입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보잘것없는 반도의 작은 나라의 분봉 왕을 삼는데도 철저하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왕으로 봉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할 생명을 다스리고 양육할 성도들의 왕을 아무나 시키겠느냐 말입니다. 다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물론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하나님이 개똥을 보고 이것은 사과다 라고 말씀하 시면 ㉮ 아멘. 개똥은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사과입니다. ㉯ 아멘. 눈으로 보기에는 개똥이지만 사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사과입니다. ㉰ 아멘. 지금은 개똥이나 주님이 역사 하시면 개똥이 사과로 변할 줄 믿습니다. ㉱ 아멘. 개똥을 사과나무에 뿌리면 사과나무는 그 양분을 먹고 사과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과를 주심은 우리가 이것을 먹고 더 욱더 주님과 단일된 의사성(意思性-뜻하는 바와 생각하는 성분-)으로 더욱더 믿음을 키우라는 뜻이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어떤 믿음의 조건과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겠느냐 말입니다. 당연히 당신의 뜻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그저 맹목적으로 개똥이 사과라고 하면 개똥이 사과 인줄 믿는 미련 밥 통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을 맡기겠습니까 과정과 순서와 목적은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믿기만 하고 심부름이 나 하는 덜떨어진 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을 맡기겠습니 까 마른 하늘에 비가 오고 한밤중에 해가 뜨는 기적이나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게으르고 의타적인 무능력한 사람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 을 맡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개똥이 사과다 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하신 속뜻을 바로 알고 개똥을 주서다 사과나무 밑에 뿌리고 잡초를 뽑고 가지치기를 하고 해충을 잡으며 물을 주어서 사과가 열리도록 하는 사람, 이런 신앙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성경에 어디 있냐고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안 살고 다 윗이 그렇게 안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사과가 열릴 수 있도록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과나무를 동산에 심어 놓으시고 개가 길가에 개똥을 싸도록 해 놓으시고 성도 나에 게는 다만 그 똥을 주서다 사과나무에 뿌리고 사과 나무를 가꾸는 일을 주 셨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왜 주셨느냐 그냥 사과가 열리게 하 지 사과나무를 가꾸고 땀을 흘리면서 얻는 그 기쁨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자로 성장시키며 느끼는 그 기쁨의 동질성을 느끼 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인격적 교제라고 합니다. 이 교제를 통 해서 만이 거듭난 영의 생명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개똥을 먹으면 죽습니다. 그와 마찬 가지로 진리를 먹도록 창조된 영은 하나님과 진리적 인격성의 교제를 할 때만이 성장을 합니다.
B)진리로 다스려라 다스린다는 것은 타(他)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품은 그릇된 욕심 충동 감정 등등의 심리적 행동을 억제하고 컨트롤하는 것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왕이 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 왕이 되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교훈을 먹어서 우상에게 절하고 그와 음 탕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두아디라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었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절하고 그의 하수에서 나오는 물로 온갖 음탕한 짓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 전부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적 어도 앞으로 남아 있는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아 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 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 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 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하리라]] 당신에게 주님의 요구 사항이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적 생명으로 너 자신을 다스려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헌금의 조건도 없고 봉사의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 나를 창조하여 이 땅에 살도록 하여서 예수를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하여 장차 올 세상에서 영광을 주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이 아닌 것들을 철저하게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세살 짜리 아이는 작은 고무공 하나 들기가 힘이 들지만 이 아이가 무럭 무럭 장성하면 축구 선수도 될 수 있고 럭비 선수도 될 수 있습니다. 현 재적 믿음은 작지만 그 믿음은 얼마 던지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얻어지는 부산물이 아닙니다. 본 문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여러분이 얼마나 진리를 붙잡고 사느냐 그 진리를 지키느냐 하는 노력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주님이 주신 그 구원을 붙잡고 지키며 사시겠습니까 그 결정은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는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2)새벽별이 주는 소망 이제 여러분들은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 야 하느냐 여러분, 지금까지 이 어두운 세상을 무엇을 보고 살았습니까 혹시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침이 밝기를 기다 리며 살았습니까 세상에 얽매여 살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호되게 야단을 치십니다. 그래서 아차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고 생각을 해서 이제는 바로 살아야 겠구나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인가 하고 답을 구합니다. 이 답은 이론적으로 지난날과 같이 살지 않으면 됩니다. 또 그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자면 수도승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 거나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숨어살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 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한 여전히 돈을 벌어야 먹 고살고 자식은 칭얼거리고 여편네들 입방아는 소문에 소문을 만들고 속에 서는 울화가 치밉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갖은 모함과 모욕이 억누르고 구속합니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면 착하게 살 나를 쿡쿡 찌릅니다. 일곱 번씩 일 흔 번을 참으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만 없었다면 죽여도 몇 놈은 죽였을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망 칠 수가 없습니다. 도망쳐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여기서 어 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A)새벽 어느 시인이 가을에 봄을 말했습니다. 가을에게 봄이 없다면 그 가을은 쓸쓸하고 슬프겠지만 가을에게는 겨울 넘어 봄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가을은 쓸쓸하지만 도 슬프지만 도 않다는 것이 그 시인의 노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녁이 되어 밤이 되면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아마도 대개의 분들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아침이 있기 때문에 밤이 무섭다거나 슬프다거나 절망스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벽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새벽이란 희망을 뜻합니다. 안락한 방안에서 마누라 옆에 끼고 잠든 사람에게야 새벽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관심조차 없지만 긴 여행을 떠나 광야에 있는 사람은 밤새도록 추 위와 짐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에 새벽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따뜻한 방안에 있으나 내일에 대한 소망이 가득찬 사람은 밤잠을 자지 않고 새벽 을 기다립니다.
