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문 (창5:1-5)
본문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한 줄기는 두만강을 통해서 맑은 동해로 또한 줄 기는 압록강을 거쳐서 탁한 황해로 양분되어 흘러감과 같이 인류는 다 똑같이 한 아 담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범죄 후 인간은 두 무리로 갈라졌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다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육신적으로는 한 아 담과 하와의 후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은 다 똑같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며 선한 삶을 살아가는 의인의 조상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 반대로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악한 삶을 살아가는 악인의 조상도 있습니다.
1)하나는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나 무신론의 문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가인의 자 손들과 같은 불 신앙의 무리와
2)또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 가는 셋의 자손과 같은 신앙의 무리로 나누어진다면 과연 오늘의 나는 어느 무리 속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조상들에게서 태어났으며 또한 때가 되면 땅위에 자손 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가야만 할 조상들이라면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조상이 되 어야만 할까요
1.가인의 자손들(창4:16-24)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끝까지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가운데 범죄한 가인의 후손들조차도 생육하고 번성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잘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 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가인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없는 합당치 못한 제물을 드리고서도 그것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생 아벨을 미워하며 돌로 쳐죽이고서도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 에 거짓말로 숨기고 반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가인을 당장 죽이 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 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서도 끝내 회개치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있는 놋 땅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을 때에도 사랑의 하나님은 (창4:17)아내 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는 말씀과 같이 가인의 자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1)문화의 발달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살아가는 동안 가인의 대는 끊어지지 아니하고 이랏, 므후야엘, 므므사엘, 라멕, 야발, 두발가인으로 계속 이어져 가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어 갔습니다.
가.도시 문명의 발달(창4:16-17)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짐승과 달리 창의력을 가지고 태 어나기 때문에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게 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가인 은 그것을 가지고 도시문명의 건설에 사용한 것입니다.
나.예술의 발달(창4:21) 가인의 후손 중에서 (창4: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는 말씀처럼 수금과 퉁소를 만들어 음악을 시작하였으 니 인간이 악기를 만들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문화의 발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과학의 발달(창4:22) 역사가들이 말하는 세상 문명은 구석기 시대부터 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가인의 후손 중에서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 를 만드는 자요 라는 말씀과 같이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켜 농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대의 발전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2)사회악의 발달 우리는 이같은 가인의 후손들의 발달된 문화를 보면서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결과가 죽음으로 끝이 나버렸는데 반대로 동생을 죽인 가인은 이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문화가 발달될 수 있었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만 할 것은 가시적인 번성이나 발달만을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이며 최고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지상에서 베푸시는 마지막 밥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인 후에 자기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높은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어 불안한 마음들을 달 래며 남을 죽이는 도구인 무기를 만드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3)하나님을 떠난 결과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서 무신론의 문화를 건설하는 불신앙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하는 것을 가인의 문화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 가정 질서의 파괴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 중에 일부일처의 가정 윤리가 깨어지고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 으라는 말씀처럼 일부다처가 시작됨으로 가정 질서의 파괴 되었습니다.
