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는 비결 (엡4:16)
본문
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 A.)는 인간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유형은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무익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거미는 줄을 쳐놓고 거기에 걸리는 곤충만을 잡아먹습니다. 사람이 되어 거미처럼 무위도식하니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유형은 개미 같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기도하고 열심히 살지만 이기적입니다. 지극히 나만 알고 나의 이익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셋째 유형은 꿀벌같은 사람입니다. 열매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꿀을 얻을 뿐더러 그 꿀을 남에게 제공합니다.
더구나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다니면서 꽃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나에게도 이롭게 살지만 남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이바지합니다. 이렇듯 효율 있는 삶을 열매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공유하며 공존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야만 살수 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쓰고 들어왔습니다. 주로 독재자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마는 말이야 옳은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가 되면 이기고 분열되면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통일, 연합, 단결, 총화, 협동 너도나도 하나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위한 하나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됨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는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숙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의 소중한 의미를 모르기에 끝내 하나되지 못합니다.
둘째는 하나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득불 양보해야 되고 희생해야 됩니다.
그러나 희생하며 지불하는 값과 하나되지 못해서 받게 되는 손해를 비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좀 참아야 되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해서 야기되는 엄청난 손해에 비하면 그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점을 모르기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정이 깨어짐으로 받게 되는 엄청난 손해를 안다면 어떤 고통이든 참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기에 결국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분이 전체 안에 존재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다고 칩시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를 한번 부분적으로 이해해봅시다. 줄을 따로 떼어내고 망치를 떼어내고 케이스마저 떼어내봅니다. 이렇게 다 떼어놓으면 아이들의 장난감도 못됩니다.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보통 2만 개의 부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각각의 부속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비로소 자동차가 완성됩니다. 이러한 부속들을 따로따로 떼어놓는다면 이것들 또한 쓸모 없는 물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될 때에 그 각각도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고 화합할 때에 개성도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요즘은 '개성의 시대'라 하여 너도나도 툭하면 개성을 내세우는 추세입니다 마는 전체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개성을 내세워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합리적 이해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면 분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됨은 하나의 구조나 조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묶어놓아도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위의 동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론도 아닙니다. 구성이나 의식의 획일성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교육적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이나 견해의 완전한 일치란 되지도 않거니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취미가 같고 생각이 같고 의견이 같고 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마는 약간씩 다르게 사는 것이 더 재미가 있어서 좋습니다. 다양한 것을 굳이 하나로 만들어보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영원한 진리에 근거하며 미래지향적인 목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서로 필요 불가결하다는 유기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눈에 코가 필요하고 입에 눈이 필요하며 손에 발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유기적 관계 안에서 서로의 존재가치를 바로 인식할 때에 하나됨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영적인 일치, 무형적인 통일, 내적인 화합을 깊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절)"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근본적인 신앙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일깨웁니다. 이것이 소명적인 일치요 구원론적인 통일이요 종말론적인 화합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한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자들의 행동이 참으로 거칠고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불과 세 사람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몽둥이도 총도 없지만 100여 명을 충분히 다스립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은 정신병자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정신병자는 두 사람의 의견도 합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자는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한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돌아다니니까 그를 따라다니던 다른 정신병자가 "내가 너를 언제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냐" 하더랍니다 나밖에 모릅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입니다.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정신병자가 된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그럴진대 그것을 세상에서 알아줍니까 스스로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갈등이 생기고 맙니다. 마음속에 분열이 생겨서 마침내 가정도 사회도 그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D똕TXT표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되는 기본철학(basic philosophy)으로 네 가지의 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철학입니다.
첫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조차 하나되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교만에 내리는 심판이 분열입니다.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 애써도 교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하나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들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둘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라 함은 쓸 수 있는 힘과 말을 행사하지 않고 전체의 큰 목적과 큰 덕을 위하여 스스로 제어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하지 않습니다. 내 돈이라고 마음대로 쓰지 않습니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다 가지 않습니다.
