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이의 차이점 (출14:10-15)
본문
저는 창세기에서부터 출애굽기에 이르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의 심각한 의문점에 봉착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을 그냥 가나안 땅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왜 요셉이를 애굽으로 팔려가게하고, 또 애굽에 7년 풍년이 들게 했다가 7년 흉년이 들게하여 그 과정속에서 '요셉'이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게하고.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게하여 '야곱'과 그의 식구들을 애굽으로 내려가게하고 그 곳에서 수백년을 살게 하셨는데.
그런데 또 이게 웬 일 입니까 이제는 또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니. 이같은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은 우선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살이 시켜서 재미보고 있는 '애굽'사람들의 이익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치는 것이며,
둘째로는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난지 수백년, 그동안 가나안 땅에서 평화롭게 정착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일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정말 빤한 일이었습니다.' 참 이상도 하시지요. 그냥 놔두지 그냥 처음부터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오도록 하셨다면,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모두 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테. 그래서 저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이렇게 당신께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셨던 것입니까' 며칠 후에 주님께서는 저의 심령 깊숙한 '영'의 한가운데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편안한 세상사가 아니라 만물을 그 위엄으로 다 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온갖 장애와 온갖 반대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이 증거되어지고 증명되어지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노년에 든 모세를 그의 영광스런 불꽃떨기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가 지시하는 저 '가나안 땅으로 가라!' 오직 그거였습니다. 늙으막의 모세에게는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젊고 힘있을 때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니만 이렇게 힘없고 늙어 빠졌를 때야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불가능한 일을 하라니.말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데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네가지의 장애가 있었습니다.
1.첫째는 애굽왕 바로와 그 백성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2.둘째는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고'라는 유행가를 매일 불러대면서 애굽에서 터전을 잡고 수백년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3. 세째는 도대체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산넘고 물건너 간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으로 시대가 수천년 흐르고 흘러서 자동차,기차, 여객선,비행기가 나온다면야 한번 해볼만 하겠지만요.
4. 네째는 이미 '가나안 땅'에서 잘살고 있는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속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래서 잘 알다시피 애굽의 '열재앙 사건'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되는데 까지는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순종하여 나아가는데 이게 웬일 입니까 처음으로 심각한 장애에 부탁치게 되는데 그게 뭡니까 잘 알다시피 바로 '홍해'였으며 그리고 뒤쫓아 오는 애굽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는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 이전의 문제들은 '모세' 혼자서 겪게 되는 문제였지만 이제 이것은 '모세' 의 시련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시련이었는데 그 시련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자세가 너 무나도 대조적이기에 이것을 오늘 설교말씀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앞에는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이를 갈면서 쳐들어 오는 애굽군대라.우리는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 이 구절을 대하지만 만일 우리가 바 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마! 거기까지 갈 것없습니다. 사업이 부도가 났는데 '빛쟁이'가 쳐들어 온다고 해봅시다. 심정이 어떨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는 말이 매우 설득적입니다. 출 14: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로 이런 뜻입니다. '봐라 내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괜히 말도 안되는 일을 하다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도데체 당신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우리를 이곳에 이끌어 내어 몰살당하게 하느냐' 이 말씀은 두가지를 추론시켜주는데1.첫째, 성경구절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모세'가 애굽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2.둘째,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무언가 깊이 있는 생각을 할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예리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원로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말의 핵심은 거의 결정적입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정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죽는 거 보다야 종살이 하는게 낫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는 지혜'가 정말 돋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하나님의 뜻때로 행 하다가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 서 승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짜피 죽을 거라면 '전쟁터에서는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뜻을 일미리미터라도 더 행하여나가다가 죽는다면 영광스런 것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서 가는데 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살고, 죽는 문제는 정말 지극히 작은 문제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되느냐 아니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내가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하는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오로지 인간의 길흉화복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죽을 것이고, 살리시면 살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자는 이 온 우주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생명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느냐 죽느 냐는 이런 작은 문제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력이 이 세상에서 증거되고 증명되어지는 일이 핵심사항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위력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장소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려야 한다는 지극히 중차대한 문제보다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 생명을 부지할 것인가에 대해 더 신경 을 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와는 대조적인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먼저 믿음이 없는 자들을 권고하는 위치에 섯습니다. 