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이삭 (창22:15-18)
본문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과연 이런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도대체 어떤 축복을 하셨는가 하는데 촛점을 맞춰야 한다. 이 축복과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있었던 축복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이 마지막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다음의 두가지 말씀을 비교해 보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5-18)”
둘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12장에서는 씨(種子)에 관한 이야기가 없고 22장에는 씨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런데 씨에 관한 이야기, 즉 자손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없는 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22장의 ‘이삭 사건’은 이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우리는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과 모든 신자들이 생겨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복음의 한 상징이라는 것을 안다. 12장에는 이 말씀이 없고 단지 대상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여 22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것이 “네 씨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축복한 것이 사실이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장면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네 씨로 말미암아’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대할 것이라면서 ‘자손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자손’이라는 단수를 쓰신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을 얻을 신령한 후손들이 네 자손 곧 이삭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생겨나리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으로 납득을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잔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할례는 저주요 동시에 거룩케 하라는 표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디에다 행하시는가 이것은 상징이다. 더 이상 생식의 능력을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에게 준 메세지는 이것이다. “네 자손은 육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육신으로 난 자들로서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육으로 우리의 권속을 삼지 않고 육으로 우리의 혈육을 삼지 않는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이제 우리의 권속이 된다. 하나님의 권속이요 자녀이다. 아브라함은 역사상 최초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할례를 받은 그 상징이 명한대로 따지자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낳았다. 그러면 이삭은 육적 차원으로써 그의 후손이 아니다. 이것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독자를 내게 바쳐라”고 하는 근거이다. 이삭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자이다. 이삭도 할례를 받았다. 이삭도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자이다. 이삭이 없는 자라는 뜻은 아브라함도 스스로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죽은 존재들이다. 죄인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더이상 육적 후손이나 육적 존재가 아니며 거듭난 자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도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이삭도 거듭난 영적 차원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육적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로 이삭을 잡으라고 한다면 이삭도 마땅히 죽어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 4:17-19)”
지금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다. 육체적으로 따진다면 아브라함도 죽은 자요, 이삭도 죽은 자이다. 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서 자기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라는 것을 또한 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그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점에 대한 아브라함의 동의이다. 물론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이삭은 죽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대속물을 하나님께서 취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갸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라(창 15:12-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발 붙일만큼도 주지 않으셨다. 가나안 땅에 살동안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의 소유의 땅은 오직 하나, 무덤 뿐이었다. 막벨라 굴에 사라가 장사되었고 그도 함께 장사되었다.
그런데 그의 자손에게 준다고 하셨다. 이것이 구약의 화면의 아름다운 일관성이다. 왜 사대 후손이 되어야만 가나안 땅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가 하면 출애굽 사건이 구원을 상징한다.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지난 뒤에야 가나안이 유업이 되어야 한다. 구원없이, 십자가없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구원 얻은 자의 기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불렀지만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이 땅은 그의 기업이 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부름의 목적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구원의 완성이다.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천국의 시민삼으시는 계획을 가지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방법으로써,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구원의 비밀과 능력과 해결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기가 아끼는 독자이건, 백세에 낳은 자식이건 간에 관계없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군말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달려가게 했던 가장 깊은 이유이다.
우리는 이제 ‘혈육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함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더 이상 우리의 후손도 우리의 선조도 혈육으로 따지는 자들이 아니요 영으로 따지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동일한 아버지가 계시니 하나님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이 큰 축복과 이 큰 감격의 서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선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도대체 어떤 축복을 하셨는가 하는데 촛점을 맞춰야 한다. 이 축복과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있었던 축복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이 마지막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다음의 두가지 말씀을 비교해 보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5-18)”
둘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12장에서는 씨(種子)에 관한 이야기가 없고 22장에는 씨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런데 씨에 관한 이야기, 즉 자손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없는 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22장의 ‘이삭 사건’은 이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우리는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과 모든 신자들이 생겨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복음의 한 상징이라는 것을 안다. 12장에는 이 말씀이 없고 단지 대상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여 22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것이 “네 씨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축복한 것이 사실이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장면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네 씨로 말미암아’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대할 것이라면서 ‘자손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자손’이라는 단수를 쓰신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을 얻을 신령한 후손들이 네 자손 곧 이삭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생겨나리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으로 납득을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잔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할례는 저주요 동시에 거룩케 하라는 표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디에다 행하시는가 이것은 상징이다. 더 이상 생식의 능력을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에게 준 메세지는 이것이다. “네 자손은 육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육신으로 난 자들로서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육으로 우리의 권속을 삼지 않고 육으로 우리의 혈육을 삼지 않는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이제 우리의 권속이 된다. 하나님의 권속이요 자녀이다. 아브라함은 역사상 최초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할례를 받은 그 상징이 명한대로 따지자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낳았다. 그러면 이삭은 육적 차원으로써 그의 후손이 아니다. 이것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독자를 내게 바쳐라”고 하는 근거이다. 이삭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자이다. 이삭도 할례를 받았다. 이삭도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자이다. 이삭이 없는 자라는 뜻은 아브라함도 스스로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죽은 존재들이다. 죄인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더이상 육적 후손이나 육적 존재가 아니며 거듭난 자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도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이삭도 거듭난 영적 차원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육적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로 이삭을 잡으라고 한다면 이삭도 마땅히 죽어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 4:17-19)”
지금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다. 육체적으로 따진다면 아브라함도 죽은 자요, 이삭도 죽은 자이다. 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서 자기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라는 것을 또한 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그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점에 대한 아브라함의 동의이다. 물론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이삭은 죽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대속물을 하나님께서 취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갸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라(창 15:12-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발 붙일만큼도 주지 않으셨다. 가나안 땅에 살동안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의 소유의 땅은 오직 하나, 무덤 뿐이었다. 막벨라 굴에 사라가 장사되었고 그도 함께 장사되었다.
그런데 그의 자손에게 준다고 하셨다. 이것이 구약의 화면의 아름다운 일관성이다. 왜 사대 후손이 되어야만 가나안 땅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가 하면 출애굽 사건이 구원을 상징한다.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지난 뒤에야 가나안이 유업이 되어야 한다. 구원없이, 십자가없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구원 얻은 자의 기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불렀지만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이 땅은 그의 기업이 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부름의 목적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구원의 완성이다.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천국의 시민삼으시는 계획을 가지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방법으로써,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구원의 비밀과 능력과 해결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기가 아끼는 독자이건, 백세에 낳은 자식이건 간에 관계없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군말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달려가게 했던 가장 깊은 이유이다.
우리는 이제 ‘혈육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함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더 이상 우리의 후손도 우리의 선조도 혈육으로 따지는 자들이 아니요 영으로 따지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동일한 아버지가 계시니 하나님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이 큰 축복과 이 큰 감격의 서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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