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시다 (렘29:11-13)
본문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비한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영의 세계에는 흔히 말하는 악천사와 선한 천사가 있습니다. 악천사, 즉 귀신은 악한 일만 하러 돌아다니고, 선한 천사는 선한 일만 합니다.
그런데 악한 귀신, 악령은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나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혼돈과 무질서를 가져오게 하고, 폭도를 일으키는 일들을 한다. 뿐만아니라, 가정과 개인의 심령에는 불안과 두려움, 미움, 시기, 음란, 원망, 불평 등을 일으켜서 인간의 심성을 완악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고, 나아가서는 개인의 심성을 악하게 만드는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이런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속이 상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면서 다투지 말고, 단지 마음속으로 악한 영이 침투했음을 분별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만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 나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시켜 주십니다.
복음을 두루 전하며 돌아 다니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이 창조 당시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창1:2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김씨나 박씨나 최씨 가문이 다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모습은 자기 부모님들을 그대로 닮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간이 자기의 부모를 닮듯이, 외형적인 모습은 육체의 모습을 닮았지만 내적인 영의 모습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후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자행했습니다. 악의 영들이 좋아하는 일들만 행한 것입니다.
이 악의 영이 물러가야만 개인이나 가정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입니다(요14:27).
세상적인 소유나 어떤 조건의 여하에 따라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남모르는 기쁨과 평안의 생수가 넘쳐 흐르는 기쁨입니다(요7:38). 이런 기쁨은 바로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아갔을 때 얻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명칭으로 ‘페닉스 디스오드’ 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장애에 해당되는 병인데, 80년대만해도 이런 환자가 많이 일어 났고, 근래에도 점점 이런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병이란 악화가 되기도 하고 점점 회복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장애’라는 것은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못쓰게 된 것을 말합니다. 재생시킬 수도 없고,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장애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장애는 더욱 의학적으로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 장애의 두드러진 증상은 성격이 포악해져서 말과 행동이 포악하게 변하고, 술에 도취되어 알콜 중독이 되어 버리고, 인격이 완전히 파탄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져서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통해서도 되지 아니하고,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증상이 오기 쉽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영계의 세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에 육의 세계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닦아 놓은 기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명예나 권세, 부동산, 증권. 등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 지니까 그것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얼마든지 이런 것 때문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인간 육체의 고깃 덩어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맛있고 영양 있는 것을 섭취하기도 합니다. 이 육체는 먹을 것이 있고 따뜻하고 배부르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적인 것을 추구하고 책이나 교육을 통하여 이성을 살찌웁니다. 그리고는 이성을 통하여 육체를 지배하며 살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과 촛점이 맞아서 그 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혼은 이성과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은 죽은 것과 같다고 야고보서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약2:26).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럽고 남편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생명이 끊어지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죽으면 이내 돌아서고, 잊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죽습니다(롬6:23). 영이 없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에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쌍씩 들어갔다고 했는데, 여기서 육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창7:15). 영이 없는 육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영이 없으면 동물성 적인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식 기능이 있고, 감각을 느끼지만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의 좋은 소식, 기쁜 소식, 즉 말씀이 전하여 지면. 우리 안에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어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에 어린아이들이 벙끗 벙끗 웃는 것만으로도 부모님들은 좋아 합니다. 그러나 사람 구실을 하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오줌 똥을 다 가릴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제구실 하기까지 성숙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들으면, 영적으로 성장을 가져 옵니다. 어떤이는 말씀을 듣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결단을 하고, 무릎을 치면서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 져 가는 단계입니다.
점점 더 지나면 장부다운 믿음을 소유합니다. 어린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님을 위해서 할 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창조 당시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영혼이 잘됨과 같이 육신이 강건하고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이루시는 것입니다(요삼1:2). 할렐루야!