보통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지는데 매일 시험에 빠지면서 '권고' 받는 사람들과, 자기도 어려운 지경에 있으면서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권고'하는 사람들 입니다. 목사님들은 보통 '권고하는' 위치에 서게됩니다. 수없이 시험에 빠지는 벼라별 스타일의 교인들과 접촉하면서 목사님들은 '권고'합니다.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도우실거예요.' '자매님 실망하지마세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아니! 세상에 무얼 믿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저 자신에게도 이렇게 물어보 니까.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손바닥 만한 개척교회 임대료도 정말 간신히 내는 사람이. 무언가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도 않고 자기자신의 문제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어려운 지경에 있으면서도 그냥 큰 소리만 빵빵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돈도 없어서 보태줄 수도 없는 사람이,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잘난 사람보 다 못난 사람들 밖에 없어서 빽도 없는 사람이 정말 이렇게 큰소리쳐도 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말 큰소리 빵빵쳐도 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주의 종의 바로 옆에 언제나! 늘! 항상! 함께계시며 또한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서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큰소리를 들어봅시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중 그 아들 이삭에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아버지 칼과 불은 있는데 도대체 하나님께 드릴 양은 어디있는 겁니까' 찌져지게 아픈 가슴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결코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막연한 희망의 날을 합니다.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니 세상에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친히 준비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런 말 안했어요. 그냥 '독자 이삭을 바쳐라'고만 했어요. 아브라함이 한 말은 단지 막연한 희망의 말이었을 따름입니다. 목회자들은 보통 수많은 절망적 삶의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결코 '절망'의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동일한 바탕의 토대 위에서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장로님 실망하지 마세요. 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강단에서는 '할 수 있다!'라고 단호히 희망의 멧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절대절명의 위기상황 속에 있었던 '모세'의 모습이었는데바로 이 모습이 믿음이 없이 우왕좌왕/ 혼비백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없이 따라나온 그들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영광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문제가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의 빈약함을 이같은 위기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여주고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뒤로도, 좌로도, 우로도 가지말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라! (출14:15)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같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가장 정확한 해답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음을.
그런데 또 이게 웬 일 입니까 이제는 또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니. 이같은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은 우선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살이 시켜서 재미보고 있는 '애굽'사람들의 이익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치는 것이며,
둘째로는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난지 수백년, 그동안 가나안 땅에서 평화롭게 정착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일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정말 빤한 일이었습니다.' 참 이상도 하시지요. 그냥 놔두지 그냥 처음부터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오도록 하셨다면,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모두 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테. 그래서 저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이렇게 당신께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셨던 것입니까' 며칠 후에 주님께서는 저의 심령 깊숙한 '영'의 한가운데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편안한 세상사가 아니라 만물을 그 위엄으로 다 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온갖 장애와 온갖 반대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이 증거되어지고 증명되어지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노년에 든 모세를 그의 영광스런 불꽃떨기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가 지시하는 저 '가나안 땅으로 가라!' 오직 그거였습니다. 늙으막의 모세에게는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젊고 힘있을 때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니만 이렇게 힘없고 늙어 빠졌를 때야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불가능한 일을 하라니.말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데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네가지의 장애가 있었습니다.
1.첫째는 애굽왕 바로와 그 백성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2.둘째는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고'라는 유행가를 매일 불러대면서 애굽에서 터전을 잡고 수백년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3. 세째는 도대체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산넘고 물건너 간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으로 시대가 수천년 흐르고 흘러서 자동차,기차, 여객선,비행기가 나온다면야 한번 해볼만 하겠지만요.
