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주의할 제자의 길 (마8:18-22)
본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길을 인도하는 나침반과 같고 등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광야에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표시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성막을 항상 두르고 있었고 밤에는 불기둥이 두루 비추고 있었습니다. 혹 하나님의 뜻 이 있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할 때는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게 됩니다. 구름 기둥이 가고 불기둥이 가면 이스라엘백성은 전부 짐을 꾸려서 구름기둥이 100미터를 가 면 100미터만 가다가 정지해야하고 열흘길을 가면 열흘길을 가야 했고 산으로 가면 산 으로, 광야로 가면 광야로 가야했다. 어떤 때는 구름기둥이 가는 대로 가고 어떤 때는 불기둥이 가는 대로 가야 했다. 구름기둥은 낮이니까 가기가 쉽지만 불기둥은 밤입니다. 아이구 하나님이여 밤입니다. 잠이나 자고 갑시다. 그것도 안됩니다. 밤에 불기둥이 움 직이면 밤에 출발하고 새벽에 움직이면 새벽에 움직이고 밤 한시에 움직이면 한시에 출 발입니다. 잠들락말락할 때 움직이면 잠들락말락할 때 가야하지 피곤하니까 좀 자고 갈 랍니다. 내일 아침에 날이나 새면 갑시다. 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과 같은 말씀이므로 이 말씀을 자세히 조심스럽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어찌 보면 이 말씀들은 따로따로 별로 관련 없는 말 같지만 18 절이 근원이 되어서 나머지 22절까지의 말씀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리의 눈은 없으나 성령님께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것을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잘났거나 남들 같이 대우받는 사람도 아니고 남들처럼 학문에 능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게 하시니까 보는 것이고 알게 하시니까 아는 것이 고 전하게 하시니까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저 지팡이와 같고 막대기와 같고 마이크 와 같아서 소리나는 내는 사람이 내는 대로 울리는 것이 스피커이듯이 저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많은 말씀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한 말이란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깨달을 수도 없는 말이 많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녁의 이 말씀도 주의해서 들읍시다. 오전의 말씀도 별로 설교할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문둥병자의 병이 나았구나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병도 낫게 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신앙의 한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따랐지만 이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처럼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허 다한 무리는 소용이 없습니다. 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아야지 고침 안 받고 허다한 무리로 따라 다니는 사람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고난 이 오고 시험이 오면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가 버릴 사람들인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교훈 요약과 감사
문둥병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주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 은 옷 가만 만져도 나을 줄 믿었고 어떤 사람은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 알았고 이 사람은 원하시기만 하셔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줄로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잡고 흔들 어야 낫는 줄 아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후벼파서 꺼집어 내어야 낫는 줄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 문둥병자는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로, 깨끗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 믿음!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으 면서 교회는 무엇을 하려고 왔느냐 말입니다. 믿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 냐 주님은 능하신 분이라는 것 주님은 죄를 사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요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에 능하신 분이요,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가겠나이다. 꺽으라면 꺽 고 죽이라면 죽이고 거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나이다 하여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문둥병자가 그냥 나올 수 있습니까 죽을 것을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돌에 맞아 죽을 것까지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또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놀려도 놀림 을 받을 각오를 했고, 모든 수모 부끄러움 죽음까지 각오도 하고 나왔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모범된 길은 주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나아와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 문둥병자가 얼 마나 겸손했고 간절했는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주님 앞에 나와서 뻣뻣하게 서서 주님 나를 고쳐줄랍니까 말랍니까 이렇게 했을까요. 아마 말을 잇지를 못했을 것 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야말로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딱 해서 그냥 돌아설 수 없도록 주님의 발을 붙잡고 통사정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간 절히 간구하는 사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병을 고쳐 주셨고 그는 즉시 깨끗 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믿었던 믿음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란 말입니다. 조금 믿는 사람은 조금 되고 많이 믿는 사람은 많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 없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아요 자기에 게 무슨 일이 안 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아요 믿음대로 되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하 겠어요 자기 믿음이 그만큼 밖에 안되니까 그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나을 줄 믿었던 사람이면 완전하게 나았고 조금만 나을 줄 알았던 사람은 조금 만 나았을 것 입니다. 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거든요 믿음대로 될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자세히 생각하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될 줄로 압니다.