전체를 생각해서 스스로 제어할 줄 압니다. 얼마 전 신문에도 여러 차례 난 이야기입니다. 수해로 일년 농사를 망친 농군이 시름에 잠겨 논두렁에 넋 놓고 앉아 있는데 한쪽에서는 돈 깨나 있는 부자가 골프를 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조리한 광경입니다. 그 상황에 골프를 쳤다고 하여 감옥 갈 일은 아닙니다마는 그렇다고 하여 그렇게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수해를 만난 그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제어할 줄 아는 그 세계에 하나됨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여 마음대로 지껄여놓고, 내 돈이라고 하여 마음대로 흥청망청 쓰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가진 자유를 제어할 줄 알며, 강함이 약함을 위해 제어할 줄 알며, 지식이 어리석음을 위해 제어할 줄 아는 데에 하나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셋째로,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간혹 술취한 남편과 싸우다가 얻어맞고 찾아오는 부인들이 있습니다. 술이 깰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것을 그 동안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를 찾아와 본들 좋은 소리를 들을 리가 없습니다.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참음이 없습니다. 인내함이 없습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저의 집에 손녀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라고 해봐라." 제가 말을 시켜봅니다. 그러면 "하브이"하고 비슷한 발음을 냅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에는 '아빠'라고도 말하고 급할 때면 '엄마'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야 이놈아, 너는 족보도 모르느냐"하고 나무라는 시늉을 합니다. 대놓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은 상대가 미숙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미숙한 자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전적인 인내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불같은 성격의 남편을 두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못된 남편인데,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그럭저럭 잘 살아갑니다. "저런 남편과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습니까 저 성격을 어떻게 참고 살아갑니까" 누가 동정을 할라치면 "막내아들 하나 더 둔 셈치지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마음씨입니다. 제가 거기에 좋은 증거를 덧붙여주었습니다. "원래 심리학적으로 남자는 여자 앞에서 네 살이라고 합니다. 그저 네 살배기가 하나 더 있거니 생각하세요." 여러분, 미숙한 자에게는 참아주어야 합니다. 실수가 있다면 몰라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가 있고야 하나됨이 가능합니다.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누구를 비판할 것입니까
넷째로, 서로 용납하여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라--이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우리 교인들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무엇입니까" 제 곁에 오래 계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저는 이 찬송을 가장 좋아합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찬송가는 바로 349장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이 말씀이 그다지도 은혜될 수가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해봅시다. 지금 내 모습에서 50퍼센트 더 정결하게 하여 오라고 하면 못 갑니다. 더 의로워져서 나를 만나러 오라고 하면 하나님 앞에 못나갑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 더는 나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장래를 약속하고 조건부로 영접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이대로'이어야 합니다. 교인 가운데에 아내는 예수를 믿고 그 남편은 믿지 않는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남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이러합니다. "여보, 당신도 교회 나가요.알았소. 나가야지 뭐.
그런데 난 술을 버리지 못해 못나가겠구려. 술 마시면서 교회에 나갈 수는 없잖소괜찮아요.
내가 목사님께 특별 허가를 받아 놓을께요. 당신만은 술 먹으면서 교회에 나가도 되도록 할 테니 꼭 나갑시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내 모습 이대로'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 아버지가 조건을 걸었습니까 과거를 물었습니까 내가 손해본 돈의 절반을 가져오라고 했다면 탕자는 못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 방탕한 모습, 그 더러운 모습을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 용납하는 덕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됨에는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됨은 본래적인 것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레 하나가 되자 어쩌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동질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별스럽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같은 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점을 극대화하면서 살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점을 부각시키고 같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그 겉 사람은 똑같습니다. 인격도 같습니다. 그러나, 외모가 다릅니다. 생각도 좀 다릅니다. 따져보면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점이 근본적입니다. 같은 점을 많이 생각할수록 하나될 수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인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학벌도 다르고, 취미도 다릅니다. 다 다른 것 같지만 다 같은 사람입니다. 다 같이 죽고, 다 같이 늙고, 다 같이 묘지에 묻히고, 다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다 같이 하나님나라에 갈 것입니다. 같은 점이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나서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나눕니다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 할 것 없이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죄인이요 다같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포토맥(Potomac) 강을 끼고 남군과 북군이 대치하여 진을 쳤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쪽에서 군가를 부릅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도 군가를 부릅니다. 