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1 (갈6:7-16)
본문
I. 본문의 위치 이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그 앞 부분을 이해하지 않 고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갈라디아 지방 에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을 향하여 매우 격한 어조로 편지를 썼다. 믿음 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의 복음을 받고 잘 자라던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이, 바울의 어떤 방문 직후에, 밖에서 온 어떤 반동분자들의 충동을 받고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동시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들의 선 동에 귀가 솔깃해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위 기에 직면했다는 사실과, 자기 자신의 해산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될 위기를 느끼면서 다급한 심정과 격분한 감정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조리 있게, 논리 정연하게, 갈라디아 교인들과 그 반 동자들을 설복, 논박, 공격하고 자신의 사도직과 자기가 전한 복음의 진리 성과 정당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거의 표준적인 수사학적 스타일을 사용하여 설득력 있는 글을 썼다.
수사학에서 말하는 세 가지 종류 (변호의 말 Rhetoric of Defence, 심사 숙고의 말 Rhetoric of Deliberation, 논증의 말 Rhetoric of Demonstration) 중에서 첫째 종류 즉 변증적 방법으로 논박해 나간다. 특히 법정에서 논술할 때 적인 말 Introduction 에 이어 사실을 서술하 고 Narrative, 이론을 전개하고 Argument, 증거를 대고 Proof, 을 맺는다 Conclusion . 바울은 거의 같은 양식으로 갈라디아서를 꾸민 것 같다. Introduction 1:1-11 인사 1:1-5 공격 1:6-11 이야기 Narrative 1:12-2:14 사건의 요약 2:15-21 논증 Arguments 3:1-6:10 증거 Proofs 3:1-4:31 논박 5:1-6:10 Conclusion 6:11-18 (David L. Barr, An Introduction:New Testament Story, 98)
바울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을 자아낸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는 것이다.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다시 논증 확립한 바울은 자연히, 그렇게 된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유를 얻은 사람의 삶은 방종이 아니라 사랑을 원칙으로 하는(5:13-15) 것이어야 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5:16-26)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준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세밀한 행동 규범을 지시한다. 우리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행동 강령의 일 부분이다. 구원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사람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그려 주는 것 중의 일 부분이다.
II. 본문 비평 이 단락은 본문비평적 문제가 별로 없는 대목이다. 두 가지만 취급하기로 한다.
(10절 ) 착한 일을 하되라는 말의 한다는 말의 원문이 사본에 따라 네 가지 종 류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르가조-메타라는 현재 가정법 중간태 일인칭 복수형으로 나오는 사본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본에는 에르카조메타라는 현재 직설법 중간태 일인칭 복수로, 어떤 사본에는 에르가소-메타라는 단순과거 가정법 중간태형으로 나오고, 또 어떤 사본에는 에르가소메타라는 미래직설법 중간태형으로 나타난다. 그 여러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이나 교부들의 인용을 비교해 볼 때
첫째를 지지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권위가 있고 무게가 있다.
넷째를 지지하는 사본은 소문자 사본 둘(1912,2464) 밖에 없으며,
셋째를 지지하는 사본은 대문자 사본 P46과 K뿐이고 일과표 596과 5세기 초의 교부 Severian이다.
둘째를 지지하는 것은 대문자 사본과 몇 개의 소문자 사본들이다. 그러나
첫째를 지지하는 것들은 대문자 사본를 비롯해서 많은 소문자 사본,고대 역본, 교부들의 인용이 있다.
(15절 ) 우데 가르로 시작하는 사본과 엔 가르 크리스토 예수 우데로 나오는 사본으로 분류된다. 즉 후자는 엔 크리스토 예수(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더 들어가 있고 그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간주된다.
