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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항아리 (요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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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복음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시인 밀톤은 두눈이 먼 상태에서도 “실낙원”이라는 유명한 기독교적인 저서를 남겼다. 존 번연은 12년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기독교 구원관을 알릴려고 하였습니다. 또 칼빈 선생은 많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기독교 강요”란 책을 저술하여 기독교 교리의 뼈대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나 우리가 들음으로서 은혜받은 말씀들은 성도의 눈물과 아품을 터전으로 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찬송가 해설집을 읽어보면 작곡가나 작사자들이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 냈다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많은 학자나 재능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반면에 무식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도 수 없이 많은 업적이 남겨진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 많은 진리를 알 면서도 진리를 기초로 해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리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직업은 보잘것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책 한권 없고 그들이 남긴 명언 한 마디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그 누구 보다도 뜨거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박한 신앙인들은 복음이 이 땅에서 역사 하도록 늘 보이지 않는 터전이 되어 희생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의 잔치집의 종들이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랑 신부나 또는 손님에 비해서 보잘것 없는 존재에 불과 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들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 이야기에 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어린아이지마는 그는 이름도 고향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나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 보다 축복의 촛점은 이 어린아이 였던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모두 신분으로 볼때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길을 갔고, 신분적으로 도저히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한 사람이었으나, 그들은 모두가 주님의 사역에 가장 중심적인 존재였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름도 없는 이들을 통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고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기도 하신 것이다. 가나의 잔치집은 기독교 복음의 그 위치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잔치집은 교회를 상징 하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이 잔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신랑 신부가 있었을 것이며 또 손님으로 먹고 즐기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또 잔치 집에서 손님과 대면하여 접대하는 연회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긷고 험한 일을 하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1. 명령에 따라 수고하고 봉사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집의 즐거움을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가 먹고 노는 사람이 아니며 연회장과 같은 직분자도 아니다. 이름없이 땀흘려 수고한 종들이 이 잔치집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가 목사가 아닙니다. 손님처럼 교회 생활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모르고 그저 교회에 왔다가 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종들처럼 교회의 어려움을 안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그러한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는 더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종과 같은 성도가 없다면 그 교회는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교회에 오셔서 수고하고 희생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돌 항아리 같은 보잘것 없는 우리들일찌라도 주님은 축복의 생수를 채워 주시고, 나중에는 귀한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실것입니다.
2. 가나의 이적은 종들의 순종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님이 말씀하실때 다 순종했습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때 순종했습니다.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을때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성도가 주님께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적 자세입니다. 성도가 다른 것 다 가져도 순종하는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주님과 성도의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신랑에게 가지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도가 주님의 사역과 축복에 동참하려면 먼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사용하실때 먼저 순종을 달아 보실때가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많은 재능중에서도 순종하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사용하신다. 돌 항아리는 귀한 그릇이 아니다. 물이 두말 반 정도 들어간 돌항아리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채운 것도 별로 귀한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물입니다. 발을 씻을 물이라 해서 홀 마실 수 없는 천한 물인지도 모릅니다. 천한자라도 귀한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말슴에 순종했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당에 놓인 항아리 처럼 사람에게는 별로 인정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재능이나 환경도 별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게 순종함으로 귀히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순종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종이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요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기 어려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우리의 불신앙이 순종의 장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떤 축복이던지 반드시 이면에 성도의 순종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도는 생활이 매말라 질때 마다 늘 자신의 순종이 게을러 지지 않았나 확인해 보아야 한다. 대개 매말라 가는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순종이 결여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 내신 계약도 바로 “순종에 대한 계명”이였습니다. 선악과가 문제가 아니라 불순종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면 에덴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으나, 안탑갑게도 불순종의 결과로 메마른 광야로 쫓김을 받게 되였습니다. 성도일수록 늘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에서 늘 순종하고 가정에서도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윗 사람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생활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는 생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종들이 순종했을때 그 열매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순종하는 성도는 그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다. 롬5:19에 보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므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불순종함이 불행을 남에게까지 미치게 됨을 늘 명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종들의 순종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간 한사람이 불순종하므로 이스라엘이 패전했던 이스라엘 역사적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순종자는 축복을 남에게 주고 불순종하는 자는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3.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들은 순종으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이제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얻은 축복을 믿음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며 믿음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혼인 축하 잔치를 보통 일주일 동안 계속하였습니다. 이 가나의 잔치집에는 이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손님이 예상외로 많이 왔거나 포도주를 적게 준비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은 종들에게 아까 그들이 갖다 채워둔 물을 포도주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을 항아리에 붓는 일보다 사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손님에게 발을 씻을 물을 갖다 주는 일은 대단한 실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포도주가 되였다는 주님의 말을 믿었을 것으로 봅니다. 주님을 믿고 자기의 경험은 부정하는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그들 자신이 조금 전에 갖다 부은 물입니다. 이것은 내 경험 내 지식을 주님의 말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내 경험이나 내 지식을 부인하지 않고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따라 오려거던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쫓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잘못은 내게 있는 것이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부정이 이루어진 다음 주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믿습니다. 증거와 실제를 더 믿을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했다. 즉 신앙인들은 그들이 코 앞에 보고 있는 현제보다도 그들이 아지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믿고 경험하지 아니한 미래를 현재보다 더 믿고 기다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세례 요한때 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노력하는 자가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면서 사는 믿음의 행위가 천국의 주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려면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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