양쪽에서 서로 질세라 목청을 드높이어 부릅니다. 밤의 정적은 이미 깨졌습니다. 여러 가지 노래를 다투어 부르다가, 어느 순간 한쪽에서 '홈, 스윗 홈(Home, sweet home)'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그러자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하고 강 건너 저쪽에서도 따라 부릅니다. 서로 대치하여 싸우고 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질성의 회복입니다. 같은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됨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정적인 난제에 부딪칩니다. 옛 부터 내려오는 귀족 개념이 있습니다. 양반 상놈을 구분하는 가치관--별것도 아닌 것이 엄청난 문제가 됩니다. 미안스럽습니다마는 어릴 적에 저는 아버지로부터 못된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양반이 다섯 있다, 무슨 성 무슨 성, 이 다섯은 양반이고 그 나머지는 다 보통 사람이다, 그리고 무슨 성은 백정이고 무슨 성은 상놈이다, 그러니 그 집의 아이들과는 놀면 안 된다--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보니 정치가, 학자로 출세한 사람들 가운데에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던 천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옛날 같으면 저 사람 백정의 자손인데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빨리 잊어야 합니다. 스스로 양반이라며 큰소리치는 사람의 족보를 자세히 검토해 보았더니 여섯 번째 첩의 아들이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사회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양반은 원래 부자들이 만든 계층입니다. 재물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존경받고 싶고, 다시 본질적으로 존경을 받고 싶어져서 '우리는 피가 다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답니다. 사람이란 한치도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잘못된 개념이 하나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어느 기능에서, 어떤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본래적인 것과 근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이 동질성을 확실히 알고 재인식하여 극대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됨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미래적으로 볼 때에 종말이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죽어야 하고 다같이 썩어야 합니다. 공동묘지에 가보면 큰 비석을 세워놓은 무덤, 작은 비석을 세워놓은 무덤, 비석마저 없는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시체가 들어있음이 같습니다. 썩어져 흙이 된다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부질없이 묘지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점을 생각해본다면 거기에 장식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다같이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운명이 하나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말씀으로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하나입니다. 진리로 하나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의 백성 된 신분으로 하나입니다. 종말적 운명이 하나입니다. 본문에서는 일곱 가지가 하나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 곧 만유의 아버지는 만물을 통일케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본래가 하나요 장차도 하나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소한 이질적 요소를 극대화하면서 교만하거나 절망한다면 되겠습니까 다 부질없습니다. 언젠가 이 점을 뉘우치고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미 하나입니다. 벌써 하나이므로 이제 하나됨의 뜻을 바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그리하면 비로소 하나됨의 평화가 있고, 하나됨의 은혜가 있고, 하나됨의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승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첫째 유형은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무익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거미는 줄을 쳐놓고 거기에 걸리는 곤충만을 잡아먹습니다. 사람이 되어 거미처럼 무위도식하니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유형은 개미 같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기도하고 열심히 살지만 이기적입니다. 지극히 나만 알고 나의 이익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셋째 유형은 꿀벌같은 사람입니다. 열매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꿀을 얻을 뿐더러 그 꿀을 남에게 제공합니다.
더구나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다니면서 꽃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나에게도 이롭게 살지만 남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이바지합니다. 이렇듯 효율 있는 삶을 열매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공유하며 공존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야만 살수 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쓰고 들어왔습니다. 주로 독재자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마는 말이야 옳은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가 되면 이기고 분열되면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통일, 연합, 단결, 총화, 협동 너도나도 하나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위한 하나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됨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는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숙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의 소중한 의미를 모르기에 끝내 하나되지 못합니다.
둘째는 하나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득불 양보해야 되고 희생해야 됩니다.