B)별 새벽 별이란 금성을 말합니다. 해질녘 동쪽 하늘에 나타나 해뜰 녘 서 쪽 하늘에 떠 있는 별, 이는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본문의 주제를 요약하면 [[잡아라 지켜라 이기는 너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 별을 주겠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이 성도 나 를 창조한 목적으로 잡고 그 영광을 지키면 하나님이 만국을 다스릴 권세 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진리)으로서 심판하여 옥과 돌을 가르며 참과 거짓을 가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낱 필부에 불과하고 동네에서 수다떠는 여편네에 불과한 내가 여러분이 그 엄청난 세상 유혹과 힘의 논리 앞에 무엇으로 맞설 수 있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새벽별이 주는 소망이며 신뢰 며 확신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광야의 무서운 밤이든 포근한 이불과 안락 한 침대와 사랑스런 아내가 있던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진 자는 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새벽별을 보며 아침을 기다립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 앙 자세를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 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 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0-14]]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 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2:12-14]] 현실 세계에 만족하는 자이든 불만족 하는 자이든 누구에게나 미래는 있 고 또한 그 미래는 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개념이나 이해 혹은 확신도 제 각 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 확쪑퓬봉버리고 공통되고 단일된 미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지표점(指標點)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예수처럼 이라는 확실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지속적 으로 유지시켜 주는 것이 새벽별 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통치를 받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새벽별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만국을 심판하고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 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솔로몬 왕에게 두 여 인이 찾아와 한 아이를 놓고 송사를 벌입니다. 서로가 제자식이라는 것 입니다. 이때에 솔로몬은 진실을 밝히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미궁의 사건도 진리에 매인자 앞에서는 모두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현재적으로는 장애자이며 노동자이지만 텔레비전의 뉴스 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수다에서 , 동료의 푸념에서 그 행동 양식이 하나님의 것이냐 세상 것이냐 심판을 하고 다스립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떤 분 은 개똥같은 소리 마라 방구석에 앉아 정치를 심판한들 무슨 소용이고 이 웃집 여자의 거짓말을 판단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 이야말로 개똥같은 소리하지 마십시오. 현재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사건과 환경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 국의 영광을 꿈꾸고 있습니까 매일같이 애굽을 꿈꾸며 가나안에 들어가 기를 바라느냐 말입니다. 애굽의 솥에 고기가 그립습니까 부추가 먹고 싶습니까 그러면 애굽의 신에게로 돌아가십시오. 그런 것들에게는 관심 도 없는 하나님 붙잡고 빵달라 고기 달라 조르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적 내가 진리 통치 받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 에서 먹던 고기가 먹고 싶고 부추가 먹고 싶고 따뜻한 방안에서 편히 누워 보고 싶다는 생각 그 자체를 버리고 불기둥 구름 기둥이 가라는 대로 가고 서라는 대로 서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 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을 미 리 아는 사람 그야말로 이심전심이(以心傳心)되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일 된 의사성, 단일된 목적성이 나오는 신앙 인의 인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랬을 때에 그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 이 신앙, 이 믿음의 자세를 원하신 단 말입니다. 이 공통되고 단일된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평생 동안 집 한 칸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매맞아 죽으면 어떻고 있는 재산 다 날리면 어 떻습니까! 집 한 칸 없어도 매맞아 죽어도 있는 재산 날려도 그 사건환경 을 통해서 천국의 영광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만 깯다고 느끼고 알 고 키워 나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도 싫다고 한 세상만국의 영광을 뭐 하러 꿈꾸며 살고 있습니까 뭐 하러 지상천국을 꿈꾸며 잘사는 놈은 잘사는 놈대로 못사는 놈은 못사는 놈대로 눈에다 불을 켜느냐 말 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세벨을 처단합니다. 그러나 그 처단하는 죄목이 율법적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 고 사회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로서 심판하고 다스리지 못한 채 인위 적이고 인본적인 것으로 심판을 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는 뽑지 못한 채 나무만 자른 것과 같습니다. 독버섯의 종균과 토양 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독버섯만 따낸 것과 같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뿌리에서 싹이 나고 독버섯은 종균에서 돋아납니다. 