무리를 돌려보내시려는 주님
오늘 18절의 말씀도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좀 이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왜 무리가 이렇 게 에워싸는데도 가시려 했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볼 때 이곳은 좁고 지 형이 평탄치 못하니 넓고 좋은 장소로 가서 말씀도 더 듣고 병자도 더 고치자라는 말씀으로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예 이 무리들은 돌려보내고 이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무리가 있기에 주님이 있는 것입니다. 오전 설교에 허다한 무리는 소용도 없고 한 문둥병자만 이 교회에 필요한 것처럼 잘못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이 허다한 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산상 설교도 하신 것이고 많은 병자들도 그 속에서 나온 것잔순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자세히 생각하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될 줄로 압니다.
무리를 돌려보내시려는 주님
오늘 18절의 말씀도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좀 이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왜 무리가 이렇 게 에워싸는데도 가시려 했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볼 때 이곳은 좁고 지 형이 평탄치 못하니 넓고 좋은 장소로 가서 말씀도 더 듣고 병자도 더 고치자라는 말씀으로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예 이 무리들은 돌려보내고 이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무리가 있기에 주님이 있는 것입니다. 오전 설교에 허다한 무리는 소용도 없고 한 문둥병자만 이 교회에 필요한 것처럼 잘못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이 허다한 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산상 설교도 하신 것이고 많은 병자들도 그 속에서 나온 것 놀랐다는 말 속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요 그래! 맞다! 바로 이분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 선지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따르자! 이분을 따르자! 그들은 결심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결 사적으로 따르기로 각오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은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이런 각오가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은 떠나시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한 서기관이었고, 또한 제자였습니다. 어디 예수님을 따르겠 다고 한 사람이 이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은혜 받은 사람 모두는 동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결심을 하는 무리의 중심을 보신 주님은 여기 또한 번의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없지만)-너희들에게 대단한 결심이 선 줄로 내가 안다. 그러나 너희가 그렇게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데는 두 가지 주의해야할 것이 있으니 이 두 가지를 조 심하여라-하시는 당부의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주의할 일은 설교요 당부 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자청하는 서기관
첫째, 한사람의 서기관이 앞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서기관은 백성의 지도자급의 사람입니다. 서기관이 되려면 일찍부터 서기관 수업을 받게 되는데 서기관으로 지목이 되는 사람은 5세 때부터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바 미츠바'라는 교육기관에서 율법 고 등교육을 29세까지 받고 30세가 되어서야 서기관으로 임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이 나아와서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이 말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그는 지금 까지 율법학교에 서 많은 스승에게서 율법과 다른 학문을 배웠지만 이만큼 위대한 스승을 만나보지 못하 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승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능력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하면서 주를 따르 겠다고 하는 예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이 서기관이 무엇을 생각 하였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이 사람을 돌려보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됩니다.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뜻은, 그 첫 번째의 가정-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나중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시니 베 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마태복음 26:3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서기관도 예수님을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고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자기는 따르겠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정-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속셈이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 려고 한 목적이 순수한 신앙심의 동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다른 율법사나 유대 교를 따르는 사람들 보다 성공의 확률이 높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한 곳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다름 아닌 사도행전8:18절에 마술사 시 몬이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 행함과 사람들의 성령님 받음을 보고는 미혹을 받아 성령님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베드로는 "네 은과 함께 네가 망 할 지어다."라고 저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관이 어떤 이유이었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는 알 수가 없으나 제가 볼 때는 두 번째의 가정이 옳지 않겠느냐고 본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이 제의를 받으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면, 많은 주석가들의 판단에는 이 서기관은 아직 덜 준비된 제자였으므로, 주님은 그의 제 의를 거부하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그의 이 위대한 제의를 거부 하셨다면 그 것은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의 제자들의 대답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 감정이나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로는, 그의 태도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자신이 한 말대로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했다면, 주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때 그래도 주를 따르겠나이다. 