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비유 (마21:23-32)
본문
1.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 본문은 고난주간 화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그 당시 종교지도자들 즉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께 올무를 씌워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이러한 목적으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지금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그들의 근본 목적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도리어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인위적인 인간으로부터의 세례냐고 물으셨습니다.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질문을 했던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오히려 질문으로 답변하심으로써 저들을 역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 질문에 난처해진 이들이 모른다고 답변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심으로 일단 저들의 예봉을 꺾으신 후에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이 논쟁을 보면서 자기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간교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또 예수님은 신적인 지혜를 가지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너무나 저들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질문과 비유를 통해서,더 놀라운 것은 세례 요한을 들어서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두 아들의 비유의 핵심 교훈 두 아들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안나오고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기록입니다.아마도 그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할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야고보서 1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당시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기는 부지런히 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았습니다.그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굉장한 도전과 충격을 가져다줍니다.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그러나 듣기만 하고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두 아들의 비유의 핵심은첫째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려는 데 주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회개한 자에게는 그들이 비록 창기와 같고 세리와 같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하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3.두 아들
첫째로 맏아들이 한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을 때에 그는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여기서 ‘아버지여’라는 말은 맏아들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또한 여기서 맏아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을 뜻합니다.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행함이 없는 현대의 수많은 교인들,바로 우리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여기서 맏아들의 ‘가겠소이다’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신앙고백은 굉장히 중요하며 꼭 필요합니다.그러나 문제는 이 맏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도 없는 신앙고백을 할 때의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사도신경으로 혹은 주기도문을 외우며 신앙고백을 합니다.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그것과 거리가 멉니다.이 맏아들처럼 입으로만 ‘아버지여 가겠소이다’하며 건성으로 하는 신앙고백은 사실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둘째로 아버지가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얘기했을 때에둘째 아들은 ‘아버지여’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여기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둘째 아들이 이방인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했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도 못했고 믿지고 않았습니다.그는 ‘싫소이다’라고 완고하게 거절했습니다.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일반적인 행동과 사고입니다.인간들은둘째 아들처럼 굉장히 완고합니다.하나님의 뜻을 거절해놓고 마음에 어떤 고통이나 갈등이 없습니다.얼마나 무서운 마음입니까
그런데둘째 아들을 핑계삼아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의 길을 가다가 나중에 변명합니다.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물론 지금 죄를 짓다가 영영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낫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후에 반드시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4.두 아들의 비유가 주는 교훈
첫째는 우리는 다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두가 다 일을 해야만 합니다.‘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명령에는 예외가 없습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특별히 선교사역을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오늘날 53억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 5억이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2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선교학에서는 미전도족속(Unreached People) 들이 전인구의 40퍼센트라고 합니다.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서 일해야 할 포도원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포도원에 가서 하는 일은 아버지 하나님의 일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개인의 포도원의 일이라든지,내 직장,내 유익,편안함,내 영광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셋째는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28절에 “……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했습니다.여기에서 이 ‘얘’라는 말은 ‘아들아’하는 말의 준말입니다.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얘들아’하시며 우리를 아들,딸로 불러주십니다.그리고는 우리들에게 일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는 오늘,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지금 현재만이 나의 시간입니다.어제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고,내일은 나에게 없을지도 모릅니다.현재의 나에게는 지금 해야 할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다섯째로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를 두려워한다는 점입니다.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본문에 나온 이 악인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두려워 했습니다(26절).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사람들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는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입니다.여섯째로 예수님은 유대인을 세리와 창기와 비교하여 결론을 내렸습니다.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또한 유대인들이 죄인시하여 만나지도 않고 대화하지도 않는 저들의 믿음이 스스로 거룩한 택민이라고,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보다 낫다고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얼마나 치욕스러운 비교입니까 그러나 이 비교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이 비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다음으로는 진정한 믿음의 결과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축복을 주신다는 점입니다.