나. 폭력의 난무 성경 최초에 시가 나오는데 그것은 라멕이 그의 아내들에게 들려준 살인자의 노래로서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무신론의 가인의 문화에 폭력과 살인과 복수가 자랑꺼리가 될 정도의 비정 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과 부모를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사는 가인의 가문에는 항상 불안이 감돌았으며 그것을 위안받기 위해서는 여자와 음악과 무기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Rorans는 말하기를 "사람이 불안을 느끼고 사는 것은 어떤 부도덕한 일에 대한 가 책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도덕 그 자체는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이 행복으로 통하는 입구이며 행복을 받을 만한 토대를 제 공하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인의 문화 이상으로 과 학이 발달하고 예술이 발달하였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신론에 빠져 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성도적의 부패와 사회악의 만연과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폭력이 연일 자 행되고 있으며 누가 자기에게 조그마한 손해를 입히기만 하여도 그것을 참지 못해 복수의 칼을 서슴없이 휘두르며 죄없는 사람들까지 몇 푼의 돈 때문에 무참하게 죽 이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며 곳곳에 테러와 살인과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는 불안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나 참된 도덕과 윤리의 근본 원리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제정하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2.셋의 자손들(창5:6-31)
의로운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의 문화가 가시적으로는 대단히 발전하고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바친 아벨은 그로 인해 도리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우리는 그 아벨을 불쌍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잡초는 농부가 뿌리고 가꾸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무성하게 잘 자라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기뻐하거나 관심을 두지 아니합니다. 농부의 관심은 비록 가믐과 홍수로 그 추수가 보잘 것 없이 작을지라도 오로지 알곡에 있기에 그것을 심고 가꾸는 일에 전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가인의 문화와 같이 무신론이 문화가 번성할지 라도 성도들이 미혹되거나 회의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가인과 같은 무신론의 문화의 번성이 아니라 셋의 가문과 같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으시며 그들 을 통해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계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었다고 의인의 맥을 끊으신 것이 아니라 (창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라는 말씀처럼 아벨 못지 않은 더 좋은 씨를 주셨으니 바로 셋이었습니다.
1).믿음의 회복 가인의 후손들의 하나님의 은혜로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벨 대신 하나님이 새로운 씨로 주신 셋과 그의 후손들은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 을 불렀더라는 말씀과 같이 오래 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여호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경배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2).자손의 번성 시간적이나 물량적인 면으로 볼 때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잡초같이 번성하는 데도 아벨 대신 주신 셋은 겨우 어린아이로 태어나 그 자라는 것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셋의 후손을 통해 새 역사를 준비하시고 번성하도곡 집중적으로 축복하 셨습니다. 가인과 달리 일부 일처의 가정이었지만 (창5: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셋의 가문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셋의 후손 중에 므드셀라는 (창5:27) 그는 구백 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 더라 고 한 말씀처럼 최장수를 누리며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3).신앙의 번성 가인의 가문 중에도 이름이 에녹과 라멕이 있었던 것처럼(창4:17,19), 셋의 후손 중에도 똑같은 이름의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창5:18,19). 그러나 차이점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손들이 번성할 때에 가인의 후손은 그와 더 불어 죄악이 번성하여 멸망의 길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나 셋의 후손은 번성할 수 록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좋은 믿음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4).에녹의 신앙 그 대표적인 자손이 바로 에녹으로 (창5: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 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시대는 (유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 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 첨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에녹이 살던 시대는 불경건한 시대로 사람들이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정욕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에녹은 자기 혼자서만 잘 믿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유 1: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며 하나님 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같은 에녹을 크게 축복하셔서 (창5:19) 에녹을 낳 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자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이 데려가시기까 지 하였습니다.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아벨을 억울하게 죽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죄업이 이 땅에 오셔서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실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아벨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돌에 맞아 죽었으나 첫 번째 순교자의 영광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며, 신앙의 맥은 끊어지지 아니하고 (눅3: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 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처럼 아벨을 대 신하여 태어난 셋을 통해서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예수님과 다리처럼 연결되어지는 믿음의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후손은 아무리 문화가 번성하였을지라도 노아의 홍수 심판 때 단 한 사람도 남김이 없이 다 몰살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생 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작이 늦다고 불안해하거나 진행이 미약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신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1)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셋의 자손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2) 내가 지금 얼마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셋의 하나님, 에녹의 하나님, 욥의 하나님으로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는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이 창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믿음의 조상들
오늘 우리는 저절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한 부모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한 그와 같이 이 땅에 자 손들을 남기고 가문의 대를 물려주고 갈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가인의 문화와 셋의 문화가 성벽의 경계가 없이한 가정, 한 가문, 한 사회 안에 공존하고 있는데 과연 오늘의 나는 가인의 편에 있는가 아 니면 셋의 편에 있는가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정녕 죽 으리라'는 말씀대로 반드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다 죽게 됩니다. 가인의 자손만이 아니라 셋의 자손인 므드셀라도 죽은 것처럼 장수는 할지라도 반 드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다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살고 빨 리 죽고 가 아니며, 문화가 발달하고 미개하고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는가에 좌우 되는 것입니다.
