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눅15:11-32)
본문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의 설교집에서 읽은 내용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부자가 상처(喪妻)를 했는데 새 장가를 들어 젊은 색시를 데려 왔습니다. 여자가 시집 온 날부터 남편의 속을 많이 썩이는데, 밥을 하라 면 죽을 쑤고 죽을 쑤라면 밥을 하고 가라면 오고 오라 하면 가고 앉으 라면 서고 서라면 앉는 것입니다.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모 든 것을 참았더니 나이가 들고나니 꼴에 외간 남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 습니다. 간부(姦夫)를 두고는 볼사납게 굴기 시작합니다. 여러 번 권면을 하나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고 오히려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허 락하지 않으니까 하루는 간부와 공모를 하고 남편의 밥에다 독약을 넣어 처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편이 하루는 밥을 먹다가 토하고 구사 일 생하였습니다. 여자를 불러 책망을 하니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반항을 합니다. 할 수 없어 간부를 책망하고 어서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서 잘 살라고 놓아주었습니다. 간부는 손에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맺어진 사랑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그 여자를 술집 유곽에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여자는 불의의 씨를 배고 만삭이 되어서 술 단지를 부둥켜안고 오고 가는 뭇 사람에게 술을 팔고 육체를 팔아 비참한 고통 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본남편이 일본을 갔다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오랜만에 그 여자를 보고 너무 반갑고 감격하여 달려 가서 "너 이거 웬일이냐" 하고 손목을 확 잡으니 그 여자는 깜짝 놀래 어 가만히 있다가 눈을 흘기며 "무얼 하러 왔소"하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보러 왔다.이것을 보면 뭘 해요너 내 품 떠나더니 잘 되었구나.잘됐건 못됐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대관절 얼마에나 팔려 왔노물어 보구려,여보, 주인! 이 여자 얼마 에 사 왔소돈 많이 주었지요여보시오 이 여자 도로 물러 주시오.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고 많은 배상금을 치르고 찾아내었습니다. 그 여자 말하기를 "저는 데려다 무엇해요" 했지만 "어서 가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가" 하고 데리고 한국에 건너 와서 그 간부(姦夫)의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아이를 제 아이보다 더 사랑하고 귀 여워하며 그 더러운 여자를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요 이 여자는 바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인생의 모습을 나타냅니다.》세상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으나 남편 의 지극한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 역시 아버지 집을 떠난 자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탕자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져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학수고대하며 또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는 탕자를 향한 아버 지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탕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 길이와 높이를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모의 집에 거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가 부모님 품안에 있을 때는 그 편안함과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을 떠나봐야 그 사랑을 알게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겁니다. 부모님들께서는 그 자식 들을 품안에 누이시고 곱게 길러 평안과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 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이렇게 시골에서 썩을 수는 없습니다. 내 분깃을 가지 고 도시에 가서 출세해 보겠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세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로서둘째 아들의 요구에 선 뜻 응할 수 없었습니다. 출세는커녕 재산탕진에 생명까지도 위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깃을 받아 집을 나가겠다는 이 아들은 분명 문제아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이 축나는 것보다 그 아들이 철없이 집 나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사는 울산에서 장애자 아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앞날이 너무나 괴 로운 나머지 농약을 야쿠르트에 타 먹여 독살한 비정한 아버지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로움도 스스로 지고 싶어 것이 참된 아 버지의 사랑입니다. 설령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 오더라도 그런 고통도 기 꺼이 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병들었다 하여, 자식이 잘못되었다 해서 내다버릴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얼마든 지 있을 수 있으나 참된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습이 장애자이든, 가난하고 병들었든, 배 운 것이 있든 없든, 전과가 있든 없든 그것들을 결코 가리지 않고 여러분 의 모든 고통을 십자가 고통에 감추시며 여러분을 사랑의 뜨거운 가슴에 품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길로 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온갖 허랑방탕에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사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둘째 아들이 집을 나 간 후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어서 빨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이 방탕한 생활이나 재산탕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살 아서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알거지가 되어서라도, 그놈 이 왕창 망해서라도, 아니 성한 몸이 아닐지라도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동구밖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식 에 대한 애끓는 사랑 때문에 도리어 자식이 낭패를 당하고서라도 돌아오 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죄인된 우리들이 어서 빨 리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누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직 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5분내로 증명해 보이겠소"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습니다. "혹시 여기에 날카로운 칼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그에게 칼을 건네주자 그는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이시오. 만일 5분내에 나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오." 1분, 2분,.5분,.그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일도 일어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거나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또한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전지전능하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그대로 놔둘리가 있겠습니까" 모임이 끝나자 그 종년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한 행동을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도 자녀가 있 나물론 있지요.그러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아까 그가 들 었던 칼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의 자녀 중에 한 명이 이 칼을 들고 '나를 죽여주세요'한다 면 자네는 죽일 수 있겠나할머니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내가 내 아이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 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마침내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 중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 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 후회막급한 눈물만 흘릴 따름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21절).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을 향해 "무슨 말 이냐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로다."며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대하기는커녕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온 동네 잔치를 벌여 아들의 돌 아옴을 모두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분명 탕자였지만 '탕 자'를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로 돌 아오는 죄인의 과거 행악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다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히 용서하실 뿐입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으나 그녀가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더 이상 그 여인의 죄를 묻 지 않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요 8:11).