또 이 비교의 말씀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있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책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얘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십니다.주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선교하기를 원하고 원하시는데 맏아들처럼 입으로만 ‘예 가겠소이다.예,보내겠소이다’ 대답만 해놓고 행하지 않은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비록 늦게나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그래서 먼저 믿은 우리들이 나중되는 일이 없기를,그날에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부끄러워 숨는 자가 우리 중에는 하나도 없고,모두가 주님이 씌워주시는 빛나는 면류관을 다 받아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두 아들의 비유의 핵심 교훈 두 아들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안나오고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기록입니다.아마도 그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할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야고보서 1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당시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기는 부지런히 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았습니다.그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굉장한 도전과 충격을 가져다줍니다.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그러나 듣기만 하고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두 아들의 비유의 핵심은첫째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려는 데 주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회개한 자에게는 그들이 비록 창기와 같고 세리와 같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하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3.두 아들
첫째로 맏아들이 한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을 때에 그는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여기서 ‘아버지여’라는 말은 맏아들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또한 여기서 맏아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을 뜻합니다.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행함이 없는 현대의 수많은 교인들,바로 우리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여기서 맏아들의 ‘가겠소이다’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신앙고백은 굉장히 중요하며 꼭 필요합니다.그러나 문제는 이 맏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도 없는 신앙고백을 할 때의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사도신경으로 혹은 주기도문을 외우며 신앙고백을 합니다.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그것과 거리가 멉니다.이 맏아들처럼 입으로만 ‘아버지여 가겠소이다’하며 건성으로 하는 신앙고백은 사실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둘째로 아버지가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얘기했을 때에둘째 아들은 ‘아버지여’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여기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둘째 아들이 이방인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했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도 못했고 믿지고 않았습니다.그는 ‘싫소이다’라고 완고하게 거절했습니다.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일반적인 행동과 사고입니다.인간들은둘째 아들처럼 굉장히 완고합니다.하나님의 뜻을 거절해놓고 마음에 어떤 고통이나 갈등이 없습니다.얼마나 무서운 마음입니까
그런데둘째 아들을 핑계삼아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의 길을 가다가 나중에 변명합니다.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물론 지금 죄를 짓다가 영영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낫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후에 반드시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4.두 아들의 비유가 주는 교훈
첫째는 우리는 다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두가 다 일을 해야만 합니다.‘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명령에는 예외가 없습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특별히 선교사역을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오늘날 53억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 5억이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2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선교학에서는 미전도족속(Unreached People) 들이 전인구의 40퍼센트라고 합니다.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서 일해야 할 포도원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포도원에 가서 하는 일은 아버지 하나님의 일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개인의 포도원의 일이라든지,내 직장,내 유익,편안함,내 영광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셋째는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28절에 “……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했습니다.여기에서 이 ‘얘’라는 말은 ‘아들아’하는 말의 준말입니다.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얘들아’하시며 우리를 아들,딸로 불러주십니다.그리고는 우리들에게 일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는 오늘,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지금 현재만이 나의 시간입니다.어제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고,내일은 나에게 없을지도 모릅니다.현재의 나에게는 지금 해야 할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다섯째로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를 두려워한다는 점입니다.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본문에 나온 이 악인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두려워 했습니다(26절).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사람들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는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입니다.여섯째로 예수님은 유대인을 세리와 창기와 비교하여 결론을 내렸습니다.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또한 유대인들이 죄인시하여 만나지도 않고 대화하지도 않는 저들의 믿음이 스스로 거룩한 택민이라고,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보다 낫다고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얼마나 치욕스러운 비교입니까 그러나 이 비교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이 비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다음으로는 진정한 믿음의 결과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축복을 주신다는 점입니다.또 이 비교의 말씀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있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책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얘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십니다.주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선교하기를 원하고 원하시는데 맏아들처럼 입으로만 ‘예 가겠소이다.예,보내겠소이다’ 대답만 해놓고 행하지 않은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비록 늦게나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그래서 먼저 믿은 우리들이 나중되는 일이 없기를,그날에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부끄러워 숨는 자가 우리 중에는 하나도 없고,모두가 주님이 씌워주시는 빛나는 면류관을 다 받아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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