1)바른 가치관의 확립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살다가 보니 때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가시 적으로 번성하는 가인의 문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아벨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나와 나 의 후손들이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바로 살게 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는 믿음으로 의롭게 살던 아벨이 불의한 가인에게 핍박을 당하고 돌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가 부재하며 인류 역사의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믿음이 약해지거나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 을 셋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가인처럼 신앙의 맥이 끊겨진 채 아무리 많은 물질과 무신론의 문화와 과학을 유산 으로 물려준다고 해서 우리 자손들이 다 행복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가인의 문화와 같이 일시적으로 번성하는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본받고 사랑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이 세상의 쾌락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화:스타린의 8개 침실과 8세의 불치병 아이의 죽음
2)현대 문명의 허와 실 오늘도 무신론의 문화가 가시적으로는 얼마든지 과학을 발달시키고, 경제를 성장시 키며, 사람들을 편리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이 그리는 에덴의 행복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들처럼 갈수록 성도덕의 부패와 잔악한 폭력과 살인과 전쟁으로 갈 수록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며 자멸을 자초해 가고 있는 불안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삶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만족 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콘센트가 빠진 전구와 같 이 밝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1)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안전이 없습니다. 도시의 적을 막기 위해 높은 성을 쌓고 두터운 철대문을 하지만 안전함이 없습니다,
2) 가인의 자손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술을 마시고 약을 먹 고 마약을 하지만 마음과 정신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3)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사랑과 용서가 없습니다. 가인의 자손 라멕은 두 아내를 거느린 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사소한 피해를 준 사람이 어린 소년이라고 할지라도 용서하는 대 신 무자비하게 복수하고서도 그것을 도리어 시로 읊고 자랑할 정도로 그 마음이 강 퍅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없는 가슴은 용서나 이해나 사랑이 머물 자리가 없으 며, 그것은 영적인 어두움인 것입니다(요일2:11). 현대인들의 문제점은 도덕적인 중립의 입장을 견지한 채 타인에 대해 피해를 주지 않고 동시에 선행도 포기하고 누구에게 손해도 유익도 주지 아니하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서 자기를 가둔 채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무기력한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가인의 문화권에 서 있지는 않겠지만 미온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셋의 편에 있지도 못한 어중간한 처지에 있어서도 안될 것이며 보 다 더 적극적으로 셋의 편에 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주의는 개인의 삶을 편리하게 할 줄은 모르나 공동체 안에서 고 독하게 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악에게 물들지도 말아야만 하지만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 보다 더 적 극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선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진리에 대하여 열의가 없는 자는 결코 가인의 문화를 배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인의 문화와 같은 무신론의 악의 세력이 번성하는 것 같으나 그것에 현혹 되지 말고 셋의 후손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역사의 주 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잠13:22)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는 말씀처럼 변함없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과연 나는 지금까지 누구와 함께, 무엇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 현재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창세기 5장의 서두에 열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마지막이 죽었 더라는 말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자명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같은 죽음은 오고야 만다면 그 죽음이 오기 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신앙의 바톤을 후손들에게 바르게 물려 주는 믿음의 조상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우리의 믿음과 용기를 약화시키고 선하게 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회의하게 만들며 믿음의 용기를 좌절케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이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1) (시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라는 말씀 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마음과 생활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고 셋의 자손 들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 돌리며
2) 에녹이 (히11:5)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사람이 어느 누구와 동행한다고 하는 일은 (암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 찌 동행하겠으며 라는 말씀처럼 그 사람과 발걸음의 보폭을 맞추어서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말아야 함을 뜻하며, 그 사람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3) 가인의 자손 라멕처럼 남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아니라 (창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 하리라 하였더라는 말씀의 노아처럼 남을 위로 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가인의 일시적인 성장을 부러워하지 말며, 불경건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는 (시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잠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 르거니와 (잠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에녹과 동일한 축복을 약속하셨으니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바톤과 그들이 체험한 영적인 체험을 자신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예수님 오실 때까지 대대로 물려주는 믿음의 조상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1)하나는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나 무신론의 문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가인의 자 손들과 같은 불 신앙의 무리와