허락만 하여 주소서라고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 실망하고 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 볼 때 이 서기관의 제의에는 주를 따르므로 부가적인 수입을 얻으려 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키신 이유는 허다한 무리들에 대한 주님의 또 다 른 설교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허다한 무리들은 말씀을 듣고 놀 랐고 후에 이적 행하심을 보고 두 번이나 놀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 주님을 따르 기로 결심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려 하시지 않고 그들을 각 자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거저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보고들은 그 믿음을 가지 고 살려면 이 서기관과 같은 유혹이나 잘못 된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교회 생활을 하는데는 이 같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주의 은 혜에 감사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려 하는 이들 특히 어떤 이는 중증장애자 선교회라는 이름아래 여러 교회와 선교 단체들로부터 모금 운동을 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고 교회를 이용하 여 정치의 발판을 삼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교회의 진정한 복음 운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앞에 나섰던 마술사 시몬은 돈을 벌려고 했고 이 서기관은 이 인기 있는 도를 이용하여 자기의 대우를 높이고 섬기는 종의 자세 가 아니라 남에게 대우받고 자기의 지위를 높이려 했던 생각을 버리라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의 도는 외로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희생의 길인데 이 외로움과 고난과 희 생을 말하니까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라면 이 서기관은 바른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 이며 허다한 무리들 역시 지금까지 듣고 보고 믿고 결심한 이 새 길을 가려고 하는데, 제일 먼저 도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의 유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하여 경계해야 될 줄 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사람 제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리고 나서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제자가 한 말 중 죽은 부친의 장사를 어떻게 해 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죽은 부친의 장사를 하라 하지 말라는 장례 법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효도를 주장하십니다. 주님이 5계명을 모르시는 분도 아니시며, 에베 소서에는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버지의 장사에도 참석하지 말고 너는 내 뒤만 따라 다 녀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권고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 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할 때에 경고하신 것처럼 주의 계명을 어겨가면서 장사하고 이 를 보려고 하는 일이나 주의 일보다 세상일을 앞세우는 일들을 경고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부친이 죽더라도 장사하지 말라는 불효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일 이든, 주의 일보다 더 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이 제자의 변명처럼 돈 좀 벌어 놓고 , 자녀대학에 보내 놓고, 집이나 한 칸 마련해 놓고, 그후에 주일도 지키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신앙 생활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127편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업도 여호와께서 지켜 주셔야 성공이 되는 것이고, 학업도 여호와의 계명 테두리에서 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버리고 사업부터 성공 시켜 보겠다 하는 사람이나 주일을 어겨 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두 번째 주님의 설 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당신의 충실한 제자들인 허다한 무리들을 각 사역지로 파송 하시는 자리에서(특별한 의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두 가지 당부의 설교를 하시는 것 을 보았습니다. 이 허다한 무리들은 이제 이 두 교훈의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의 째는 주의 도는 외로움과 고난과 희생의 도이니 너희는 이 도를 이용하여 머리가 되려고도 말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도 말아라 하는 말씀이요. 두 번째는 주의 계명 테두리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여라. 즉, 계명을 어 겨가면서 한 일은 성공 같으나 실패요 나와 나의 경제를 살리는 것 같으나 죽이는 것이 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이 어디 그때 그 무리들에게 대한 말씀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당부하시고 경고하시는 말씀이므로 우리는 조심하여 주님께 그릇 같이 쓰이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어찌 보면 이 말씀들은 따로따로 별로 관련 없는 말 같지만 18 절이 근원이 되어서 나머지 22절까지의 말씀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리의 눈은 없으나 성령님께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것을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잘났거나 남들 같이 대우받는 사람도 아니고 남들처럼 학문에 능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게 하시니까 보는 것이고 알게 하시니까 아는 것이 고 전하게 하시니까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저 지팡이와 같고 막대기와 같고 마이크 와 같아서 소리나는 내는 사람이 내는 대로 울리는 것이 스피커이듯이 저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많은 말씀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한 말이란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깨달을 수도 없는 말이 많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녁의 이 말씀도 주의해서 들읍시다. 오전의 말씀도 별로 설교할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문둥병자의 병이 나았구나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병도 낫게 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신앙의 한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따랐지만 이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처럼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허 다한 무리는 소용이 없습니다. 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아야지 고침 안 받고 허다한 무리로 따라 다니는 사람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고난 이 오고 시험이 오면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가 버릴 사람들인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교훈 요약과 감사
