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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배자의 예배자세 (눅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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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위생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요 혹은 이 방면에 전문가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써서 알려지고 또 많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정신적 안정입니다. 경제적 안정이 아니고 정치적 안정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뭘 하겠다고 떠드니까 되는 것마다 불안하고 도대체가 안정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한 인격의 정신적 안정은 자 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안정이 있을 때에 육체도 건강하고 능력도 발휘하고 그 지혜도, 지식도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신적 안정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이 네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정신적 요소가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첫째가 일입니다, 워크(Work). 둘째가 놀이, 플레이(Play). 셋째가 러브(Love), 사랑입니다.
넷째가 예배, 워십(Worship)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WPLW 라고 약자로 말합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다만 이 방면에 학자일 뿐이요 교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라고 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온전히 위탁하는 그런 예배적 행위, 예배적 정신 자세가 아니면은 인간은 결코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예배를 정신안정의 절대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의 중요한 분야는 자세입니다. 자세 즉, 다시 말하면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됩니다. 일할 때에
첫째는 목적이 있어야 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해야 하고, 두 번째는 즐겨야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하면은 무슨 일을 하든 정신적 안정이 되질 않고 스트레스는 점점 더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이 선명치 않기 때문이요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의 즐거움이 없는 것이에요. 미래학을 전공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21세기에 성공할 사람은 바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던 일은 즐겨야 됩니다. 즐거운 마음이 생겨야 됩니다. 즐거운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신세타령하고, 팔자타령하고, 남 원망하고, 이래가면서 해선 안됩니다. 무슨 일을 하던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일을 즐기는 것, 그것이
첫째요, 두 번째는 플레이(Play)입니다. 놀이라고 하는 겁니다. 2020년이 되면은, 앞에 될 얘기입니다만은, 인구의 7% 밖에는 생산직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기계와 이런 것들이 발달해서 다 생산을 하게 되고 사람은 그 남는 힘, 남는 여가가 많아집니다. 요새도 걸핏하면 어떤 분들이 나 뭐 농촌에 가서 초야에 묻혀 살겠다고. 아 초야는 아무나 하나요 그거 옛날 얘기입니다. 그 쓸데없는 소리하지도 마세요. 괜히 남의 농사 망치지 말고……. 다 이제는 기계로 하고 과학적으로 하는 세상이요. 그럼 노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는, 잘 놀아야 됩니다. 놀 줄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만 벌어먹기 힘들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노는 걸 못 배웠어요. 어쩌다가 며칠 놀려고 하면 고스톱밖에 못해요. 아니면 그냥 잠만 자려고 들어요. 사람이 늘어져 가지고 못쓰게 되요. 그래 기껏 한다는게 그만 산에 올라가는 것만 배워 가지고 산을 다 못쓰게 만들었어요. 그러잖아도 좁은 땅에서 말이야. 이게 왜 이래졌느냐 놀 줄을 모르는 거예요 지금 즐길 줄을 몰라요.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혹 운동도 하고 즐긴다고 합니다만은 꼭 즐기는데 있어서 승부욕을 내는 사람이 있어요. 운동을 해도 승부욕과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손해랍니다. 그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라니까 사실인 줄 알아야겠죠. 일본에서 골프를 치다가 일년에 죽는 사람이 160명이래요 평균.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치는게 아니고요 이걸 이기려고 마지막엔 퍼팅 하다가 요러다가 뻑하고 죽는 거야 심장마비로. 이 승부욕이 강해 가지고 이기려고, 그냥 이기려고……. 좌우간 이건 골프건 뭐건 간에 문제가 있습니다. 꼭 돈내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돈 안 내면 신바람이 나질 않아요. 꼭 돈을 내야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정신병자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건 아주 위생적으로 나쁜 버릇입니다. 그대로 즐기는 거예요. 이걸 이기려고. 그래 이겨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아 금메달을 탑니까 또 타면 또 뭘 합니까 이 플레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아 10분만 같이 운동을 해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어요. 정신위생의 건강을 알아볼 수가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즐기는 것, 플레이하는 것, 놀이, 이 놀이를 아주 여유 있게 또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되요. 또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는 반드시 헌신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수고와 헌신, 커미트먼트(Commitment)가 있어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사람은 수고는 없이 사랑만 생각해요. 그건 욕정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그건 집착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수고하고 희생하면서 즐거운 거예요. 