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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소서 (요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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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통일에 대한 간절한 노래가 있습니다. 정말 통일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며 꿈이기에 그 외침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통일은 하나됨을 의미하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됨의 결과만 생각할 뿐, 하나됨의 동기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향이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정도 있으며 평화와 번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독재자들이 이 힘을 위하여, 즉 힘의 수단으로 통일을 원하며 일치를 외쳐온 것입니다. 또한 폭력배나 불의한 자들도 하나를 원하며 심지어 마귀까지도 하나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구에게나 하나되어야 한다는 소원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통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거벗은 몸이 하나이고, 죽을 때에 가는 모습이 하나입니다. 또한 사는 동안에는 살아가는 현상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근원적인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사람의 행복의 질량은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사실은 슬픔이 있으며, 불행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 나름대로 재미와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현상적으로 다르게 보일 뿐, 마음속에서의 행복의 무게는 다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공동묘지에 갈 때마다 유달리 큰 비석을 보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백만 원씩, 아니 몇천만 원을 들여서 호화롭게 꾸며 본들 속에 있는 시체가 썩고 있음은 똑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근본적인 것이 같은데 모양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달라지는 것입니까 가장 기본 되는 것이 같고 근본이 같은데 현상적으로 다르다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됨의 현상을 유형적으로 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물리적 일치입니다. 물리적 일치란 힘의 대결로 인하여 하나가 죽고 하나가 살아남아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 사관(唯物論的史觀)에 의한 통일 개념으로 큰 자가 약한 자를 먹어 버리는 약육강식이요 적자생존입니다. 여기서는 구조, 지위, 의식, 견해 등 획일적인 일치, 구조적인 통일로서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집단 행위, 집단 일체 개념으로 엄청난 과오를 범하기 쉬운 집단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화학적인 일치입니다. 이것은 너도 나도 아닌 제 삼의 일치로 변증법적 통일입니다. 이 일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정과 반은 없어지고 합이라는 것만 남습니다. 타협적이요 논리적이기는 하나 너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도 이런 조화, 이런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셋째는 인격적인 일치입니다. 이것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에 의한 통합으로, 인격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 없는 일치, 속박 없는 화해, 숙청 없는 연합으로, 요즘 많이들 부르짖고 있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모택동이 중국의 그 넓은 땅을 통일하긴 했습니다만 약 4천만 명을 숙청했음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어 공동묘지와 같은 고요함을 가지고 있다가 오늘에 와서 자유와 함께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한 것입니까 통일이란 인격과 개성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에 통일이 있습니다. 한평생을 함께 살았어도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면 하나가 아닙니다. 어느 부인은 놀랍게도 20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을 한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이 부부관계가 무사히 살아왔다고 하나된 부부라 말할 수 있습니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뜻이 하나이고 서로 사랑하면 하나입니다.
한 구조 속에, 한 조직 속에 있어도 자유가 없으면 통일도 아니요 일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나팔을 불면 일어나고 취침 시간이 되면 같이 자고 같이 일하는 노예적인 통일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일치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문제가 얽혔어도 목적이 같고 방향이 같고 뜻이 같으면 여기에 사랑이 있고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고층 건물 앞에서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고 혼자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사람이 좀 거들고 싶어서 함께 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은 더욱 더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혼자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우습게도 한 사람은 이 짐을 밖으로 끌었고 또한 사람은 안으로 끌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통일을 생각했어도 방향이 다를 때에는 하나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목적과 방향이 하나이어야만 일치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뭇솔리니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에, 어느 날 변장을 하고 혼자 영화관을 갔었습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화면에는 뭇솔리니의 큰 사진이 나타나고 모든 관중은 일어서서 국가를 부르며 박수를 쳐야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는데 뭇솔리니는 약간 겸연쩍어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더니 옆 좌석에 있던 노동자가 발길도 차면서 "여보, 일어나요. 나도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일어나 두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요"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민이 독재자의 영상을 보고 국가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는--이 감옥 같은 일치가 통일입니까 자유와 사랑이 보장될 때에만 진정한 하나됨이 있고, 목적과 가치관이 같을 때에 통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유언과 같은 긴 설교를 하시고 이어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의 마무리 부분으로 "하나되게 하소서"라 간구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됨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된 것은 무리적인 일치나 타협이 아니라, 신앙이요 진실함이요 거룩함이요 사랑입니다. 두 분의 일치의 결정적인 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반납하여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오직 만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의 일치입니다. 또한 십자가와 그 희생의 제사를 통하여 이루신다고 하는 방법과 방향이 하나였습니다. 빌립보서 2:8에서는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적이었으며, 강압이나 타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광을 저들에게 보여 주십사고 기도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즉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림으로 하나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영원성을 보여주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참 일치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본문 23절에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어서 26절에는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너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 바로 여기에 일치함이 있습니다. 증오와 시기가 있으면 나 자신은 물론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분열되고 맙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 화평만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을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26절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함으로"--즉 앎으로써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이해가 미치지 못할 경우가 있으므로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언젠가는 알게 되어 하나되는 그 날이 있을 것임을 내다보시며 참으셨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 교포 가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서 부모들은 경제적 기초를 잡느라고 어린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자랐는데, 그 중 고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뜻밖에도 불량배 속에 끼이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기도도 하고 여러 가지 말로 달래 보는데, 문제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쉬운 대화는 통하지만 다소 심도 있는 이야기나 신앙적인 내용은 전혀 전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스앤젤리스에서 영어에 능통한 교포 2세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 집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들만 약 2천여 명이 모여든 대집회라서 아들을 겨우 설득하여 그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이 젊은 목사님은 같은 교포 2세이면서 같은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기에 고등학생들이 잘 사용하는 언어로써 설교하여 이 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더니, 아버지 품에 안기면서 "아버지!"하고 진심에서 우러나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서 함께 살았지만 그 관계는 남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새롭게 아버지를 부르는 이 순간, 비로소 부자지간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폴 틸리히(P.Tillich)는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인간의 상황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군대가 가지 못하는 곳에 선교사는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굳은 마음에도 복음은 역사하고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전쟁에 나가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는 장님이 되었다고 원망하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대에서 붕대를 풀기 전에 의사가 말하기를 다행히도 한쪽 눈은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희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한쪽만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애꾸눈이라고 또 원망을 했습니다. 그가 불평 속에 붕대를 풀자마자, 제일 먼저 그의 시야에 나타난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의 한쪽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제야 자신의 눈 하나가 어머니의 눈임을 깨닫고 회개와 깊은 감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알고 깨닫는 순간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고, 그리고 이웃을 형제로 볼 수 있는 그 믿음, 그 가치관 안에서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나된 것처럼 십자가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이 귀한 기도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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