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제사 (창4:3-9)
본문
범죄한 인생들이 구약 시대는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오늘 날에는 동일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라면 과연 어떤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잘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은 인간이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죽음의 근본 원인이 되는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이같은 인간들에게 그같은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책인 제사 제도와 더불어 창4장은 인류 역사 속에 제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제사의 기원과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제사의 시작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가 대수롭게 생각되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는 점차 자라고 확산되 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처럼 부부 사이에 갈등을 가져온 것처럼 죄는 마 침내 형제사이를 단절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즉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창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 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 다 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던 뱀의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허황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불 순종한 결과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그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 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짤막한 세상에서의 삶이 아담과 하와와 동일하게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다가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어 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같은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 이 자초하여 범죄한 죄의 당연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 위를 맴도시고 계시며 인간을 구원할 길을 찾고 계셨으며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짐승 이 대신 죽어 인간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처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대신 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할 것을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부분적으로나마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죄없는 짐승이 인간의 수치를 위하여 대신 죽어 피를 흘림으로 그 가죽으로 옷 을 지어 입음으로 수치가 가리워 지는 것처럼, 죄없는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어 제물이 됨으로 인간의 죄가 속해지고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길이 열어 주신 것이 바로 제사 제도였습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서 제사 제도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보다 더 성실하게 드려져야만 하는 일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 라 반드시 신실하게 이행해야만 하는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 제도가 시작된 배경인 것이며 오늘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의 제사가 바로 성경 최초의 제사인 것입니다.
2.가인과 아벨의 제사 한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자람과 같이한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이건만 두 사람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자라서 하나님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가인과 아벨이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 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 렸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에 곡식을 심고 땀을 흘린 것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기름지게 잘 키워 가지고 그것을 정성껏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각기 다른 두 제사였습니다. 여기서 두 제사라고 하는 말은 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서로 종류가 다른 제 물을 드렸다는 다양성을 의미하는 두 제사가 아니라 그 내용과 질에 있어서 본질적 으로 서로 다른 두 제사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의 문제점을 피가 없는 곡물로 드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고 말하기도 하지만 (레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 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라는 말씀처럼 곡식으로도 제사를 드리는 소 제가 있기 때문에 곡식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피의 제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 제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 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 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고 한 말씀과 같이 피의 제사였 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똑같은 장소에서 두 사람이 드린 제사 중에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해답은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 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는 말씀과 같이 제물보다 내면적인 믿음의 차이에 있으며 그 증거물이 바로 제물 그 자체 라고 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의 제사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다는 아벨의 제사를 분석해 보면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는 말씀이 과연 정성어린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었음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가)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인류가 육축을 기르는 목적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인데 하 나는 그것을 잡아 가죽을 벗겨 옷을 지어 입기 위한 목적과 또 하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서 키우는 목적뿐입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그 양들 가운데 바로 처음 난 첫 새끼로 그것을 미리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기른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피를 흘리고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 바치는 아벨의 모습은 그 진지한 내면의 믿음을 잘 입증해 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기름으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잘 자란 것을 상징하는 의미는 기름지다는 말로 표현되어진다면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양은 병들고 말라비틀어진 양이 아니라 기름지게 잘 키운 양으로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부터 얼마나 정성을 드려서 길렀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 쳤다는 것은 아벨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였나 하는 것을 증거 하기 에 충분한 제물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은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수 없으며 또한 평가해서도 안되며 오직 하나님만이 진실한 믿음을 아시지만 믿음은 순종이라는 열매를 만들어 냄과 같이 믿음은 정성이라는 꽃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열납하셨다고 한 말씀과 같이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2)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제사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셨는지에 대해서 그 해석이 구구하지만 그 원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는가 하는 제물 자체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 을 어떤 믿음의 자세로 드렸는가 하는 예배자 자신의 믿음에 대한 문제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첫 이삭이 아닌 소제물 가인도 분명히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제사의 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인이 누구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가인이 땀을 수고하 여 얻은 곡식으로 소제물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져 땅의 소산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만일 가인도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아벨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 를 드릴 수 있었으니 (레2: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보다 지극한 정성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 벨과 달리 그저 땅의 소산 중에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적용;십일조는 물질의 첫 열매이고, 주일은 한 주간의 첫열매이다. 