그래서 다른 장소 다 른 위치 다른 모양으로 되살아 나 이세벨의 망령은 우리 성도의 정신 세계 를 지배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본질 을 외면한 채 결과만 가지고 심판하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결과론적 사고에 매여 예수를 믿게 되면 성경 에서 보는 신앙의 선배들이 갔던 우매한 신앙의 길을 고스란히 되밟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솥 단지와 텃밭의 부추를 꿈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다 광야 에서 죽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옛 사람의 패역으로 바위를 쳤던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을 성도의 구원사로 볼 때 100 이라는 수치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고작 2이라는 수치입니다. 우리는 경악할 이 상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제 2의 출애굽을 하는 우리는 어쩌면 2라는 수치마저 도 들고 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발람의 교훈에 빠지고 , 이세벨의 교훈에 빠지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 고 불타 없어질 세상것(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만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 를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서 이탈한 모든 개념의 소산은 세상이다.) 만들고 가꾸느라고 가지고 갈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자기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 되어 신앙을 지키고 밖으로는 세상 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될 수 있 으며 더 나가 천하만국을 심판하며 다스릴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부분적으로 여러분은 그 권세를 누 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권세 있는 자가 발로 밟으면 깩소리 못하고 죽을 위인들이지만 그래도 새벽별이 주는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릴 권세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푯대 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그 권세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큰 통치자일까 부처 예수 알라 성경은 큰 통치자의 개념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참 여호와 하나님이신 여호와요 또 하나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피지배자인 인간은 둘 중에 어느 쪽 이든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여기서 다원주의 시각으로 보일 염려가 있어 미리 밝히는바 마귀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자는 하나님 한 분밖 에 없으시다.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성도의 구원을 위해 마귀는 호응 (呼應)하는 존재이다. 이를 대립적 호응(對立的 呼應)이라고 한다. 마귀도 하늘의 태양이나 바다의 바람과 같이 성도의 구원에 이용되는 이용물에 불 과하다. 다만 통치 생존본능의 존재인 인간은 어느쪽이든 선악간(善惡間) 소속되게 되어 있으며 이 소속 개념으로 볼 때 통치권이 양분되는 현상으 로 보일 뿐이다.) 이제 질문 한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의 통치를 받고 계 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이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은 신분(身分)상 명분(名分)상 가지고 있는 이름일 뿐입니다. 구한말 이 나라 백성이 말로는 조선 사람이지만 실질적 으로는 일본의 지배와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1) 만국을 다스려라 고려가 망한 이유를 여러 가지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무신 정치(武臣 政治)입니다. 정치를 할 만한 실력도 없는데 누구누구의 힘을 등에 없고 정치를 하다 보니 그 자는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주관이 없고 실력도 없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고인 물은 썩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해하지 못할 말씀한 구절을 듣습니다. 본문에 말하기를 예수만 잘 믿으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빽으로 황제쯤은 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나 나나 집안에서 안사람에게나 큰소리 치고 이 불 속에서나 힘쓸 줄 알지 황제자리에 앉혀 놓으면 오줌 싸며 도망칠 필 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만국을 다스릴 황제의 보좌에 앉힌 다 그것이 천국이겠습니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예수님 앞에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대뜸 하는 말이 돌덩이로 빵을 만들라고 하더니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3:8-9]]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믿음의 보상으로 마귀가 보여준 천하 만국과 영광을 꿈꾸고 있 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말인데도 [[만국을 다스 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을 만국을 다스릴 부귀공명 이라는 세상 영광적 개념으로 이해를 해 버리고 믿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목에다 핏대 세우실 분들 많으실 겁니다. 아니라고 그 무슨 말이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열변 을 토하실 것입니다. 또 실지로 그렇게 믿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니 김 집사는 기와집 박 목사는 초가집에 살더라 하는 말이 왜 나옵니 까 우리가 하도 집 없는 세상에 사니까 천국에 가서라도 좋은 집에 살고 자 하는 소망이 이런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그렇게들 믿고 있습니다. 전국에 가면 금은보석이 산 처럼 쌓이고 아버지의 집에는 날마다 연 락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 가면 좋은 집에 살고 호화롭게 연락하고 하는 그것이 구원의 본질입니까 천국에 가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까 만국을 다스릴 권세라는 말은 실질적 통치 권이 아니라 통치권을 비유로 든 구원 계시입니다.