III. 주 해 (7절 ) 스스로 속이지 말라 (메 플라나스테).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하여 빗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팥을 심었으니 팥이 나오리 라고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창조자가 정한 자연 원칙인 것을 알아야 하는데, 팥에서 콩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믿는 다면,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런 착각도 하고 오산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농락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즉 팥을 심어 놓고 하나님더러 콩이 나오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을 제 손에 넣고 자 기 뜻대로 부려먹으려는 행동이다. 팥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팥에서 팥을 내신다. 하나님이 정신이 혼미하시거나, 원칙이 없으시거나, 원칙을 잊으 셔서, 팥을 콩으로 알고 잘못 결실을 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에게 농락을 당하시는 일이 없다. 선을 심었으면 선을 거둘 것이고 악을 심었으면 악을 거둘 것이 확실하다. 구원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 에로 구출되는 것 (saved to…)을 의미한다.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릇되게 생각하고 무원칙적 사고를 하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원칙에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
(8절 ) 삶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서 묘사했다. 하나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라고 했는데 실은 육체에다 심는다(스페이레인 에이스 텐 사르 카)는 말이다. 씨를 땅에다 심는 것처럼 육체라는 밭에다가 심는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이다. 그것도 성령에다 심는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절에서는 어떤 종자를 심느냐를 따지는데 8절에서는 어디에다 심느냐를 따진다. 여기에 육체와 성령을 대조하고 있다. 즉 육체에다 심는자의 반대로 성령에다가 심는 자를 대립시킨 것이다. 죄 있는 인간을 사르크스라고 본다면, 사르크스에다가 종자를 뿌린다는 것은 죄 있는 인간 속에 씨를 뿌린다는 말이 된다. 썩은 인간 속에 아무리 좋은 씨 를 심어도 결국 썩은 것이 나오고 말 것이다. A × 0 0 인 것처럼 죄에다 무엇을 심든지 썩은 것(프토란)이 나오게 마련이다. 반대로 성령에다가 씨를 뿌리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 속에서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9절 )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해서 창조된 자들이다(엡2:10). 구원 받은 사람 은 성령에다가 좋은 종자를 뿌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마침내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성도는 선한 일을 하면서 낙 심하지 말자 (메 엥카코멘). 일인칭 복수 가정법 동사로써 권면을 하고 있다.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은 땀이 나고 수고스러운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안된다. 끝까지 버티고 참아야 한다. 때가 이르리니(카이로 이디오). 추수는 아무때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카이로스)가 되어야 비로소 알곡이 익고 추수가 가능한 것이다. 곡식이 자라고 익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어김없이 콩에서 콩을 내어 주신다. 아니 성령에다 심은 사람들에게 엄청난(30배,60배,100배) 배수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신다.
(10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합시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카이로스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계획한 때를 가질 수도 있지만, 운명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 로스를 사람이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카이로스에 처해 있다. 모든 사람 에게 선을 행하자.
에르가조메타는 현재 중간태 가정법 일인칭 복수 동사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권하고 있다. 즉선한 일을 계속해서 행합시다라고 권하 고 있다. 한 번만 하고 만다든가, 하다가 말다가 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 하라는 뜻이 있다. 누구에게나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본분이다.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프로스 투스 오이케이우스 테스 피스테오스는 가정 단위로 선을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식구 하나 하나를 단위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한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에 게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식구끼리 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식구를 사랑할 줄 모른다든지 사랑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식구끼리의 참된 사랑은 세상을 향한 빛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끼리의 선행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이상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윤리를 말하고 나서 바울은 끝으로 다 시금 앞에서 역점을 두고 논쟁한 할례 문제를 들고 나오며 결정적인 최후 의 펀치를 먹인다.
(11절 )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대필을 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의 손으로 서명을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에 게 바울의 글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독자들에 대한 자기의 정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을 대서특필(大書特筆)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가죽을 다루는 천막 제조업은 바울의 손을 투 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가늘게 작게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을 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의 글임을 나타내려고 특별히 큰 글자로 썼을 수도 있다.
(12절 )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모양 을 내려 하는 자들이다. 즉 인간적인 면에서 체면을 지킬 뿐 아니라 남들 에게 자기의 얼굴을 나타내고 칭찬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남들에게 특히 유대주의자들에게 욕 먹는 일을 싫어 하는 사람들이다.