둘쨰로, 평안과 소망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본문 렘29:11절 말씀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웬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쁜 소식이나 좋은 소식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쁨은 이세상을 이별할 때 없어지고, 세상의 종말과 함께 다 없어질 것 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쁜 소식은 영혼의 참 살맛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2차대전 말기에 독일군들이 영국군들을 잡아서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포로 수용소’라는 곳은 보급도 나쁘고, 환경이나 여건들이 열악하고, 썪은 빵이나 주는 곳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지옥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기술자 한 사람이 여러가지 부속들을 주워서 라디오를 만들어 몰래 뉴스를 청취하고 세계정세를 자꾸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에 뉴스를 듣다가,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하며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자 얼마나 기쁘고 감격된 사건인지 옆에 자는 동료들을 깨웠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옆사람이 그 옆사람을, 또 그 옆사람을. 마구 흔들어 깨워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서 잠을 더 자야 되는데, 하도 깨워서 겨우 눈을 뜹니다.
“이봐, 연합군이 승리했대! 이젠 시간 문제야!.” 하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귀가 번쩍 뜨이고, 온 몸에 힘이 생기는 것 같고, 마음에는 솟구쳐 올라오는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식사가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뉴스 한마디 들었는데, 정신이 번쩍나고 힘이 생기고, 얼굴에 화색이 돌고, 살 맛이 나게 된 것입니다.
철조망은 여전히 쳐 있고, 보초병은 여전히 있는데. 희망이 있고 기쁜 것입니다. 바로 복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켜 ‘복음’이라 합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실패의 쓴잔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이 우리 안에 들려 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인 감격은 미래에 약속하신 평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서 소망을 잃고 걱정 근심을 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제라도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말씀대로 깨닫고 돌아서면 재앙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고 전할 때, 말씀을 듣던 백성들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불안했던 영혼들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창조 당시에 혼돈하고 무질서하던 자연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육지와 바다가 있으라!”고 명하시니 질서있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날에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즉, 혼돈의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정상으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심히 혼란하고 혼돈가운데 있지만, 정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제 그가 남은 인생은 어려움과 혼돈만 남았습니다. 우물속에 던져진 인생이라 죽을날만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웅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셔서 그를 꺼내 주셔서 소망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도 그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셔서 그 시험을 이기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옥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셔서 혼돈속에서도 평안이 임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 올리셔서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라고 하는 거인이 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면. 혼돈과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을지라도 고개를 들게 하시고 존귀한 인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광의 권속들은 어찌하든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므로, 혼돈하고 어지러웠던 모든 일들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 시켜 주셔서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악한 귀신, 악령은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나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혼돈과 무질서를 가져오게 하고, 폭도를 일으키는 일들을 한다. 뿐만아니라, 가정과 개인의 심령에는 불안과 두려움, 미움, 시기, 음란, 원망, 불평 등을 일으켜서 인간의 심성을 완악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고, 나아가서는 개인의 심성을 악하게 만드는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이런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속이 상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면서 다투지 말고, 단지 마음속으로 악한 영이 침투했음을 분별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만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 나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시켜 주십니다.
복음을 두루 전하며 돌아 다니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이 창조 당시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창1:2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김씨나 박씨나 최씨 가문이 다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모습은 자기 부모님들을 그대로 닮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간이 자기의 부모를 닮듯이, 외형적인 모습은 육체의 모습을 닮았지만 내적인 영의 모습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후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자행했습니다. 악의 영들이 좋아하는 일들만 행한 것입니다.
이 악의 영이 물러가야만 개인이나 가정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입니다(요14:27).