A)통치권으로 비유된 구원 계시 앞서 누가 세상에서 제일 큰 통치자냐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연관지어 생각해 봅시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란 통치 자적 개념입니다. 그러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은 무관한 것인가 세상의 통치 개념으로는 유관한 것입니다. 현군(賢君)이든 폭군(暴君)이든 그 권세를 가지고 누리는 영광은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암시적(暗示的) 개념 은 다분히 세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사람이 되어 진리로서 만국 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세상 만국의 모든 일과 사건을 볼 때에 그것이 진리 적인 사건이냐 비 진리 적인 사건이냐 하는 것과 그것이 구원에 이로운 것 이냐 무익한 것이냐 하는 것-보다는 권세를 누리는 영광에 그 관심이 집 중되어 있습니다. 한때 고려를 지배했던 원(元)나라는 고려의 왕통을 이을 왕자를 자기의 나라로 데려가 자기 나라 공주와 결혼을 시키기고 원나라의 교육을 시켜 원나라의 사람을 만들어서 고려의 왕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왕들 중 우리가 잘 아는 왕이 공민왕입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보잘것없는 반도의 작은 나라의 분봉 왕을 삼는데도 철저하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왕으로 봉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할 생명을 다스리고 양육할 성도들의 왕을 아무나 시키겠느냐 말입니다. 다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물론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하나님이 개똥을 보고 이것은 사과다 라고 말씀하 시면 ㉮ 아멘. 개똥은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사과입니다. ㉯ 아멘. 눈으로 보기에는 개똥이지만 사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사과입니다. ㉰ 아멘. 지금은 개똥이나 주님이 역사 하시면 개똥이 사과로 변할 줄 믿습니다. ㉱ 아멘. 개똥을 사과나무에 뿌리면 사과나무는 그 양분을 먹고 사과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과를 주심은 우리가 이것을 먹고 더 욱더 주님과 단일된 의사성(意思性-뜻하는 바와 생각하는 성분-)으로 더욱더 믿음을 키우라는 뜻이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어떤 믿음의 조건과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겠느냐 말입니다. 당연히 당신의 뜻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그저 맹목적으로 개똥이 사과라고 하면 개똥이 사과 인줄 믿는 미련 밥 통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을 맡기겠습니까 과정과 순서와 목적은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믿기만 하고 심부름이 나 하는 덜떨어진 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을 맡기겠습니 까 마른 하늘에 비가 오고 한밤중에 해가 뜨는 기적이나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게으르고 의타적인 무능력한 사람에게 천하보다 귀한 성도의 영적 생명 을 맡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개똥이 사과다 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하신 속뜻을 바로 알고 개똥을 주서다 사과나무 밑에 뿌리고 잡초를 뽑고 가지치기를 하고 해충을 잡으며 물을 주어서 사과가 열리도록 하는 사람, 이런 신앙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성경에 어디 있냐고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안 살고 다 윗이 그렇게 안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사과가 열릴 수 있도록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과나무를 동산에 심어 놓으시고 개가 길가에 개똥을 싸도록 해 놓으시고 성도 나에 게는 다만 그 똥을 주서다 사과나무에 뿌리고 사과 나무를 가꾸는 일을 주 셨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왜 주셨느냐 그냥 사과가 열리게 하 지 사과나무를 가꾸고 땀을 흘리면서 얻는 그 기쁨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자로 성장시키며 느끼는 그 기쁨의 동질성을 느끼 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인격적 교제라고 합니다. 이 교제를 통 해서 만이 거듭난 영의 생명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개똥을 먹으면 죽습니다. 그와 마찬 가지로 진리를 먹도록 창조된 영은 하나님과 진리적 인격성의 교제를 할 때만이 성장을 합니다.