문둥병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주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 은 옷 가만 만져도 나을 줄 믿었고 어떤 사람은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 알았고 이 사람은 원하시기만 하셔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줄로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잡고 흔들 어야 낫는 줄 아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후벼파서 꺼집어 내어야 낫는 줄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 문둥병자는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로, 깨끗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 믿음!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으 면서 교회는 무엇을 하려고 왔느냐 말입니다. 믿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 냐 주님은 능하신 분이라는 것 주님은 죄를 사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요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에 능하신 분이요,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가겠나이다. 꺽으라면 꺽 고 죽이라면 죽이고 거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나이다 하여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문둥병자가 그냥 나올 수 있습니까 죽을 것을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돌에 맞아 죽을 것까지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또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놀려도 놀림 을 받을 각오를 했고, 모든 수모 부끄러움 죽음까지 각오도 하고 나왔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모범된 길은 주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나아와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 문둥병자가 얼 마나 겸손했고 간절했는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주님 앞에 나와서 뻣뻣하게 서서 주님 나를 고쳐줄랍니까 말랍니까 이렇게 했을까요. 아마 말을 잇지를 못했을 것 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야말로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딱 해서 그냥 돌아설 수 없도록 주님의 발을 붙잡고 통사정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간 절히 간구하는 사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병을 고쳐 주셨고 그는 즉시 깨끗 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믿었던 믿음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란 말입니다. 조금 믿는 사람은 조금 되고 많이 믿는 사람은 많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 없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아요 자기에 게 무슨 일이 안 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아요 믿음대로 되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하 겠어요 자기 믿음이 그만큼 밖에 안되니까 그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나을 줄 믿었던 사람이면 완전하게 나았고 조금만 나을 줄 알았던 사람은 조금 만 나았을 것 입니다. 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거든요 믿음대로 될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자세히 생각하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될 줄로 압니다.
무리를 돌려보내시려는 주님
오늘 18절의 말씀도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좀 이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왜 무리가 이렇 게 에워싸는데도 가시려 했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볼 때 이곳은 좁고 지 형이 평탄치 못하니 넓고 좋은 장소로 가서 말씀도 더 듣고 병자도 더 고치자라는 말씀으로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예 이 무리들은 돌려보내고 이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무리가 있기에 주님이 있는 것입니다. 오전 설교에 허다한 무리는 소용도 없고 한 문둥병자만 이 교회에 필요한 것처럼 잘못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이 허다한 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산상 설교도 하신 것이고 많은 병자들도 그 속에서 나온 것잔순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자세히 생각하고 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될 줄로 압니다.
무리를 돌려보내시려는 주님
오늘 18절의 말씀도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좀 이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왜 무리가 이렇 게 에워싸는데도 가시려 했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볼 때 이곳은 좁고 지 형이 평탄치 못하니 넓고 좋은 장소로 가서 말씀도 더 듣고 병자도 더 고치자라는 말씀으로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예 이 무리들은 돌려보내고 이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무리가 있기에 주님이 있는 것입니다. 오전 설교에 허다한 무리는 소용도 없고 한 문둥병자만 이 교회에 필요한 것처럼 잘못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이 허다한 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산상 설교도 하신 것이고 많은 병자들도 그 속에서 나온 것 놀랐다는 말 속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요 그래! 맞다! 바로 이분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 선지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따르자! 이분을 따르자! 그들은 결심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결 사적으로 따르기로 각오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은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이런 각오가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은 떠나시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한 서기관이었고, 또한 제자였습니다. 어디 예수님을 따르겠 다고 한 사람이 이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은혜 받은 사람 모두는 동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결심을 하는 무리의 중심을 보신 주님은 여기 또한 번의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없지만)-너희들에게 대단한 결심이 선 줄로 내가 안다. 그러나 너희가 그렇게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데는 두 가지 주의해야할 것이 있으니 이 두 가지를 조 심하여라-하시는 당부의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주의할 일은 설교요 당부 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자청하는 서기관
첫째, 한사람의 서기관이 앞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서기관은 백성의 지도자급의 사람입니다. 서기관이 되려면 일찍부터 서기관 수업을 받게 되는데 서기관으로 지목이 되는 사람은 5세 때부터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바 미츠바'라는 교육기관에서 율법 고 등교육을 29세까지 받고 30세가 되어서야 서기관으로 임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이 나아와서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이 말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그는 지금 까지 율법학교에 서 많은 스승에게서 율법과 다른 학문을 배웠지만 이만큼 위대한 스승을 만나보지 못하 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승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능력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하면서 주를 따르 겠다고 하는 예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이 서기관이 무엇을 생각 하였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이 사람을 돌려보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됩니다.