나.제물만이 아닌 생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제물을 드리는 가인의 평소 생활이었으니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 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책 망하신 말씀과 같이 평소 그의 삶이 선하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 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을 범하면서도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실한 예배와 신실한 생활은 별개의 겻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인간 관계에서 선하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하고, 악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한 시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 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예배가 성공적인 삶과 직결되어있음과 같이 성공적인 삶이 바로 성공적인 예배를 보증하며 하나님은 제물만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삶을 아울러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농사하는 농부가 이른 봄에 들에 나아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한 여름에 땀을 흘 려 가꾸는 수고를 할지라도 가을에 머리 숙인 곡식들을 보면서 그 수고를 잊게 되고 추수할 때 큰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흉년을 만나게 되면 그 동안의 수고는 헛되고 마음에 기쁨은 사라지고 분노 와 억울함과 허탈감과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열납하셨기 때문에 그동안 양을 키울 때의 수고가 다 기쁨과 보람으로 환원되고 승화되어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는 말씀과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반대로 차라리 제사를 드리지 아니함만도 못한 좋지 아니한 결과 를 맞게 되었으니 (창4:5)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6) 여호와께서 가 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는 말씀처럼 마음에 분노와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인은 제사 후에 은혜와 축복이 아니라 (창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람들 마음 속에 거짓된 영을 심고 잘못된 제사와 예배에 빠지게 하여 그 마음에 평화를 얻고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운 증오심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종교 전쟁을 일으키고 무자비한 테러를 성전 이라고 미혹하여 자살 특공대에 지원하게 만드는 악한 역사를 서슴없이 하게 합니다. 하루 장사를 허탕친 것보다 일년 농사를 허탕친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응답되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형제를 미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용서와 사랑의 결심을 하고 마음에 시기와 근심과 불안은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사랑이 가득해 지며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짐을 다 벗 어 던진 안식과 평화가 체험되어지는 성공적인 믿음의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니까 교회를 오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배에 참석을 하는 것이지만 과연 그 예배가 아벨과 같은 믿음의 예배인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 야만 합니다. 예배를 드렸으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고 도리어 마음에 불안과 분노와 미운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 예배는 아벨의 예배가 아니라 가인의 예배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결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예배를 참석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예배당에서 함께 드린 예배이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 시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1) 나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2) 아벨과 같이 바쁜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따로 구별하 여 준비된 날짜와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며
3) 쓸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지만 첫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따로 구별하여 모 아 가지고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며 4)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라고 해서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가인의 예배가 되 어서는 안되며 단 한 번의 예배조차도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예 배가 되어야만 하며 5) 단지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선을 행하기에 힘쓰며, 분노 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 려야만 합니다. (시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믿음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믿는 것이기에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였지만 그 믿음 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외면적으로 순종이라는 행위와 열심이라는 적극성과 정성이 라는 희생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화:젊은 화가와 거장 벡크린과의 대화-2,3일에 그림을 그리지만
2,3년이 걸려야 겨우 한장이 팔리는데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정반대로
2,3년에 걸려서 그림 을 그리면
2,3일에 팔릴 것이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 자 각종 환자들이 올려들었는데 그 중에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워가지고 예수님께 가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같은 상황에서 중풍 병자를 메고 왔던 사람들은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 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상을 달아 내렸을 때 그 모 습을 성경은 "야! 정성이 지극하다, 정말 극성이다" 라는 말 대신에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처럼 '저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내면적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정성으로 표현이 되어진다면 사람에 대해서는 선한 행실과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1.제사의 시작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가 대수롭게 생각되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는 점차 자라고 확산되 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처럼 부부 사이에 갈등을 가져온 것처럼 죄는 마 침내 형제사이를 단절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즉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창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 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 다 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던 뱀의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허황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불 순종한 결과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그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 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짤막한 세상에서의 삶이 아담과 하와와 동일하게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다가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어 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같은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 이 자초하여 범죄한 죄의 당연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 위를 맴도시고 계시며 인간을 구원할 길을 찾고 계셨으며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짐승 이 대신 죽어 인간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처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대신 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할 것을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부분적으로나마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죄없는 짐승이 인간의 수치를 위하여 대신 죽어 피를 흘림으로 그 가죽으로 옷 을 지어 입음으로 수치가 가리워 지는 것처럼, 죄없는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어 제물이 됨으로 인간의 죄가 속해지고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길이 열어 주신 것이 바로 제사 제도였습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서 제사 제도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보다 더 성실하게 드려져야만 하는 일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 라 반드시 신실하게 이행해야만 하는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 제도가 시작된 배경인 것이며 오늘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의 제사가 바로 성경 최초의 제사인 것입니다.