B)진리로 다스려라 다스린다는 것은 타(他)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품은 그릇된 욕심 충동 감정 등등의 심리적 행동을 억제하고 컨트롤하는 것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왕이 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 왕이 되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교훈을 먹어서 우상에게 절하고 그와 음 탕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두아디라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었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절하고 그의 하수에서 나오는 물로 온갖 음탕한 짓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 전부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적 어도 앞으로 남아 있는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아 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 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 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 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하리라]] 당신에게 주님의 요구 사항이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적 생명으로 너 자신을 다스려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헌금의 조건도 없고 봉사의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 나를 창조하여 이 땅에 살도록 하여서 예수를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하여 장차 올 세상에서 영광을 주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이 아닌 것들을 철저하게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세살 짜리 아이는 작은 고무공 하나 들기가 힘이 들지만 이 아이가 무럭 무럭 장성하면 축구 선수도 될 수 있고 럭비 선수도 될 수 있습니다. 현 재적 믿음은 작지만 그 믿음은 얼마 던지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얻어지는 부산물이 아닙니다. 본 문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여러분이 얼마나 진리를 붙잡고 사느냐 그 진리를 지키느냐 하는 노력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주님이 주신 그 구원을 붙잡고 지키며 사시겠습니까 그 결정은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는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2)새벽별이 주는 소망 이제 여러분들은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 야 하느냐 여러분, 지금까지 이 어두운 세상을 무엇을 보고 살았습니까 혹시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침이 밝기를 기다 리며 살았습니까 세상에 얽매여 살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호되게 야단을 치십니다. 그래서 아차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고 생각을 해서 이제는 바로 살아야 겠구나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인가 하고 답을 구합니다. 이 답은 이론적으로 지난날과 같이 살지 않으면 됩니다. 또 그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자면 수도승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 거나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숨어살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 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한 여전히 돈을 벌어야 먹 고살고 자식은 칭얼거리고 여편네들 입방아는 소문에 소문을 만들고 속에 서는 울화가 치밉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갖은 모함과 모욕이 억누르고 구속합니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면 착하게 살 나를 쿡쿡 찌릅니다. 일곱 번씩 일 흔 번을 참으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만 없었다면 죽여도 몇 놈은 죽였을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망 칠 수가 없습니다. 도망쳐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여기서 어 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A)새벽 어느 시인이 가을에 봄을 말했습니다. 가을에게 봄이 없다면 그 가을은 쓸쓸하고 슬프겠지만 가을에게는 겨울 넘어 봄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가을은 쓸쓸하지만 도 슬프지만 도 않다는 것이 그 시인의 노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녁이 되어 밤이 되면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아마도 대개의 분들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아침이 있기 때문에 밤이 무섭다거나 슬프다거나 절망스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벽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새벽이란 희망을 뜻합니다. 안락한 방안에서 마누라 옆에 끼고 잠든 사람에게야 새벽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관심조차 없지만 긴 여행을 떠나 광야에 있는 사람은 밤새도록 추 위와 짐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에 새벽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따뜻한 방안에 있으나 내일에 대한 소망이 가득찬 사람은 밤잠을 자지 않고 새벽 을 기다립니다.