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어서 돌아만 오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악의 세상에 방황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으 시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자식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며 잔치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 믿는 여러분 은 이 같은 아버지의 가슴으로 집을 나간 아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 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목회자 야게르가 쓴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월요일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화요일 가인처럼 자기 동생을 죽이고, 수요일 야곱처럼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목요일 다윗처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금요일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토요일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면, 너희 죄가 용서함을 받겠느냐 물론 받는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 내게로 오너라, 너희 죄는 모두 용서함 받았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제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지고 뒤범벅된 사람일지라도, 그 죄의 빛이 아무리 흉악하여 주홍빛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한이 없는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 지의 은총과 축복의 잔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집을 나 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뜨겁게 열린 가슴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어서 돌아만 오시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 역시 아버지 집을 떠난 자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탕자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져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학수고대하며 또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는 탕자를 향한 아버 지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탕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그 길이와 높이를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모의 집에 거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가 부모님 품안에 있을 때는 그 편안함과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을 떠나봐야 그 사랑을 알게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겁니다. 부모님들께서는 그 자식 들을 품안에 누이시고 곱게 길러 평안과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 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멀리 가서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이렇게 시골에서 썩을 수는 없습니다. 내 분깃을 가지 고 도시에 가서 출세해 보겠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세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로서둘째 아들의 요구에 선 뜻 응할 수 없었습니다. 출세는커녕 재산탕진에 생명까지도 위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깃을 받아 집을 나가겠다는 이 아들은 분명 문제아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이 축나는 것보다 그 아들이 철없이 집 나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사는 울산에서 장애자 아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앞날이 너무나 괴 로운 나머지 농약을 야쿠르트에 타 먹여 독살한 비정한 아버지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로움도 스스로 지고 싶어 것이 참된 아 버지의 사랑입니다. 설령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 오더라도 그런 고통도 기 꺼이 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병들었다 하여, 자식이 잘못되었다 해서 내다버릴 그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얼마든 지 있을 수 있으나 참된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습이 장애자이든, 가난하고 병들었든, 배 운 것이 있든 없든, 전과가 있든 없든 그것들을 결코 가리지 않고 여러분 의 모든 고통을 십자가 고통에 감추시며 여러분을 사랑의 뜨거운 가슴에 품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길로 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온갖 허랑방탕에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사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둘째 아들이 집을 나 간 후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어서 빨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이 방탕한 생활이나 재산탕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살 아서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알거지가 되어서라도, 그놈 이 왕창 망해서라도, 아니 성한 몸이 아닐지라도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동구밖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식 에 대한 애끓는 사랑 때문에 도리어 자식이 낭패를 당하고서라도 돌아오 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죄인된 우리들이 어서 빨 리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누구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직 접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내가 5분내로 증명해 보이겠소"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습니다. "혹시 여기에 날카로운 칼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그에게 칼을 건네주자 그는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이시오. 만일 5분내에 나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오." 1분, 2분,.5분,.그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일도 일어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거나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또한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전지전능하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그대로 놔둘리가 있겠습니까" 모임이 끝나자 그 종년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한 행동을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도 자녀가 있 나물론 있지요.그러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아까 그가 들 었던 칼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의 자녀 중에 한 명이 이 칼을 들고 '나를 죽여주세요'한다 면 자네는 죽일 수 있겠나할머니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내가 내 아이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 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마침내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 중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 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 후회막급한 눈물만 흘릴 따름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21절).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온 아들을 향해 "무슨 말 이냐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로다."며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24절).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대하기는커녕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온 동네 잔치를 벌여 아들의 돌 아옴을 모두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분명 탕자였지만 '탕 자'를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로 돌 아오는 죄인의 과거 행악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다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히 용서하실 뿐입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으나 그녀가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더 이상 그 여인의 죄를 묻 지 않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요 8:11).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어서 돌아만 오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악의 세상에 방황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으 시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자식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며 잔치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 믿는 여러분 은 이 같은 아버지의 가슴으로 집을 나간 아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 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목회자 야게르가 쓴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월요일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화요일 가인처럼 자기 동생을 죽이고, 수요일 야곱처럼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목요일 다윗처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금요일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토요일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면, 너희 죄가 용서함을 받겠느냐 물론 받는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 내게로 오너라, 너희 죄는 모두 용서함 받았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제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지고 뒤범벅된 사람일지라도, 그 죄의 빛이 아무리 흉악하여 주홍빛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한이 없는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눈과 같이 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 지의 은총과 축복의 잔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집을 나 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뜨겁게 열린 가슴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어서 돌아만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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