자 가족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면서 즐겁고 또 가족을 위해서 일 하면서 즐겁고. 이것이 있어야 되는데 요새 사람들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손해라고 생각해요. 이게 바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건강한 사람은 바로 사랑과 수고와 희생 속에서 기쁨을 얻는 거예요. 참 사랑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건강한 사람이고요 그리고는 예배올시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야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일과 놀이와 사랑과 예배, 이것이 4박자가 바른 균형을 잡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 안정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안정이야말로 가장 생산적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 말씀에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성전에 올라갔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종말적이고 절대적이고 직선적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하겠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 보면은 오늘 본문에 이 두 사람은 극단적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대조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에 이것이 예수님께서 꾸며낸 만들어낸 비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 한 말씀하시고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정보에 밝았어요. 아주 관찰력이 높아서 실제로 있는 실제 상황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세인과 이 세리, 두 사람이 실제적으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많은 사람이 다 보았어요 그리고 이것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얘기를 하나 다시 한다면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십시오. 여기 불한당 맞은 사람이 여기 누워 있는데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 천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구제했다. 이게 꾸며낸 이야기라면은 예수님은 그 말씀 한 말씀하시고 비난받고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만도 못하게 만들었대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낸 얘기로 될 수 있는 얘기입니까 뭐 쉽게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이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기를 여기에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이 그냥 지나가고 장로님이 그냥 지나가고 창녀가 도와주었다. 됩니까 만들어서 이렇게 말했다면 이게 무사할 수 있는 얘기 입니까 그런 비유라고 해서 그 비유가 추상적인게 아니에요. 실제상황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이 문제를 놓고 이 소재를 놓고 변론을 벌이지 못했던 겁니다. 보세요 이제 바리세교인, 이건 거룩함의 극치예요. 유대사람의 윤리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거룩'이거든요. 거룩한 자 중의 최고가 바리세인이요 가장 낮고 천히 여기고 아주 죄인의 대명사가 세리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러면 세리와 바리세인, 극과 극입니다.
두 사람을 대조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바리세교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는 하지만은 그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될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웃을 보고 자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사람 앞에 자기 자랑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던 나머지 하나님도 못 보고 자기 진실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고요, 그래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이 사람은 자기 집착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말을 강조합니다. "나는, 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에는 두 번 "나"라고 되어 있습니다만은 영어나 원문에는 세 번 나타납니다. 우리는 대체로 주어를 빼놓고 동사만 말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하고 강조합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게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동안 예배는 예배될 수가 없었어요. 오늘 넌센스 같은 얘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면 "따로 서서" 그랬어요. 따로 서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저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죠. 옆에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썼어요. 저 사람과 나와 같이 대접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실 때 옆에 누가 앉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쓰십니까 그것은 예배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 함께 예배하고 있고 함께 죄인일 뿐입니다. 그가 무슨 뭐 장관이든, 뭐 혹은 어디 가서 일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있거나 없거나, 과거가 높건 낮건 예배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이 사람은 '이 사람하고, 저런 사람하고는 내가 같이 앉을 수가 없다'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게 얼마나 교만한 마음입니까 언젠가 우리 장로님 한 분이 제게 싱거운 소리를 한마디 합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옆에 앉다 보니까 공교롭게 앉았는데 예쁜 아가씨가 앉았더래요. '오늘은 참 은혜가 여러 가지로 많다' 생각을 했대요. 아 향긋한 향수 냄새가 들어오는데 '아 이거 참, 오늘은 기분이 좋다' 그랬대요. 또 찬송 부를 때 보니까 목소리를 높여서 부르는데 '아 음성도 좋구나' 얼굴은 못 보지만 옆에 앉았으니까 이렇게 했대요.