그러나 희생하며 지불하는 값과 하나되지 못해서 받게 되는 손해를 비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좀 참아야 되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해서 야기되는 엄청난 손해에 비하면 그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점을 모르기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정이 깨어짐으로 받게 되는 엄청난 손해를 안다면 어떤 고통이든 참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기에 결국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분이 전체 안에 존재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다고 칩시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를 한번 부분적으로 이해해봅시다. 줄을 따로 떼어내고 망치를 떼어내고 케이스마저 떼어내봅니다. 이렇게 다 떼어놓으면 아이들의 장난감도 못됩니다.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보통 2만 개의 부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각각의 부속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비로소 자동차가 완성됩니다. 이러한 부속들을 따로따로 떼어놓는다면 이것들 또한 쓸모 없는 물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될 때에 그 각각도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고 화합할 때에 개성도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요즘은 '개성의 시대'라 하여 너도나도 툭하면 개성을 내세우는 추세입니다 마는 전체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개성을 내세워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합리적 이해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면 분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됨은 하나의 구조나 조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묶어놓아도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위의 동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론도 아닙니다. 구성이나 의식의 획일성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교육적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이나 견해의 완전한 일치란 되지도 않거니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취미가 같고 생각이 같고 의견이 같고 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마는 약간씩 다르게 사는 것이 더 재미가 있어서 좋습니다. 다양한 것을 굳이 하나로 만들어보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영원한 진리에 근거하며 미래지향적인 목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서로 필요 불가결하다는 유기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눈에 코가 필요하고 입에 눈이 필요하며 손에 발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유기적 관계 안에서 서로의 존재가치를 바로 인식할 때에 하나됨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영적인 일치, 무형적인 통일, 내적인 화합을 깊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절)"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근본적인 신앙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일깨웁니다. 이것이 소명적인 일치요 구원론적인 통일이요 종말론적인 화합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한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자들의 행동이 참으로 거칠고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불과 세 사람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몽둥이도 총도 없지만 100여 명을 충분히 다스립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은 정신병자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정신병자는 두 사람의 의견도 합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자는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한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돌아다니니까 그를 따라다니던 다른 정신병자가 "내가 너를 언제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냐" 하더랍니다 나밖에 모릅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입니다.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정신병자가 된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그럴진대 그것을 세상에서 알아줍니까 스스로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갈등이 생기고 맙니다. 마음속에 분열이 생겨서 마침내 가정도 사회도 그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D똕TXT표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되는 기본철학(basic philosophy)으로 네 가지의 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철학입니다.
첫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조차 하나되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교만에 내리는 심판이 분열입니다.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 애써도 교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하나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들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둘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라 함은 쓸 수 있는 힘과 말을 행사하지 않고 전체의 큰 목적과 큰 덕을 위하여 스스로 제어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하지 않습니다. 내 돈이라고 마음대로 쓰지 않습니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다 가지 않습니다.
전체를 생각해서 스스로 제어할 줄 압니다. 얼마 전 신문에도 여러 차례 난 이야기입니다. 수해로 일년 농사를 망친 농군이 시름에 잠겨 논두렁에 넋 놓고 앉아 있는데 한쪽에서는 돈 깨나 있는 부자가 골프를 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조리한 광경입니다. 그 상황에 골프를 쳤다고 하여 감옥 갈 일은 아닙니다마는 그렇다고 하여 그렇게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수해를 만난 그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제어할 줄 아는 그 세계에 하나됨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여 마음대로 지껄여놓고, 내 돈이라고 하여 마음대로 흥청망청 쓰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가진 자유를 제어할 줄 알며, 강함이 약함을 위해 제어할 줄 알며, 지식이 어리석음을 위해 제어할 줄 아는 데에 하나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셋째로,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간혹 술취한 남편과 싸우다가 얻어맞고 찾아오는 부인들이 있습니다. 술이 깰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것을 그 동안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를 찾아와 본들 좋은 소리를 들을 리가 없습니다.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참음이 없습니다. 인내함이 없습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저의 집에 손녀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라고 해봐라." 제가 말을 시켜봅니다. 그러면 "하브이"하고 비슷한 발음을 냅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에는 '아빠'라고도 말하고 급할 때면 '엄마'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야 이놈아, 너는 족보도 모르느냐"하고 나무라는 시늉을 합니다. 대놓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은 상대가 미숙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미숙한 자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전적인 인내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불같은 성격의 남편을 두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못된 남편인데,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그럭저럭 잘 살아갑니다. "저런 남편과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습니까 저 성격을 어떻게 참고 살아갑니까" 누가 동정을 할라치면 "막내아들 하나 더 둔 셈치지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마음씨입니다. 제가 거기에 좋은 증거를 덧붙여주었습니다. "원래 심리학적으로 남자는 여자 앞에서 네 살이라고 합니다. 그저 네 살배기가 하나 더 있거니 생각하세요." 여러분, 미숙한 자에게는 참아주어야 합니다. 실수가 있다면 몰라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가 있고야 하나됨이 가능합니다.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누구를 비판할 것입니까
넷째로, 서로 용납하여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라--이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우리 교인들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무엇입니까" 제 곁에 오래 계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저는 이 찬송을 가장 좋아합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찬송가는 바로 349장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이 말씀이 그다지도 은혜될 수가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해봅시다. 지금 내 모습에서 50퍼센트 더 정결하게 하여 오라고 하면 못 갑니다. 더 의로워져서 나를 만나러 오라고 하면 하나님 앞에 못나갑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 더는 나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장래를 약속하고 조건부로 영접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이대로'이어야 합니다. 교인 가운데에 아내는 예수를 믿고 그 남편은 믿지 않는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남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이러합니다. "여보, 당신도 교회 나가요.알았소. 나가야지 뭐.
