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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주 (히2:9-10)

본문

영감 받은 히브리서 저자는 한 영광의 선구자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분을 가리켜 히브리서 6장 20절에는 「앞서 가신 예수」 곧 프로드로모스(προδρομο)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선구자 알케고스(ρχηγο)가 있습니다.
I. 주(ρχηγο=archegos)의 의미와 용례들
히브리서 2장 10절에 「구원의 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타난 ‘주’란 알케고스 즉
1 창시자 혹은 창설자, 창립자
2 개시자
3 개척자
4 선구자 5 근원자 6 대장(지휘관) 등의 의미들입니다.
이 말의 단순한 의미는 우두머리 또는 장(長)을 뜻했습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저들이 믿는 제우스(Zeus)신을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알케고스)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지휘관 곧 군대의 장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혹은 한 마을을 설립한 자에게나, 한 가족(門)을 이룬 자에게나(시조), 어떤 철학의 학파를 창시한 자에게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알케고스(主)는 기원이나 근원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 말이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될 때 훌륭한 정부의 장관은 평화의 알케고스라고 부르고, 나쁜 장관은 혼란의 알케고스(主)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용법을 가진 당시 알케고스를 나타내는 의미들 중에 공통된 요소가 있었습니다.
첫째, 알케고스(主)라는 것은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러 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컨대 마을일 경우 훗날에 그곳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길과 터를 닦아 놓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철학의 학파인 경우에는 후배들이 그가 발견한 진리와 평화의 길을 따라 올 수 있도록 앞서 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둘째, 알케고스(주)라는 것은 축복이나 형벌의 창시자로서 남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 또는 뒤따르는 자들을 위해 선도(先導)의 불을 치켜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컨대 배 한 척이 좌초했을 경우에 선객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밧줄을 가지고 해변까지 헤엄쳐 가서 그 밧줄을 육지의 쇠기둥에 매어 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 밧줄을 붙잡고 해안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 제일 먼저 밧줄을 잡고 해안으로 건너간 자는, 안전과 구원의 알케고스(主)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타난 주(알케고스)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선구자, 개척자, 창시자, 근원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Ⅱ. 예수는 우리의 알케고스(ρχηγο=주)입니다.
성경 곳곳에 예수께서 우리의 알케고스가 되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경우 예수는 생명의 주(알케고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5절에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한 성경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중에 나타난 성령의 표현입니다. 여기에 「주」는 알케고스(ρχηγο) 곧 생명의 창조주(근원)를 말합니다. 사도는 예수를 생명의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천지창조의 주였습니다(요 1:1-18, 히 1:2, 골 1:14-20).
2. 두 번째 경우 예수를 왕자(王者), 곧 임금과 구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31절에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임금(ρχηγο)은 왕자(王者) 곧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구주(σωτρα)는 구세주를 뜻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알케고스’라고 함으로 그가 부활의 첫 임금이 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선구자적 왕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3. 세 번째 경우 ‘구원의 주’(ρχηγο τ σωτρα)라고 하였습니다(히 2:10).
구원의 원천자, 구원의 개시자, 구원의 선구자란 뜻입니다. 구원의 선봉장이란 뜻입니다.
4. 네 번째 경우 ‘믿음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주’란 말도 알케고스(ρχηγο)인데, 예수는 우리 믿음의 근원, 믿음의 창설자라는 뜻입니다. 앞서서 인도하는 믿음의 선구자란 뜻입니다. 그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본질이란 뜻입니다.
이 모든 경우를 종합하면 예수는 제1창조(처음 창조)의 근원자요(생명의 주), 예수는 제2창조의 근원자(구원의 주)요, 예수는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임금, 선구자)요, 예수는 우리 믿음의 근원(근거, 창시자)이라는 사실입니다.
Ⅲ. 알케고스(主)와 고난의 필연성
히브리서 2장 10절은, 예수는 우리 구원의 알케고스(主)가 되기 위하여 필연적인 고난과 관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새로 번역하면 「자기를 위하여 만물이 있게 하시고(창조주) 자기를 위하여 만물이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통치와 섭리의 주)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창조주이자 만물의 통치와 섭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아들, 곧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영광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알케고스(主)인 예수로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심이 합당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자구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아들이신 예수의 고난이 필연적이요, 목적적이요, 계획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구원의 알케고스(근원)가 됨에 있어서 필연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그 아들의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알케고스와 고난의 필연성이 관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가
히브리서 2장 9절 중에 「…죽음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 하반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사람」은 10절에 나타난 「많은 아들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할 택자들,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눅 19:9-10, 히 2:16).