2)또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 가는 셋의 자손과 같은 신앙의 무리로 나누어진다면 과연 오늘의 나는 어느 무리 속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조상들에게서 태어났으며 또한 때가 되면 땅위에 자손 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가야만 할 조상들이라면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조상이 되 어야만 할까요
1.가인의 자손들(창4:16-24)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끝까지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가운데 범죄한 가인의 후손들조차도 생육하고 번성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잘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 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가인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없는 합당치 못한 제물을 드리고서도 그것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생 아벨을 미워하며 돌로 쳐죽이고서도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 에 거짓말로 숨기고 반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가인을 당장 죽이 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 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서도 끝내 회개치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있는 놋 땅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을 때에도 사랑의 하나님은 (창4:17)아내 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는 말씀과 같이 가인의 자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1)문화의 발달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살아가는 동안 가인의 대는 끊어지지 아니하고 이랏, 므후야엘, 므므사엘, 라멕, 야발, 두발가인으로 계속 이어져 가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어 갔습니다.
가.도시 문명의 발달(창4:16-17)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짐승과 달리 창의력을 가지고 태 어나기 때문에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게 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가인 은 그것을 가지고 도시문명의 건설에 사용한 것입니다.
나.예술의 발달(창4:21) 가인의 후손 중에서 (창4: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는 말씀처럼 수금과 퉁소를 만들어 음악을 시작하였으 니 인간이 악기를 만들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문화의 발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과학의 발달(창4:22) 역사가들이 말하는 세상 문명은 구석기 시대부터 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가인의 후손 중에서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 를 만드는 자요 라는 말씀과 같이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켜 농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대의 발전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2)사회악의 발달 우리는 이같은 가인의 후손들의 발달된 문화를 보면서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결과가 죽음으로 끝이 나버렸는데 반대로 동생을 죽인 가인은 이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문화가 발달될 수 있었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만 할 것은 가시적인 번성이나 발달만을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이며 최고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지상에서 베푸시는 마지막 밥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인 후에 자기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높은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어 불안한 마음들을 달 래며 남을 죽이는 도구인 무기를 만드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3)하나님을 떠난 결과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서 무신론의 문화를 건설하는 불신앙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하는 것을 가인의 문화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 가정 질서의 파괴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 중에 일부일처의 가정 윤리가 깨어지고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 으라는 말씀처럼 일부다처가 시작됨으로 가정 질서의 파괴 되었습니다.
나. 폭력의 난무 성경 최초에 시가 나오는데 그것은 라멕이 그의 아내들에게 들려준 살인자의 노래로서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무신론의 가인의 문화에 폭력과 살인과 복수가 자랑꺼리가 될 정도의 비정 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과 부모를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사는 가인의 가문에는 항상 불안이 감돌았으며 그것을 위안받기 위해서는 여자와 음악과 무기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Rorans는 말하기를 "사람이 불안을 느끼고 사는 것은 어떤 부도덕한 일에 대한 가 책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도덕 그 자체는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이 행복으로 통하는 입구이며 행복을 받을 만한 토대를 제 공하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인의 문화 이상으로 과 학이 발달하고 예술이 발달하였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신론에 빠져 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성도적의 부패와 사회악의 만연과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폭력이 연일 자 행되고 있으며 누가 자기에게 조그마한 손해를 입히기만 하여도 그것을 참지 못해 복수의 칼을 서슴없이 휘두르며 죄없는 사람들까지 몇 푼의 돈 때문에 무참하게 죽 이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며 곳곳에 테러와 살인과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는 불안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나 참된 도덕과 윤리의 근본 원리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제정하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2.셋의 자손들(창5:6-31)
의로운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의 문화가 가시적으로는 대단히 발전하고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바친 아벨은 그로 인해 도리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우리는 그 아벨을 불쌍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잡초는 농부가 뿌리고 가꾸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무성하게 잘 자라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기뻐하거나 관심을 두지 아니합니다. 농부의 관심은 비록 가믐과 홍수로 그 추수가 보잘 것 없이 작을지라도 오로지 알곡에 있기에 그것을 심고 가꾸는 일에 전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가인의 문화와 같이 무신론이 문화가 번성할지 라도 성도들이 미혹되거나 회의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가인과 같은 무신론의 문화의 번성이 아니라 셋의 가문과 같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으시며 그들 을 통해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계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었다고 의인의 맥을 끊으신 것이 아니라 (창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라는 말씀처럼 아벨 못지 않은 더 좋은 씨를 주셨으니 바로 셋이었습니다.