그런데 난 술을 버리지 못해 못나가겠구려. 술 마시면서 교회에 나갈 수는 없잖소괜찮아요.
내가 목사님께 특별 허가를 받아 놓을께요. 당신만은 술 먹으면서 교회에 나가도 되도록 할 테니 꼭 나갑시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내 모습 이대로'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 아버지가 조건을 걸었습니까 과거를 물었습니까 내가 손해본 돈의 절반을 가져오라고 했다면 탕자는 못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 방탕한 모습, 그 더러운 모습을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 용납하는 덕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됨에는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됨은 본래적인 것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레 하나가 되자 어쩌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동질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별스럽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같은 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점을 극대화하면서 살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점을 부각시키고 같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그 겉 사람은 똑같습니다. 인격도 같습니다. 그러나, 외모가 다릅니다. 생각도 좀 다릅니다. 따져보면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점이 근본적입니다. 같은 점을 많이 생각할수록 하나될 수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인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학벌도 다르고, 취미도 다릅니다. 다 다른 것 같지만 다 같은 사람입니다. 다 같이 죽고, 다 같이 늙고, 다 같이 묘지에 묻히고, 다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다 같이 하나님나라에 갈 것입니다. 같은 점이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나서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나눕니다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 할 것 없이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죄인이요 다같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포토맥(Potomac) 강을 끼고 남군과 북군이 대치하여 진을 쳤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쪽에서 군가를 부릅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도 군가를 부릅니다. 양쪽에서 서로 질세라 목청을 드높이어 부릅니다. 밤의 정적은 이미 깨졌습니다. 여러 가지 노래를 다투어 부르다가, 어느 순간 한쪽에서 '홈, 스윗 홈(Home, sweet home)'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그러자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하고 강 건너 저쪽에서도 따라 부릅니다. 서로 대치하여 싸우고 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질성의 회복입니다. 같은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됨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정적인 난제에 부딪칩니다. 옛 부터 내려오는 귀족 개념이 있습니다. 양반 상놈을 구분하는 가치관--별것도 아닌 것이 엄청난 문제가 됩니다. 미안스럽습니다마는 어릴 적에 저는 아버지로부터 못된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양반이 다섯 있다, 무슨 성 무슨 성, 이 다섯은 양반이고 그 나머지는 다 보통 사람이다, 그리고 무슨 성은 백정이고 무슨 성은 상놈이다, 그러니 그 집의 아이들과는 놀면 안 된다--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보니 정치가, 학자로 출세한 사람들 가운데에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던 천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옛날 같으면 저 사람 백정의 자손인데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빨리 잊어야 합니다. 스스로 양반이라며 큰소리치는 사람의 족보를 자세히 검토해 보았더니 여섯 번째 첩의 아들이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사회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양반은 원래 부자들이 만든 계층입니다. 재물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존경받고 싶고, 다시 본질적으로 존경을 받고 싶어져서 '우리는 피가 다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답니다. 사람이란 한치도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잘못된 개념이 하나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어느 기능에서, 어떤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본래적인 것과 근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이 동질성을 확실히 알고 재인식하여 극대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됨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미래적으로 볼 때에 종말이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죽어야 하고 다같이 썩어야 합니다. 공동묘지에 가보면 큰 비석을 세워놓은 무덤, 작은 비석을 세워놓은 무덤, 비석마저 없는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시체가 들어있음이 같습니다. 썩어져 흙이 된다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부질없이 묘지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점을 생각해본다면 거기에 장식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다같이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운명이 하나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말씀으로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하나입니다. 진리로 하나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의 백성 된 신분으로 하나입니다. 종말적 운명이 하나입니다. 본문에서는 일곱 가지가 하나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 곧 만유의 아버지는 만물을 통일케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본래가 하나요 장차도 하나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소한 이질적 요소를 극대화하면서 교만하거나 절망한다면 되겠습니까 다 부질없습니다. 언젠가 이 점을 뉘우치고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미 하나입니다. 벌써 하나이므로 이제 하나됨의 뜻을 바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그리하면 비로소 하나됨의 평화가 있고, 하나됨의 은혜가 있고, 하나됨의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승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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