그렇다면 우리 구원의 근거(알케고스)는 예수의 고난, 곧 죽으심과 직결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의 죽으심의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 바로 이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근원=알케고스)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계획하신 최대, 최고, 최종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 이것이 고난의 실체요, 우리 구원의 근원(알케고스)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어떠한 죽음입니까
1. 맛보는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장 9절 하반절에 「…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단순히 십자가상에서 만부득이 하여 죽음을 당하심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비참한 내막, 고통스러운 진상(眞相)을 실제로 경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웨스트코트(Westcott)는 말하기를 ‘사람은 죽음을 당하되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죄하심으로 죽음을 당하실 때 그 비절, 참절한 의미를 아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진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자진하여 맛보는 죽음이었습니다. 몸으로 친히 맛보는 육체적 죽음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어떠한 죽음을 당하실 것을 미리 알고 맛보는 죽음이었습니다. 예기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여러 번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마 16:21).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고 하였습니다.
미리 알고 맛보는 죽음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한평생 죽음을 맛보면서 살아가신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히브리서 2장 9절 하반절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을 위하여」란 실제로 ‘각 사람을 위하여’라고 번역함이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인 구원이 아니고, 우리 개인 개인을 상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인류 중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1 누구든지
2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지
3 어느 때 사는 사람이든지 막론하고 그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버린 모든 사람이었습니다(갈 3:27, 28). 바로 히브리서 2장 16절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 창조가 개인적이었습니다. 인생 타락도 개인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인생 타락 후 심판인 죽음도 개인적이었습니다.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르게 출생하고, 다른 시간에 다른 양태로 죽습니다. 이와같이 인생 구원도 개인적입니다. 그럼에도 구원받을 자는 전세기적이고 전우주적이기 때문에 온 세상 인류가 되고, 만민이 되고, 모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였습니다.
3.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다시 말하기를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많은 아들들」이 누구인가 여기 「많은 아들」이란 아담의 많은 ‘자손’이란 말인데, 한 아들 예수와 대조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아들’이란 앞에서 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히 2:16) 곧, 구원받기로 작정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부터 나온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들(계 7:9)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인을 받은 시온의 십사만사천인들을 가리킵니다(계 7:4, 14:1).
저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한다’ 함은 곧 구원의 천국에로 들어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십자가 고난의 필연적 목적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14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의 구원(건져냄)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기 위하여 구속 곧 죄사함이 필연적으로 주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 십자가 대속의 필연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 구원의 주, 구원의 근원, 구원의 선구자, 구원의 대장, 구원의 창시자가 됨이 하나님의 필연적인 뜻이요, 목적이요, 계획이라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통치와 섭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의 주(알케고스)가 되게 하심이 합당한 일이었다는 히브리서의 영감을 듣고 보았습니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떤 운명적인 필연성이거나 도덕적 필연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자의적(自意的) 결정 때문에 당연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주권 의지의 계획을 따라 오래 전에 결정되었고, 또 그대로 반드시 성취되려고 역사상에 이 일이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고난의 당연성, 필연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본질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맛보는 십자가의 고난이요, 많은 사람의 대속물(대신 값을 지불함)이 되는 속가의 죽음이요, 그 결과로 많은 아들들이 영광에 들어가게 하려는 목적적 죽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우리 구원의 대장이요, 창시자요, 근원이 됩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의 주(알케고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만이 인류가 범한 죄의 삯인 사망의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행 4:12, 요 14:6).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 신자들의 출발이 있고, 진행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의미요, 목적이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근거요 근원이요 시작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 사죄의 근원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의 근원이요, 우리 부활의 시작이요, 천국 입성의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고백이 없는 기독 신자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고백이 없는 기독교회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없는 복음 선교란 위선 중의 위선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개인과 역사의 새 분수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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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4. 10.(예수 정사 기념 예배)
예수 최후의 날
-마태복음 27:45-50-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날들 가운데 가장 최악의 날이 있었습니다. 아니 비할 데 없는 지상 최대의 비극의 날이었기도 합니다.
아니 그날은 창조이래, 이 세상의 날들 가운데 가장 영광의 날이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날이 있은 후 2000년 세월이 흐르고 지상의 온갖 역사의 사연들이 쌓여 과거로 사라지는 가운데도, 그날의 그 사건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사라질 줄 모르고 살아 있습니다.
아니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고, 그날이 있은 후 지금까지 그날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지상의 사람들은 그날을 자기 날의 분기점으로 삼고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 정사(釘死)의 날, 곧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며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 밤 우리 모두는 예수 정사 기념 예배로 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 마태복음 27장 50절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절에도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영감의 기록은 반복해서 말해 주기를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하였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 최후의 날!
I. 이 날은 지상 최대의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죽음은 비극의 상징입니다. 아니 죽음은 비극의 본체요 실체입니다. 그것은 죄의 삯인 사망입니다. 바울은 이 죽음을 가리켜서 썩는 것이요, 사망의 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54-56). 아니 이 죽음을 가리켜서 멸망 받을 원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6).