B)별 새벽 별이란 금성을 말합니다. 해질녘 동쪽 하늘에 나타나 해뜰 녘 서 쪽 하늘에 떠 있는 별, 이는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본문의 주제를 요약하면 [[잡아라 지켜라 이기는 너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 별을 주겠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이 성도 나 를 창조한 목적으로 잡고 그 영광을 지키면 하나님이 만국을 다스릴 권세 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진리)으로서 심판하여 옥과 돌을 가르며 참과 거짓을 가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낱 필부에 불과하고 동네에서 수다떠는 여편네에 불과한 내가 여러분이 그 엄청난 세상 유혹과 힘의 논리 앞에 무엇으로 맞설 수 있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새벽별이 주는 소망이며 신뢰 며 확신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광야의 무서운 밤이든 포근한 이불과 안락 한 침대와 사랑스런 아내가 있던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진 자는 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새벽별을 보며 아침을 기다립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 앙 자세를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 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 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0-14]]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 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2:12-14]] 현실 세계에 만족하는 자이든 불만족 하는 자이든 누구에게나 미래는 있 고 또한 그 미래는 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개념이나 이해 혹은 확신도 제 각 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 확쪑퓬봉버리고 공통되고 단일된 미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지표점(指標點)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예수처럼 이라는 확실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지속적 으로 유지시켜 주는 것이 새벽별 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통치를 받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새벽별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만국을 심판하고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 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솔로몬 왕에게 두 여 인이 찾아와 한 아이를 놓고 송사를 벌입니다. 서로가 제자식이라는 것 입니다. 이때에 솔로몬은 진실을 밝히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미궁의 사건도 진리에 매인자 앞에서는 모두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현재적으로는 장애자이며 노동자이지만 텔레비전의 뉴스 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수다에서 , 동료의 푸념에서 그 행동 양식이 하나님의 것이냐 세상 것이냐 심판을 하고 다스립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떤 분 은 개똥같은 소리 마라 방구석에 앉아 정치를 심판한들 무슨 소용이고 이 웃집 여자의 거짓말을 판단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 이야말로 개똥같은 소리하지 마십시오. 현재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사건과 환경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 국의 영광을 꿈꾸고 있습니까 매일같이 애굽을 꿈꾸며 가나안에 들어가 기를 바라느냐 말입니다. 애굽의 솥에 고기가 그립습니까 부추가 먹고 싶습니까 그러면 애굽의 신에게로 돌아가십시오. 그런 것들에게는 관심 도 없는 하나님 붙잡고 빵달라 고기 달라 조르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적 내가 진리 통치 받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 에서 먹던 고기가 먹고 싶고 부추가 먹고 싶고 따뜻한 방안에서 편히 누워 보고 싶다는 생각 그 자체를 버리고 불기둥 구름 기둥이 가라는 대로 가고 서라는 대로 서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 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을 미 리 아는 사람 그야말로 이심전심이(以心傳心)되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일 된 의사성, 단일된 목적성이 나오는 신앙 인의 인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랬을 때에 그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 이 신앙, 이 믿음의 자세를 원하신 단 말입니다. 이 공통되고 단일된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평생 동안 집 한 칸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매맞아 죽으면 어떻고 있는 재산 다 날리면 어 떻습니까! 집 한 칸 없어도 매맞아 죽어도 있는 재산 날려도 그 사건환경 을 통해서 천국의 영광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만 깯다고 느끼고 알 고 키워 나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도 싫다고 한 세상만국의 영광을 뭐 하러 꿈꾸며 살고 있습니까 뭐 하러 지상천국을 꿈꾸며 잘사는 놈은 잘사는 놈대로 못사는 놈은 못사는 놈대로 눈에다 불을 켜느냐 말 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세벨을 처단합니다. 그러나 그 처단하는 죄목이 율법적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 고 사회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로서 심판하고 다스리지 못한 채 인위 적이고 인본적인 것으로 심판을 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는 뽑지 못한 채 나무만 자른 것과 같습니다. 독버섯의 종균과 토양 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독버섯만 따낸 것과 같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뿌리에서 싹이 나고 독버섯은 종균에서 돋아납니다. 그래서 다른 장소 다 른 위치 다른 모양으로 되살아 나 이세벨의 망령은 우리 성도의 정신 세계 를 지배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본질 을 외면한 채 결과만 가지고 심판하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결과론적 사고에 매여 예수를 믿게 되면 성경 에서 보는 신앙의 선배들이 갔던 우매한 신앙의 길을 고스란히 되밟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솥 단지와 텃밭의 부추를 꿈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다 광야 에서 죽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옛 사람의 패역으로 바위를 쳤던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을 성도의 구원사로 볼 때 100 이라는 수치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고작 2이라는 수치입니다. 우리는 경악할 이 상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제 2의 출애굽을 하는 우리는 어쩌면 2라는 수치마저 도 들고 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발람의 교훈에 빠지고 , 이세벨의 교훈에 빠지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 고 불타 없어질 세상것(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만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 를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서 이탈한 모든 개념의 소산은 세상이다.) 만들고 가꾸느라고 가지고 갈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자기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 되어 신앙을 지키고 밖으로는 세상 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될 수 있 으며 더 나가 천하만국을 심판하며 다스릴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권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부분적으로 여러분은 그 권세를 누 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권세 있는 자가 발로 밟으면 깩소리 못하고 죽을 위인들이지만 그래도 새벽별이 주는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릴 권세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푯대 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그 권세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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