(13절 ) 할례 받는 사람들이 남달리 할례는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외적 흔적을 몸에 지닌 것일 뿐, 율법을 더 잘 지키게 된다든지 그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가 받은 할례를 이방인들에게도 받게 하여 동류(同 類)를 얻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 뿐이다.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인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매우 조리 있게, 논리 정연하게, 갈라디아 교인들과 그 반 동자들을 설복, 논박, 공격하고 자신의 사도직과 자기가 전한 복음의 진리 성과 정당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거의 표준적인 수사학적 스타일을 사용하여 설득력 있는 글을 썼다.
수사학에서 말하는 세 가지 종류 (변호의 말 Rhetoric of Defence, 심사 숙고의 말 Rhetoric of Deliberation, 논증의 말 Rhetoric of Demonstration) 중에서 첫째 종류 즉 변증적 방법으로 논박해 나간다. 특히 법정에서 논술할 때 적인 말 Introduction 에 이어 사실을 서술하 고 Narrative, 이론을 전개하고 Argument, 증거를 대고 Proof, 을 맺는다 Conclusion . 바울은 거의 같은 양식으로 갈라디아서를 꾸민 것 같다. Introduction 1:1-11 인사 1:1-5 공격 1:6-11 이야기 Narrative 1:12-2:14 사건의 요약 2:15-21 논증 Arguments 3:1-6:10 증거 Proofs 3:1-4:31 논박 5:1-6:10 Conclusion 6:11-18 (David L. Barr, An Introduction:New Testament Story, 98)
바울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을 자아낸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는 것이다.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다시 논증 확립한 바울은 자연히, 그렇게 된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유를 얻은 사람의 삶은 방종이 아니라 사랑을 원칙으로 하는(5:13-15) 것이어야 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5:16-26)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준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세밀한 행동 규범을 지시한다. 우리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행동 강령의 일 부분이다. 구원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사람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그려 주는 것 중의 일 부분이다.
II. 본문 비평 이 단락은 본문비평적 문제가 별로 없는 대목이다. 두 가지만 취급하기로 한다.
(10절 ) 착한 일을 하되라는 말의 한다는 말의 원문이 사본에 따라 네 가지 종 류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르가조-메타라는 현재 가정법 중간태 일인칭 복수형으로 나오는 사본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본에는 에르카조메타라는 현재 직설법 중간태 일인칭 복수로, 어떤 사본에는 에르가소-메타라는 단순과거 가정법 중간태형으로 나오고, 또 어떤 사본에는 에르가소메타라는 미래직설법 중간태형으로 나타난다. 그 여러 읽기를 지지하는 사본이나 역본이나 교부들의 인용을 비교해 볼 때
첫째를 지지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권위가 있고 무게가 있다.
넷째를 지지하는 사본은 소문자 사본 둘(1912,2464) 밖에 없으며,
셋째를 지지하는 사본은 대문자 사본 P46과 K뿐이고 일과표 596과 5세기 초의 교부 Severian이다.
둘째를 지지하는 것은 대문자 사본과 몇 개의 소문자 사본들이다. 그러나
첫째를 지지하는 것들은 대문자 사본를 비롯해서 많은 소문자 사본,고대 역본, 교부들의 인용이 있다.
(15절 ) 우데 가르로 시작하는 사본과 엔 가르 크리스토 예수 우데로 나오는 사본으로 분류된다. 즉 후자는 엔 크리스토 예수(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더 들어가 있고 그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간주된다.
