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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과 두 길 (마7:13-14)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려면 마태복음 5부터7장에 나오는 말씀을 전부 읽어보아야 이해할수가 있는데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기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들에게 하신 산상복음이라는 것인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산상보훈 끝 부분에 해당되는 결론부분이라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게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가지 내가 너희에게 장시간동안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는대 어떻게 들었고 어데게 이해한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인간답게 살아갈려고 한다면 지금가지 들은 말씀의 진리는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라는 것이며 그 좁은 길 끝에 가서야만 구원을 얻는 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즉 여기 두문.과 두길이 있는데 어느문.어느길로 갈것이냐며 그 선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택은 자유이겠지만 그길에서 통하는 마지막 운명은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문으로 들어섰으면 잘못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길중에 어느문으로 들어서든 자유이지만 그로인한 결과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의미하고 잇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속에 나타나고 있는것인 양극의 상태인 흑백의 논리가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선이있고 악이 있는가 하면 사실은 그어느것이라도 말 할수 없는 모호한 중간 상태도 있습니다(중립적인상태) 그때문에 흔만 말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비판을 할수밖에 업슨 입장을 말하는 현실이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오직 두문과 두길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의가 아니면 불의라는 흑과 백 둘중에 하나닐 뿐이지 모호한 중립적 상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두문.두길, 이제 죄인이냐 구원받은 자이냐. 또한 생명이냐 죽이니냐. 그리고 천국이냐 지옥니냐 아니면 그리스도냐.마귀냐.일뿐이지 여기에 중간 상태의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게서는 엄격하게 말씀을 하시기를 주님의 말씀을 좇아 그 뒤를 따르는 데에는 다른 소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을 따라가든지 아니면 아닌것인 그둘중 어느 하나이지 따르는 것도 아니요 안따르는 것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는 예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직 두문 중의 하나요 두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두문을 옳은 것을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 선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두가지로 생각할수가 있는데.
1> 첫번째 기준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시점이 현재에 있느냐 미래에 있느 냐 하는 문제입니다, 좁은 문은 지금은 좁고 불편한 길이지만 저만큼 끝에는 영생이 있고 넓은 문의 넓은 길은 현재는 넓고 편하여 좋으나 저 앞에는 사망이 기다리 고 있으니 이는 결국 무엇을  즉 현재 지향적이냐 아니면 미래지향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비유의 결론은 생명을 위주로 사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요 육신을 위주로 사는 사람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눅가복음 13:23에 주여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이 있는 데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보니 너무나 어려워서 어떻게 하늘 나라에 갈수 있겠느냐는 질문인데 이에 예수님은 천국에 올 사람이 적다아니면몇 명이다하시지 않고 오직 한마디로"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예) 본문에서 문이라고 할때 오늘날 처럼 자동화 된 문이 아니리라. 그당시에는 성문을 고관대작들이(버슬한사람들) 출입하는 화려한 문이 있고 또 전쟁 터에서 승리하고 개선할때에 드너드는 큰 문이 있고.(개선문) 그외에 성 뒤에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이것은 성문을 닫은 후에 사용하는 문인데.그러니까 아침에 성문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닫게 되는데 어쩌다 그 만 늦게 들어오게 되면 이미 성문은 닫힌 터이라 부득불 나귀에서 내려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수 있는.그래서 별명이 바늘 구멍이라고도 하는 이 작은 문으로 몸을 구부려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것이 좁은 문인데 저들에게 있어서는 이 넓고 좁은 문에 대 한 이야기는 매일같이 경험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생각할수 있는 넓은 문이란 말을 탄 채 화려하게 자랑을 하며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 영광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들어갈수 있는 문이요 좁은 문이란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말을 탔으면 말에서 내려야 하고,, 짐을 졌으면 짐고 다 내린채 간신히 몸만 구부려 들어갈 수있는 그럼 문이 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때문에 그들에게 문이라는 개념이좁은 문과 큰문이라는 개념 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면 넓은 문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과 자랑. 그리고 자기의 업적.자기의 이름를 가지고 들어가는 문이요. 좁은 문이란 자기를 회개하며 말씀 중심에서 오직 내영혼.내생명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하는 자기 부정의 문을 말하는 것 입니다 이 좁은 문에서는 이제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광을 누리거나 부끄러운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하고 부한 것도 개의치 않아요. 오직 하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만을 생각하여 몸을 굽히고 자기 부정과 함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함께 갈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 을 향해 사흘 길을 이삭과 함께 가게 됩니다 당장 바치라고 하셨으면 그래도 바쳐버리고 말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제사흘 길을 그것도 바칠 제물인 이삭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가는 길에는 이렇게 함께 가지만 이제 돌아올 때에는 혼자 올것이란 밀 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사흘 길 그길이 얼마나 좁은 길이었겠는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좁은 길이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긴 순례의 길이요 넓은 길이란 지체없는 방탕의 길 ,자기 중심적인 길입니다 따라서 좁은 길을 찾는 이가 적어 외로운 길이요. 넓은 길은 쉽고 찾는 이가 많아 동반자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분면히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좁다는 것일 뿐이지 좁은 길도 길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좁은 길은 어려운 길이라는 이야기지 막힌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좁고 어려울 뿐이지 분명한 문이요,,길이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지금은 고생이 되지만 가능한 것이요,. 거기에 기쁨이 있거 의미가 있으며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 그러기에 좁은 길을 최후는 영생이요 이지만 넓은 길의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좁은 길은 절대화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 이길분인 길 이길은 상대적인 길이 아님은 물론 선택의 여지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가야만 하는 길 좁은 길 그대로 한 발자국 한발자국 갈 보리 언덕까지 따라 올라가야 할 뿐 다르게는 될수가 없는 길입니다 그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산상보훈의 긴 말씀을 마치신후 그 귀중한 결론으로 "이 길은 좁은 길이다.그러나 영생의 길이다"라고 말씀하고 잇는 것 입니다. 신앙인으로써 우리 주님과 하나님앞에 부끄러움 없는 길을 선택하셨셔 영광돌리며 사시는 귀산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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