1).믿음의 회복 가인의 후손들의 하나님의 은혜로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벨 대신 하나님이 새로운 씨로 주신 셋과 그의 후손들은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 을 불렀더라는 말씀과 같이 오래 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여호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경배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2).자손의 번성 시간적이나 물량적인 면으로 볼 때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잡초같이 번성하는 데도 아벨 대신 주신 셋은 겨우 어린아이로 태어나 그 자라는 것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셋의 후손을 통해 새 역사를 준비하시고 번성하도곡 집중적으로 축복하 셨습니다. 가인과 달리 일부 일처의 가정이었지만 (창5: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셋의 가문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셋의 후손 중에 므드셀라는 (창5:27) 그는 구백 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 더라 고 한 말씀처럼 최장수를 누리며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3).신앙의 번성 가인의 가문 중에도 이름이 에녹과 라멕이 있었던 것처럼(창4:17,19), 셋의 후손 중에도 똑같은 이름의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창5:18,19). 그러나 차이점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손들이 번성할 때에 가인의 후손은 그와 더 불어 죄악이 번성하여 멸망의 길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나 셋의 후손은 번성할 수 록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좋은 믿음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4).에녹의 신앙 그 대표적인 자손이 바로 에녹으로 (창5: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 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시대는 (유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 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 첨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에녹이 살던 시대는 불경건한 시대로 사람들이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정욕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에녹은 자기 혼자서만 잘 믿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유 1: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며 하나님 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같은 에녹을 크게 축복하셔서 (창5:19) 에녹을 낳 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처럼 자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이 데려가시기까 지 하였습니다.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아벨을 억울하게 죽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죄업이 이 땅에 오셔서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실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아벨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돌에 맞아 죽었으나 첫 번째 순교자의 영광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며, 신앙의 맥은 끊어지지 아니하고 (눅3: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 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처럼 아벨을 대 신하여 태어난 셋을 통해서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예수님과 다리처럼 연결되어지는 믿음의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후손은 아무리 문화가 번성하였을지라도 노아의 홍수 심판 때 단 한 사람도 남김이 없이 다 몰살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생 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작이 늦다고 불안해하거나 진행이 미약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신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1)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셋의 자손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2) 내가 지금 얼마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셋의 하나님, 에녹의 하나님, 욥의 하나님으로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는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이 창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믿음의 조상들
오늘 우리는 저절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한 부모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한 그와 같이 이 땅에 자 손들을 남기고 가문의 대를 물려주고 갈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가인의 문화와 셋의 문화가 성벽의 경계가 없이한 가정, 한 가문, 한 사회 안에 공존하고 있는데 과연 오늘의 나는 가인의 편에 있는가 아 니면 셋의 편에 있는가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정녕 죽 으리라'는 말씀대로 반드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다 죽게 됩니다. 가인의 자손만이 아니라 셋의 자손인 므드셀라도 죽은 것처럼 장수는 할지라도 반 드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다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살고 빨 리 죽고 가 아니며, 문화가 발달하고 미개하고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는가에 좌우 되는 것입니다.