가정에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날은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슬픔의 날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는 날은 부모에게 슬픔과 고통의 날입니다. 아내가 죽는 날은 남편에게, 남편이 죽는 날은 아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슬픔과 고통을 실어 주는 날입니다. 친구의 죽음은 또 다른 친구들에게 슬픔을 안겨 줍니다.
더 나아가 나라님(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날은 온 백성이 슬퍼합니다. 그래서 국상(國喪)이라고 이름하게 됩니다. 영웅의 죽음, 호걸의 죽음, 가인의 죽음, 재사의 죽음… 등 여러 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죽음이 만인의 것인 것처럼 그 죽음 때문에 맞는 비극도 만인의 것이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의 죽음은 특이한 죽음이었습니다. 죄없는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니 죄를 지으실 수도 없고, 죄를 모르시는 무죄하신 그가 죽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삯(롬 6:23)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죄와 상관없으신 분이었는데, 죄의 값으로 받을 죽음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 스스로가 예견하고 있었던 죽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3절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3년의 전도 공생애를 보내면서 수없이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영감을 통하여 말하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24). 바울은 말하기를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빌 2:7, 8).
그의 죽음은 저주를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죄없으신 그 분이 마땅히 죄인들이 받을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지상 최대의 비극이요 슬픔의 날입니다. 만인의 구주가 돌아가신 날은 만인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돌아가신 오늘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저 하늘의 태양마저도 그 빛의 기능을 잃고 캄캄해 버렸습니다(마 27:4
5).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당하는 비극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십자가 형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였습니다.
Ⅱ. 이 날은 지상 최대의 대속의 날, 곧 속전의 날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죗값을 하나님께 대신 지불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에게 사망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사망은 육신의 사망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들어가는 형벌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정죄와 심판과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롬 5:15). 또한 사람 예수 곧 마지막 아담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18). 그의 의의 행동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범죄로 말미암아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6-10).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0:4
5). 여기 대속물이란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지불되는 몸값, 혹은 속전(贖錢)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신 지불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에는 그 대속물의 성질을 가리켜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피가 우리의 죗값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피흘림이 없으면 사유함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혈의 피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주셨다(딛 2:14)고 하였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최후의 날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죗값인 사망을 완전히 대신 지불하는 날이 아닌가! 예수께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날이 아닌가! 말하자면 대속의 날, 속전의 날이 아닌가!
Ⅲ. 이 날은 지상 최대의 영광의 날입니다.
그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속죄의 성취가 완성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돌아가신 이 날은 모세의 율법의 요구가 성취된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죄인에게 사망을 요구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범죄한 인류에게 선언한 공의의 법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날입니다.
또한 이날은 모든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날입니다. 구약 여러 시대의 예언자들은 인류의 메시야가 대속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저들 예언의 주제가 메시야의 대신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더욱이 모세의 율법의 요구와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속죄가 완성되고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고 성취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속죄 성취의 개가를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최후의 날은 지상 최대의 영광의 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인류의 숙적인 사망 문제를 해결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 노르웨이 어느 도시에는 지금도 ‘양의 교회’라고 하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 양 그림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를 처음 지을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예배당 공사를 다 끝맺고, 제일 마지막 교회당 종탑을 높이 세우는 작업이 한창 계속 중이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때 마침 양치기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가 그 종탑공사 현장 밑으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높은 종탑 위에서 일하고 있던 한 공인(工人)이 발을 잘못 디디는 실수로 미끄러져 모든 사람들이 “아!” 하며 소리를 지르는 순간 벌써 종탑 위에서 아스팔트가 깔린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그는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몰려들었는데, 잠시 후 그는 죽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면서 그 사람을 쳐다보는 순간 바로 그 아스팔트 바닥에는 한 마리 양이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양치기가 한 무리의 양떼를 이끌고 그 밑을 지나가던 순간에 떨어진 그 공인(工人)의 몸이 정확히 한 마리의 양 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살아난 사람이나 그것을 목도한 모든 교인들은 그 양이 사람의 죽음을 대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새 예배당 이름을 ‘양의 교회’라고 부르고, 그 교인들은 그 양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하여 그 종탑 밑에 양을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최후의 날을 기억합니다. 이날은 지상 최대의 비극의 날이라고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상 최대의 속전(贖錢)의 날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는 속가(贖價), 속전(贖錢)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날은 지상 최대의 영광의 날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예수 믿는 신자 치고 주님 돌아가시는 이 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잊기는커녕 기억하고 좋아하며 감사하고, 죄를 회개하며, 감사의 경배를 드립니다. 알고 보면 이 날은 내 개인 생의 신기원이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상의 교회 출생의 신기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역사의 신기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최후의 날은 내 개인과, 교회와, 인류 역사의 새 시작의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밤 우리와 세계에 산재하는 모든 기독 신자들이 그 십자가 밑에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서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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