세상적인 소유나 어떤 조건의 여하에 따라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남모르는 기쁨과 평안의 생수가 넘쳐 흐르는 기쁨입니다(요7:38). 이런 기쁨은 바로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아갔을 때 얻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명칭으로 ‘페닉스 디스오드’ 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장애에 해당되는 병인데, 80년대만해도 이런 환자가 많이 일어 났고, 근래에도 점점 이런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병이란 악화가 되기도 하고 점점 회복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장애’라는 것은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못쓰게 된 것을 말합니다. 재생시킬 수도 없고,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장애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장애는 더욱 의학적으로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 장애의 두드러진 증상은 성격이 포악해져서 말과 행동이 포악하게 변하고, 술에 도취되어 알콜 중독이 되어 버리고, 인격이 완전히 파탄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져서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통해서도 되지 아니하고,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증상이 오기 쉽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영계의 세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에 육의 세계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닦아 놓은 기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명예나 권세, 부동산, 증권. 등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 지니까 그것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얼마든지 이런 것 때문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인간 육체의 고깃 덩어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맛있고 영양 있는 것을 섭취하기도 합니다. 이 육체는 먹을 것이 있고 따뜻하고 배부르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적인 것을 추구하고 책이나 교육을 통하여 이성을 살찌웁니다. 그리고는 이성을 통하여 육체를 지배하며 살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과 촛점이 맞아서 그 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혼은 이성과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은 죽은 것과 같다고 야고보서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약2:26).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럽고 남편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생명이 끊어지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죽으면 이내 돌아서고, 잊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죽습니다(롬6:23). 영이 없는 상태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에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쌍씩 들어갔다고 했는데, 여기서 육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창7:15). 영이 없는 육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영이 없으면 동물성 적인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식 기능이 있고, 감각을 느끼지만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의 좋은 소식, 기쁜 소식, 즉 말씀이 전하여 지면. 우리 안에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어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에 어린아이들이 벙끗 벙끗 웃는 것만으로도 부모님들은 좋아 합니다. 그러나 사람 구실을 하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오줌 똥을 다 가릴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제구실 하기까지 성숙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들으면, 영적으로 성장을 가져 옵니다. 어떤이는 말씀을 듣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결단을 하고, 무릎을 치면서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 져 가는 단계입니다.
점점 더 지나면 장부다운 믿음을 소유합니다. 어린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님을 위해서 할 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창조 당시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영혼이 잘됨과 같이 육신이 강건하고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이루시는 것입니다(요삼1:2). 할렐루야!
둘쨰로, 평안과 소망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본문 렘29:11절 말씀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웬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쁜 소식이나 좋은 소식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쁨은 이세상을 이별할 때 없어지고, 세상의 종말과 함께 다 없어질 것 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쁜 소식은 영혼의 참 살맛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2차대전 말기에 독일군들이 영국군들을 잡아서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포로 수용소’라는 곳은 보급도 나쁘고, 환경이나 여건들이 열악하고, 썪은 빵이나 주는 곳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지옥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기술자 한 사람이 여러가지 부속들을 주워서 라디오를 만들어 몰래 뉴스를 청취하고 세계정세를 자꾸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에 뉴스를 듣다가,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하며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자 얼마나 기쁘고 감격된 사건인지 옆에 자는 동료들을 깨웠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옆사람이 그 옆사람을, 또 그 옆사람을. 마구 흔들어 깨워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서 잠을 더 자야 되는데, 하도 깨워서 겨우 눈을 뜹니다.
“이봐, 연합군이 승리했대! 이젠 시간 문제야!.” 하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귀가 번쩍 뜨이고, 온 몸에 힘이 생기는 것 같고, 마음에는 솟구쳐 올라오는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식사가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뉴스 한마디 들었는데, 정신이 번쩍나고 힘이 생기고, 얼굴에 화색이 돌고, 살 맛이 나게 된 것입니다.
철조망은 여전히 쳐 있고, 보초병은 여전히 있는데. 희망이 있고 기쁜 것입니다. 바로 복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켜 ‘복음’이라 합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실패의 쓴잔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이 우리 안에 들려 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인 감격은 미래에 약속하신 평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서 소망을 잃고 걱정 근심을 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제라도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말씀대로 깨닫고 돌아서면 재앙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고 전할 때, 말씀을 듣던 백성들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불안했던 영혼들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창조 당시에 혼돈하고 무질서하던 자연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육지와 바다가 있으라!”고 명하시니 질서있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날에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즉, 혼돈의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정상으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심히 혼란하고 혼돈가운데 있지만, 정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제 그가 남은 인생은 어려움과 혼돈만 남았습니다. 우물속에 던져진 인생이라 죽을날만 기다리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웅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셔서 그를 꺼내 주셔서 소망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도 그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셔서 그 시험을 이기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옥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셔서 혼돈속에서도 평안이 임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 올리셔서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라고 하는 거인이 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면. 혼돈과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을지라도 고개를 들게 하시고 존귀한 인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광의 권속들은 어찌하든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므로, 혼돈하고 어지러웠던 모든 일들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 시켜 주셔서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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