1)바른 가치관의 확립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살다가 보니 때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가시 적으로 번성하는 가인의 문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아벨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나와 나 의 후손들이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바로 살게 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는 믿음으로 의롭게 살던 아벨이 불의한 가인에게 핍박을 당하고 돌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가 부재하며 인류 역사의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믿음이 약해지거나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 을 셋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가인처럼 신앙의 맥이 끊겨진 채 아무리 많은 물질과 무신론의 문화와 과학을 유산 으로 물려준다고 해서 우리 자손들이 다 행복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가인의 문화와 같이 일시적으로 번성하는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본받고 사랑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이 세상의 쾌락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화:스타린의 8개 침실과 8세의 불치병 아이의 죽음
2)현대 문명의 허와 실 오늘도 무신론의 문화가 가시적으로는 얼마든지 과학을 발달시키고, 경제를 성장시 키며, 사람들을 편리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이 그리는 에덴의 행복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들처럼 갈수록 성도덕의 부패와 잔악한 폭력과 살인과 전쟁으로 갈 수록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며 자멸을 자초해 가고 있는 불안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삶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만족 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콘센트가 빠진 전구와 같 이 밝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1)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안전이 없습니다. 도시의 적을 막기 위해 높은 성을 쌓고 두터운 철대문을 하지만 안전함이 없습니다,
2) 가인의 자손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술을 마시고 약을 먹 고 마약을 하지만 마음과 정신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3)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사랑과 용서가 없습니다. 가인의 자손 라멕은 두 아내를 거느린 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사소한 피해를 준 사람이 어린 소년이라고 할지라도 용서하는 대 신 무자비하게 복수하고서도 그것을 도리어 시로 읊고 자랑할 정도로 그 마음이 강 퍅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없는 가슴은 용서나 이해나 사랑이 머물 자리가 없으 며, 그것은 영적인 어두움인 것입니다(요일2:11). 현대인들의 문제점은 도덕적인 중립의 입장을 견지한 채 타인에 대해 피해를 주지 않고 동시에 선행도 포기하고 누구에게 손해도 유익도 주지 아니하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서 자기를 가둔 채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무기력한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가인의 문화권에 서 있지는 않겠지만 미온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셋의 편에 있지도 못한 어중간한 처지에 있어서도 안될 것이며 보 다 더 적극적으로 셋의 편에 서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주의는 개인의 삶을 편리하게 할 줄은 모르나 공동체 안에서 고 독하게 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악에게 물들지도 말아야만 하지만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 보다 더 적 극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선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진리에 대하여 열의가 없는 자는 결코 가인의 문화를 배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인의 문화와 같은 무신론의 악의 세력이 번성하는 것 같으나 그것에 현혹 되지 말고 셋의 후손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역사의 주 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잠13:22)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는 말씀처럼 변함없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과연 나는 지금까지 누구와 함께, 무엇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 현재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창세기 5장의 서두에 열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마지막이 죽었 더라는 말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자명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같은 죽음은 오고야 만다면 그 죽음이 오기 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신앙의 바톤을 후손들에게 바르게 물려 주는 믿음의 조상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우리의 믿음과 용기를 약화시키고 선하게 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회의하게 만들며 믿음의 용기를 좌절케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이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1) (시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라는 말씀 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마음과 생활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고 셋의 자손 들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 돌리며
2) 에녹이 (히11:5)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사람이 어느 누구와 동행한다고 하는 일은 (암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 찌 동행하겠으며 라는 말씀처럼 그 사람과 발걸음의 보폭을 맞추어서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말아야 함을 뜻하며, 그 사람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3) 가인의 자손 라멕처럼 남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아니라 (창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 하리라 하였더라는 말씀의 노아처럼 남을 위로 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가인의 일시적인 성장을 부러워하지 말며, 불경건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는 (시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잠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 르거니와 (잠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에녹과 동일한 축복을 약속하셨으니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바톤과 그들이 체험한 영적인 체험을 자신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예수님 오실 때까지 대대로 물려주는 믿음의 조상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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