2.가인과 아벨의 제사 한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자람과 같이한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이건만 두 사람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자라서 하나님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가인과 아벨이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 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 렸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에 곡식을 심고 땀을 흘린 것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기름지게 잘 키워 가지고 그것을 정성껏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각기 다른 두 제사였습니다. 여기서 두 제사라고 하는 말은 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서로 종류가 다른 제 물을 드렸다는 다양성을 의미하는 두 제사가 아니라 그 내용과 질에 있어서 본질적 으로 서로 다른 두 제사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의 문제점을 피가 없는 곡물로 드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고 말하기도 하지만 (레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 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라는 말씀처럼 곡식으로도 제사를 드리는 소 제가 있기 때문에 곡식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피의 제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 제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 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 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고 한 말씀과 같이 피의 제사였 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똑같은 장소에서 두 사람이 드린 제사 중에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해답은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 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는 말씀과 같이 제물보다 내면적인 믿음의 차이에 있으며 그 증거물이 바로 제물 그 자체 라고 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의 제사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다는 아벨의 제사를 분석해 보면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는 말씀이 과연 정성어린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었음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가)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인류가 육축을 기르는 목적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인데 하 나는 그것을 잡아 가죽을 벗겨 옷을 지어 입기 위한 목적과 또 하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서 키우는 목적뿐입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그 양들 가운데 바로 처음 난 첫 새끼로 그것을 미리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기른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피를 흘리고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 바치는 아벨의 모습은 그 진지한 내면의 믿음을 잘 입증해 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기름으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잘 자란 것을 상징하는 의미는 기름지다는 말로 표현되어진다면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양은 병들고 말라비틀어진 양이 아니라 기름지게 잘 키운 양으로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부터 얼마나 정성을 드려서 길렀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 쳤다는 것은 아벨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였나 하는 것을 증거 하기 에 충분한 제물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은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수 없으며 또한 평가해서도 안되며 오직 하나님만이 진실한 믿음을 아시지만 믿음은 순종이라는 열매를 만들어 냄과 같이 믿음은 정성이라는 꽃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열납하셨다고 한 말씀과 같이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2)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제사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셨는지에 대해서 그 해석이 구구하지만 그 원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는가 하는 제물 자체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 을 어떤 믿음의 자세로 드렸는가 하는 예배자 자신의 믿음에 대한 문제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첫 이삭이 아닌 소제물 가인도 분명히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제사의 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인이 누구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가인이 땀을 수고하 여 얻은 곡식으로 소제물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져 땅의 소산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만일 가인도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아벨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 를 드릴 수 있었으니 (레2: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보다 지극한 정성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 벨과 달리 그저 땅의 소산 중에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적용;십일조는 물질의 첫 열매이고, 주일은 한 주간의 첫열매이다. 나.제물만이 아닌 생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제물을 드리는 가인의 평소 생활이었으니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 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책 망하신 말씀과 같이 평소 그의 삶이 선하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 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을 범하면서도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실한 예배와 신실한 생활은 별개의 겻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인간 관계에서 선하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하고, 악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한 시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 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예배가 성공적인 삶과 직결되어있음과 같이 성공적인 삶이 바로 성공적인 예배를 보증하며 하나님은 제물만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삶을 아울러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농사하는 농부가 이른 봄에 들에 나아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한 여름에 땀을 흘 려 가꾸는 수고를 할지라도 가을에 머리 숙인 곡식들을 보면서 그 수고를 잊게 되고 추수할 때 큰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흉년을 만나게 되면 그 동안의 수고는 헛되고 마음에 기쁨은 사라지고 분노 와 억울함과 허탈감과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열납하셨기 때문에 그동안 양을 키울 때의 수고가 다 기쁨과 보람으로 환원되고 승화되어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는 말씀과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반대로 차라리 제사를 드리지 아니함만도 못한 좋지 아니한 결과 를 맞게 되었으니 (창4:5)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6) 여호와께서 가 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는 말씀처럼 마음에 분노와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인은 제사 후에 은혜와 축복이 아니라 (창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람들 마음 속에 거짓된 영을 심고 잘못된 제사와 예배에 빠지게 하여 그 마음에 평화를 얻고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운 증오심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종교 전쟁을 일으키고 무자비한 테러를 성전 이라고 미혹하여 자살 특공대에 지원하게 만드는 악한 역사를 서슴없이 하게 합니다. 하루 장사를 허탕친 것보다 일년 농사를 허탕친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응답되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형제를 미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용서와 사랑의 결심을 하고 마음에 시기와 근심과 불안은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사랑이 가득해 지며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짐을 다 벗 어 던진 안식과 평화가 체험되어지는 성공적인 믿음의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니까 교회를 오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배에 참석을 하는 것이지만 과연 그 예배가 아벨과 같은 믿음의 예배인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 야만 합니다. 예배를 드렸으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고 도리어 마음에 불안과 분노와 미운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 예배는 아벨의 예배가 아니라 가인의 예배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결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예배를 참석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예배당에서 함께 드린 예배이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 시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1) 나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2) 아벨과 같이 바쁜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따로 구별하 여 준비된 날짜와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며
3) 쓸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지만 첫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따로 구별하여 모 아 가지고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며 4)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라고 해서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가인의 예배가 되 어서는 안되며 단 한 번의 예배조차도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예 배가 되어야만 하며 5) 단지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선을 행하기에 힘쓰며, 분노 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 려야만 합니다. (시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믿음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믿는 것이기에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였지만 그 믿음 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외면적으로 순종이라는 행위와 열심이라는 적극성과 정성이 라는 희생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화:젊은 화가와 거장 벡크린과의 대화-2,3일에 그림을 그리지만
2,3년이 걸려야 겨우 한장이 팔리는데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정반대로
2,3년에 걸려서 그림 을 그리면
2,3일에 팔릴 것이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 자 각종 환자들이 올려들었는데 그 중에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워가지고 예수님께 가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같은 상황에서 중풍 병자를 메고 왔던 사람들은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 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상을 달아 내렸을 때 그 모 습을 성경은 "야! 정성이 지극하다, 정말 극성이다" 라는 말 대신에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처럼 '저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내면적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정성으로 표현이 되어진다면 사람에 대해서는 선한 행실과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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