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뜻은, 그 첫 번째의 가정-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나중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시니 베 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마태복음 26:3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서기관도 예수님을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고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자기는 따르겠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정-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속셈이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 려고 한 목적이 순수한 신앙심의 동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다른 율법사나 유대 교를 따르는 사람들 보다 성공의 확률이 높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한 곳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다름 아닌 사도행전8:18절에 마술사 시 몬이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 행함과 사람들의 성령님 받음을 보고는 미혹을 받아 성령님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베드로는 "네 은과 함께 네가 망 할 지어다."라고 저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관이 어떤 이유이었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는 알 수가 없으나 제가 볼 때는 두 번째의 가정이 옳지 않겠느냐고 본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이 제의를 받으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면, 많은 주석가들의 판단에는 이 서기관은 아직 덜 준비된 제자였으므로, 주님은 그의 제 의를 거부하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그의 이 위대한 제의를 거부 하셨다면 그 것은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의 제자들의 대답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 감정이나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로는, 그의 태도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자신이 한 말대로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했다면, 주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때 그래도 주를 따르겠나이다. 허락만 하여 주소서라고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 실망하고 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 볼 때 이 서기관의 제의에는 주를 따르므로 부가적인 수입을 얻으려 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키신 이유는 허다한 무리들에 대한 주님의 또 다 른 설교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허다한 무리들은 말씀을 듣고 놀 랐고 후에 이적 행하심을 보고 두 번이나 놀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 주님을 따르 기로 결심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려 하시지 않고 그들을 각 자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거저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보고들은 그 믿음을 가지 고 살려면 이 서기관과 같은 유혹이나 잘못 된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교회 생활을 하는데는 이 같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주의 은 혜에 감사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려 하는 이들 특히 어떤 이는 중증장애자 선교회라는 이름아래 여러 교회와 선교 단체들로부터 모금 운동을 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고 교회를 이용하 여 정치의 발판을 삼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교회의 진정한 복음 운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앞에 나섰던 마술사 시몬은 돈을 벌려고 했고 이 서기관은 이 인기 있는 도를 이용하여 자기의 대우를 높이고 섬기는 종의 자세 가 아니라 남에게 대우받고 자기의 지위를 높이려 했던 생각을 버리라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의 도는 외로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희생의 길인데 이 외로움과 고난과 희 생을 말하니까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라면 이 서기관은 바른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 이며 허다한 무리들 역시 지금까지 듣고 보고 믿고 결심한 이 새 길을 가려고 하는데, 제일 먼저 도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의 유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하여 경계해야 될 줄 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사람 제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리고 나서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제자가 한 말 중 죽은 부친의 장사를 어떻게 해 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죽은 부친의 장사를 하라 하지 말라는 장례 법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효도를 주장하십니다. 주님이 5계명을 모르시는 분도 아니시며, 에베 소서에는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버지의 장사에도 참석하지 말고 너는 내 뒤만 따라 다 녀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권고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 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할 때에 경고하신 것처럼 주의 계명을 어겨가면서 장사하고 이 를 보려고 하는 일이나 주의 일보다 세상일을 앞세우는 일들을 경고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부친이 죽더라도 장사하지 말라는 불효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일 이든, 주의 일보다 더 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이 제자의 변명처럼 돈 좀 벌어 놓고 , 자녀대학에 보내 놓고, 집이나 한 칸 마련해 놓고, 그후에 주일도 지키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신앙 생활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127편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업도 여호와께서 지켜 주셔야 성공이 되는 것이고, 학업도 여호와의 계명 테두리에서 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버리고 사업부터 성공 시켜 보겠다 하는 사람이나 주일을 어겨 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두 번째 주님의 설 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당신의 충실한 제자들인 허다한 무리들을 각 사역지로 파송 하시는 자리에서(특별한 의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두 가지 당부의 설교를 하시는 것 을 보았습니다. 이 허다한 무리들은 이제 이 두 교훈의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의 째는 주의 도는 외로움과 고난과 희생의 도이니 너희는 이 도를 이용하여 머리가 되려고도 말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도 말아라 하는 말씀이요. 두 번째는 주의 계명 테두리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여라. 즉, 계명을 어 겨가면서 한 일은 성공 같으나 실패요 나와 나의 경제를 살리는 것 같으나 죽이는 것이 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이 어디 그때 그 무리들에게 대한 말씀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당부하시고 경고하시는 말씀이므로 우리는 조심하여 주님께 그릇 같이 쓰이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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