III. 주 해 (7절 ) 스스로 속이지 말라 (메 플라나스테).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하여 빗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팥을 심었으니 팥이 나오리 라고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창조자가 정한 자연 원칙인 것을 알아야 하는데, 팥에서 콩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믿는 다면,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런 착각도 하고 오산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농락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즉 팥을 심어 놓고 하나님더러 콩이 나오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을 제 손에 넣고 자 기 뜻대로 부려먹으려는 행동이다. 팥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팥에서 팥을 내신다. 하나님이 정신이 혼미하시거나, 원칙이 없으시거나, 원칙을 잊으 셔서, 팥을 콩으로 알고 잘못 결실을 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에게 농락을 당하시는 일이 없다. 선을 심었으면 선을 거둘 것이고 악을 심었으면 악을 거둘 것이 확실하다. 구원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 에로 구출되는 것 (saved to…)을 의미한다.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릇되게 생각하고 무원칙적 사고를 하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원칙에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
(8절 ) 삶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해서 묘사했다. 하나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라고 했는데 실은 육체에다 심는다(스페이레인 에이스 텐 사르 카)는 말이다. 씨를 땅에다 심는 것처럼 육체라는 밭에다가 심는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이다. 그것도 성령에다 심는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절에서는 어떤 종자를 심느냐를 따지는데 8절에서는 어디에다 심느냐를 따진다. 여기에 육체와 성령을 대조하고 있다. 즉 육체에다 심는자의 반대로 성령에다가 심는 자를 대립시킨 것이다. 죄 있는 인간을 사르크스라고 본다면, 사르크스에다가 종자를 뿌린다는 것은 죄 있는 인간 속에 씨를 뿌린다는 말이 된다. 썩은 인간 속에 아무리 좋은 씨 를 심어도 결국 썩은 것이 나오고 말 것이다. A × 0 0 인 것처럼 죄에다 무엇을 심든지 썩은 것(프토란)이 나오게 마련이다. 반대로 성령에다가 씨를 뿌리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 속에서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9절 )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해서 창조된 자들이다(엡2:10). 구원 받은 사람 은 성령에다가 좋은 종자를 뿌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마침내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성도는 선한 일을 하면서 낙 심하지 말자 (메 엥카코멘). 일인칭 복수 가정법 동사로써 권면을 하고 있다.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은 땀이 나고 수고스러운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안된다. 끝까지 버티고 참아야 한다. 때가 이르리니(카이로 이디오). 추수는 아무때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카이로스)가 되어야 비로소 알곡이 익고 추수가 가능한 것이다. 곡식이 자라고 익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어김없이 콩에서 콩을 내어 주신다. 아니 성령에다 심은 사람들에게 엄청난(30배,60배,100배) 배수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신다.
(10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합시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카이로스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계획한 때를 가질 수도 있지만, 운명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 로스를 사람이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카이로스에 처해 있다. 모든 사람 에게 선을 행하자.
에르가조메타는 현재 중간태 가정법 일인칭 복수 동사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권하고 있다. 즉선한 일을 계속해서 행합시다라고 권하 고 있다. 한 번만 하고 만다든가, 하다가 말다가 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 하라는 뜻이 있다. 누구에게나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본분이다.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프로스 투스 오이케이우스 테스 피스테오스는 가정 단위로 선을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식구 하나 하나를 단위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한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에 게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식구끼리 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식구를 사랑할 줄 모른다든지 사랑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식구끼리의 참된 사랑은 세상을 향한 빛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끼리의 선행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이상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윤리를 말하고 나서 바울은 끝으로 다 시금 앞에서 역점을 두고 논쟁한 할례 문제를 들고 나오며 결정적인 최후 의 펀치를 먹인다.
(11절 )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대필을 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의 손으로 서명을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에 게 바울의 글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독자들에 대한 자기의 정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을 대서특필(大書特筆)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가죽을 다루는 천막 제조업은 바울의 손을 투 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가늘게 작게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을 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의 글임을 나타내려고 특별히 큰 글자로 썼을 수도 있다.
(12절 )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모양 을 내려 하는 자들이다. 즉 인간적인 면에서 체면을 지킬 뿐 아니라 남들 에게 자기의 얼굴을 나타내고 칭찬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남들에게 특히 유대주의자들에게 욕 먹는 일을 싫어 하는 사람들이다.
(13절 ) 할례 받는 사람들이 남달리 할례는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외적 흔적을 몸에 지닌 것일 뿐, 율법을 더 잘 지키게 된다든지 그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가 받은 할례를 이방인들에게도 받게 하여 동류(同 類)를 얻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 뿐이다.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인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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