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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의 계산 (마20:1-2)

본문

`파라독스'라는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올바른 주장이 담긴 말을 의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흔히 역설이라고 번역되는 이 파라독스의 어법을 가장 자유롭게 구사하는 분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라독스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성서는 그야말로 역설의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로마제국을 죽음의 공포로 유지한 사형도구인 십자가를 오히려 구원의 중심상징으로 삼은 것은 그야말로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논법은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끊입없이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오늘의 나, 또는 오늘의 현실을 인정하고 합리화해 주기보다는 시랄하게 부정하고 도전하는 책입니다. 성서의 역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제껏 확실하게 닫고 있다고 믿었던 땅이 일순간에 꺼지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이 진정한 생명의 대지(大地) 위에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바로 이 성서가 선언하고 있는 파라독스의 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시람을 지배해 온 현실 속에 감추어진 허구를 밝히 깨달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깨달음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자신의 삶의 터로 선택하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큰 것이 작은 것에, 고성이 미미한 소리에 굴복하는 `현실세계의 역정'이 바로 이 파라독스가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새질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는 이른바 `성공'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에 배력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예수의 파라독스는 그 화려한 성곡의 세계를 때로는 미련없이 '포기'하라고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0장의 본문은 하루 해가 거의 지려는 늦은 노후 장터에서 일거리를 얻지 못해 하릴없이 서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경험한 사건을 비유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저 유명한 부자 청년의 사건 이후 충격을 받은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던진 질문, "보소서, 그 부자청년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두어진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사건'아란 한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에게로 와서 그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가진 것을 다팔고 나를 따르라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발길을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대답하시고 이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여기 예수께서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의 명제를 언급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보든 것을 버린 결단을 이제는 무엇가를 누리기 위한 혹은 받아내기 위한 또다른 형태의 `기득권'으로 내세우려는 순수치 못한 마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풀어 말하자면 "너희가 남보다 먼저 모든 것을 버린 자라고 으시대느냐, 그리하면 오히려 나중된 자가 되리라"는 힐난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이은 포도원 주인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합니다.
그 비유의 시작은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즉 비유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문제 해결 방식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예화인 것입니다. 포도원주인은 일꾼을 얻기 위해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갑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날이 저물기 바로 전인 오후 다섯 시에도 주인은 장터에 나가 일거리가 없어 놀고 섰던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포도원 주인의 행위가 일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먼저 주시하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 하루가 다 가는 늦은 시각에 굳이 품꾼을 찾아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종일토록 빈둥거리고 있는 이유를 주인이 묻자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이들이 졸고 있었던 것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력시장의 경쟁에서 진종일 외면당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일이 끝나고 일당을 나눠주는 대목을 다시 읽어봅시다. 여기서도 주인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일반의 상식을 뒤엎고 있습니다. 나중 온 자가 한 데나리온이나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온 자들은 내심 희색이 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이내 깨어지고 맙니다. 똑같이 같은 삯을 받은 것입니다. 현실의 논리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파라독스의 파격적인 순간입니다. 의기양양해 있던 먼저 온 자들에게는 불평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기죽어 있었을 나중 온 자들에게는 은총의 감격이 주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곧바로 항의합니다. "우리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뎠는데 그 대가가 이것이가" 마땅한 항변인 듯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묻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지 않았는가" 항변을 더이상 공격목표를 찾지 못한 채 수그러드고 말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나중 온 자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이나 준 주인의 후덕함과, 이 후덕함의 은덕을 입게 된 나중 온 자들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목할 줄 몰랐습니다. 더 많은 일은 했으니 당연히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잔지 주인에게 먼저 부름을 받았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일 부르지 않았다면 정작 그들도 나중 온 자들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나중 온 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지루했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력함, 패배의식 등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날이 저물어 가려는 때가 다가오면서 희망의 등불을 스스로 끌 채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포도원 주인이 예기치 않게 이들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이들에게 품삯의 수준은 문제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이들의 대화에서는 앞서 먼저 온 자들과의 거래와는 달리 품삯에 대한 내용이 일체 적혀 있지를 아니합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제 막 사라지려하고 있던 희망이 놀랍게 되살아 오르고, 비록 때늦은 시각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흥분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낙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생각지도 않게 하루분에 해당하는 노동의 대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시간은 분명 적었으나 그들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주인은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운 차별적인 기득원의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창졸간에 무너지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야 할 귀중한 `삶의 권리'가 선포된 모습입니다.
먼저 온 자들은 곧바로 항의합니다. "우리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뎠는데 그 대가가 이것인가" 마땅한 항변인 듯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묻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지 않았는가" 항변은 더 이상 공격목표를 찾지 못한 채 수그러들고 말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나중 온 자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이나 준 주인의 후덕함과, 이 후덕함의 은덕을 입게 된 나중 온 자들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목할 줄 몰랐습니다. 더 많은 일을 했으니 당연히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주인에게 먼저 부름을 받았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일 부르지 않았다면 정작 그들도 나중 온 자들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나중 온 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누군가가 불러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지루했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력감, 패배의식 등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날이 저물어 가려는 때가 다가오면서 희망의 등불을 스스로 끌 채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포도원 주인이 예기치 않게 이들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이들에게 품삯의 수준은 문제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이들의 대화에서는 앞서 먼저 온자들과의 거래와는 달리 품삯에 대한 내용이 일체 적여 있지를 아니합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제 막 사라지려 하고 있던 희망이 놀랍게 되살아 오르고, 비록 때늦은 시각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흥분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낙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생각지도 않게 하루분에 해당되는 노동의 대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시간은 분명 적었으나 그들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주인은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운 차별적인 기득권의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창졸간에 무너지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야 할 귀중한 `삶의 권리'가 선포된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간이 다 지난 오후에도 여전히 품꾼을 구하러 다닌 이 포도원 주인의 의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기득권이 버티고 있는 질서에서 밀려난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 속에 숨겨진 예수의 파라독스는 이미 가질 것을 가진 강한 자가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기초적 인권마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약자를 위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슨 계기를 잡아서라도 이들의 삶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 해가 다 지는 시간이 되었어도 포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은 품꾼으로 불리움 받은 것 자체가 이미 기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한 데나리온 이상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로써 낙오자가 되지 않았다는 현실이 바로 감사의 소재라는 것을 절감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가난안에 정착하게 된 히브리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한때 이곳 저곳을 유리하던 나그네였다. 그러니 나그네를 멸시하지 말라." 요사이 중국 조선족 동포와 그 밖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더럽고 위험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의 권리"에 대하여 한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되짚어 볼 일입니다.
물론 능력있는 자는 그에 맞게 대우를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히 옳습니다. 실력도 없는 자를 있는 자인 양 떠받들어 준다면 그야말로 모순입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의 메시지는 능력있다는 것을 내세워 힘없는 자들을 더더욱 사정없이 밀어내려는 생각과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질타에 그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의 사랑이란 "먼저"라고 하는 이기적인 경쟁과 기득권의 벽을 넘어서 "모두에게 향유되어야 할 삶의 권리"에 관심을 쏟는 진실의 힘입니다. 현재 자신을 "나중된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해 지금도 장터에 나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를 앞세우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역설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는 힘인 것을 믿는 결단을 다져야 합니다. 그런 결단 위에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이 땅에서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낙오되거나, 나그네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등불이 되는 `먼저 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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