4. 네째는 이미 '가나안 땅'에서 잘살고 있는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 족속,여부스 족속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래서 잘 알다시피 애굽의 '열재앙 사건'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되는데 까지는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순종하여 나아가는데 이게 웬일 입니까 처음으로 심각한 장애에 부탁치게 되는데 그게 뭡니까 잘 알다시피 바로 '홍해'였으며 그리고 뒤쫓아 오는 애굽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는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 이전의 문제들은 '모세' 혼자서 겪게 되는 문제였지만 이제 이것은 '모세' 의 시련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시련이었는데 그 시련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자세가 너 무나도 대조적이기에 이것을 오늘 설교말씀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앞에는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이를 갈면서 쳐들어 오는 애굽군대라.우리는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 이 구절을 대하지만 만일 우리가 바 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마! 거기까지 갈 것없습니다. 사업이 부도가 났는데 '빛쟁이'가 쳐들어 온다고 해봅시다. 심정이 어떨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는 말이 매우 설득적입니다. 출 14: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로 이런 뜻입니다. '봐라 내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괜히 말도 안되는 일을 하다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도데체 당신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우리를 이곳에 이끌어 내어 몰살당하게 하느냐' 이 말씀은 두가지를 추론시켜주는데1.첫째, 성경구절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모세'가 애굽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2.둘째,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무언가 깊이 있는 생각을 할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예리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원로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말의 핵심은 거의 결정적입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정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죽는 거 보다야 종살이 하는게 낫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는 지혜'가 정말 돋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하나님의 뜻때로 행 하다가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 서 승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짜피 죽을 거라면 '전쟁터에서는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뜻을 일미리미터라도 더 행하여나가다가 죽는다면 영광스런 것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서 가는데 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살고, 죽는 문제는 정말 지극히 작은 문제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되느냐 아니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내가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하는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오로지 인간의 길흉화복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죽을 것이고, 살리시면 살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자는 이 온 우주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생명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느냐 죽느 냐는 이런 작은 문제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력이 이 세상에서 증거되고 증명되어지는 일이 핵심사항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위력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장소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려야 한다는 지극히 중차대한 문제보다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 생명을 부지할 것인가에 대해 더 신경 을 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와는 대조적인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먼저 믿음이 없는 자들을 권고하는 위치에 섯습니다. 보통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지는데 매일 시험에 빠지면서 '권고' 받는 사람들과, 자기도 어려운 지경에 있으면서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권고'하는 사람들 입니다. 목사님들은 보통 '권고하는' 위치에 서게됩니다. 수없이 시험에 빠지는 벼라별 스타일의 교인들과 접촉하면서 목사님들은 '권고'합니다.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도우실거예요.' '자매님 실망하지마세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아니! 세상에 무얼 믿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저 자신에게도 이렇게 물어보 니까.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손바닥 만한 개척교회 임대료도 정말 간신히 내는 사람이. 무언가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도 않고 자기자신의 문제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어려운 지경에 있으면서도 그냥 큰 소리만 빵빵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돈도 없어서 보태줄 수도 없는 사람이,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잘난 사람보 다 못난 사람들 밖에 없어서 빽도 없는 사람이 정말 이렇게 큰소리쳐도 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말 큰소리 빵빵쳐도 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주의 종의 바로 옆에 언제나! 늘! 항상! 함께계시며 또한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서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큰소리를 들어봅시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중 그 아들 이삭에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아버지 칼과 불은 있는데 도대체 하나님께 드릴 양은 어디있는 겁니까' 찌져지게 아픈 가슴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결코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막연한 희망의 날을 합니다.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니 세상에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친히 준비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런 말 안했어요. 그냥 '독자 이삭을 바쳐라'고만 했어요. 아브라함이 한 말은 단지 막연한 희망의 말이었을 따름입니다. 목회자들은 보통 수많은 절망적 삶의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결코 '절망'의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동일한 바탕의 토대 위에서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장로님 실망하지 마세요. 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강단에서는 '할 수 있다!'라고 단호히 희망의 멧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절대절명의 위기상황 속에 있었던 '모세'의 모습이었는데바로 이 모습이 믿음이 없이 우왕좌왕/ 혼비백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없이 따라나온 그들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영광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문제가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의 빈약함을 이같은 위기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여주고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뒤로도, 좌로도, 우로도 가지말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라! (출14:15)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같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가장 정확한 해답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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