그런데 보니까 "성경을 몇 장 찾읍시다" 하니까 이걸 못 찾더래요. 아 그래 가지고 여기 신약, 구약 막 뒤지더래요. 그래서 "제가 찾아 드릴까요"하고 봉사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제가 "그래 예배 잘 드렸소" 이런 생각하지 말라 그 소리예요. 옆에 누가 있던 말던 그가 높건 낮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한 입장에서 예배드리는 겁니다. 따로서는 마음, 그거 안되고요 또 너와 나는 다르다 하는 구별의식! 이건 참으로 크게 잘못 된 겁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 보니까 멸시했어요.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로도 남을 멸시하는 생각이 있어서는 안돼요. 그런 구별하는 의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꼭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로 영접하고 꼭 같은 마음으로 있어야 됩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요새도 보니까 종종 이것이 문제예요. 가끔 제가 깜짝 놀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어떤 분이 제게 찾아와서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내 아들과 누구하고가 서로 연애를 한다고 그래요. 내가 알아보니까 그 집 애가 아주 가난하고 어려워요.
그런데……
그런데요아 저가 어떻게 감히 우리 집안을 쳐다봅니까" 이렇게 나와요. 가슴이 섬찟해요. 세상에 어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 돈 몇 푼 좀 더 있다고 해서 뭐 그렇게 좀 다른 것처럼 느낍니까 건방진 소리요. 여러분 혹시라도 꿈에라도 이런 생각은 해서는 안돼요. 우리는 다 같이 꼭 같을 뿐이지 "감히 어떻게 우리 집안을……" 자기가 뭔데 무슨 대단한 사람인데 다 잊어버리세요. 오로지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여기세요. "나는 특별하다" 이런 생각은, 또 "우리 집안은 특별하다." 양반 물 갔어요.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주 교만해요.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교만이요. 교만이란 지적 교만이 있고 민족적 교만이 있고 사회학적 교만이 있고 그리고 영적 교만이 있는데 그 중에 영적 교만이 제일이요. "나는 잘 믿는다나는 저보다 더 경건하다나는 저보다 더 깨끗하다" 이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종교 의식을 액세서리처럼 생각해요. "나는 금식을 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그리고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참 놀라운 일이요. 왜 남하고 비교하고 남을 왜 정죄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토색, 불의를 행치 않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 이것이 세리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죄예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토색, 불의. "자 이제 이런 죄를 나는 범치 않고 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이래서 바리세교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떤 돈 많은 부자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어떤 계약을 따내야 되겠는데, 이 계약을 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합니다. "이 계약이 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아 뒤에서 누가 기도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와요. 안 들을려고 해도 조용조용히 자기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소리가 들려와서 부득불 듣게 됐어요. 들어보니까 이 분은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하나님 내게 만원을 주십시오. 오늘 내가 저 용역 시장에 나가서 좀 일을 맡아서 일을 해서 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 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이러고 기도한다고. 이 부자가 홱 돌아서서 만원짜리 하나를 주면서 "이보게 여기 만원 있으니 가지고 가게. 그리고 하나님이 제발 다른데 신경을 쓰지 아니하도록 헷갈리지 않게 해주길 바라네." 여러분 이 덕에 만원은 쉽게 응답 받았습니다만은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교해서 내 경건이 더 위에 있다고, 내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되겠습니까
오늘 세리를 보세요. 세리는 하나님 앞에 오직 긍휼을 구하고 있을 뿐이요. 돈도 명예도 지식도 아니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 말은 의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요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리새 교인이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있어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어요.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런 직분을 가졌습니까", "나는 왜 이런 직업을 가졌습니까", "내 팔자는 왜 이렇습니까" 원망이 없어요. 직업을 바꿔 달라는 얘기도 없어요. 오로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셨다" 이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배는 신실해야 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웬만하면은 표를 얻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야 하겠지만 아니요.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에 나가서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는데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했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도……. 했더니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어요.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은 다음 주일부터는 다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했답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예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함이 없이는 내 삶은 의미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 모든 사업은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이것이 문제니까요. 바른 예배의 자세에서 바른 삶의 자세가 유출되는 것이고 생산되는 것이고 결정되는 것이에요. 의롭다 함을 얻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고 새로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새로운 의미의 삶을 살 수 있고 새로운 창조적 역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바른 예배의 자세, 여기에 우리의 삶의 기본이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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