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던지지 맙시다 (요8:1-11)
본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저는 설교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설교를 할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생각끝에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떤 여인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발각이 됐고 돌에 맞아 죽을뻔 했는데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용서>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는 1993년과 함께 용서할 수 없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새해를 맞자는 것이 오늘 설교의 골자입니다. 신명기 22장을보면 혼전 부정행위를 저지른 여자나 간통죄를 범한자, 약혼한 여자가 딴 남자와 정을 통했을 때, 그리고 성폭행을 가한 남자 등, 이 모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죄를 범하다가 현행범으로 붙잡혔던 것입니다. 남자들이 그녀를 성 밖으로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그들은 그녀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모세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치라고 하면 사랑의 공언(公言)이 실없는 넉두리가 돼버릴 것이고 치지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일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그녀를 용서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를 법에 고소할 것이고 율법을 어긴 죄목을 씌워 예수를 처단했을 것입니다. 이 긴박한 상황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는 허리를 굽히신 후 땅에 글씨를 쓰셨고 다른 하나는 허리를 펴신 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은 땅에다 뭐라고 쓰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롬(Jerome)은 “송사자들의 죄를 씼을 것이라”고 했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들 각자의 죄를 땅에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땅에 쓴 그 글씨는 마치 벽에 쓴 손글씨가 벨사살왕을 놀라게 했던 것 같이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바클레이는 (William Barclay)는 “그녀를 비난하고 있던 당사자들의 죄를 모래 위에 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 끝을 지켜보고 서있던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허리를 펴시고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돌을 들어 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1 돌을 던져야 할 이유 그녀는 돌에 맞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율법의 금기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돌로 쳐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1)몰렉 우상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친 자(레 20:2-5)
2)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7)
3)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자(레 24:15-16) 4)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민 15:32-36) 5)사람을 꾀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 자(신 13:1-10) 6)우상 숭배자(신 17:2-7) 7)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패역한 자식(신 21:18-21) 8)성범죄를 범한 자(신 22:22-24)등 입니다. 그녀는 신명기 22장에서 금한 부도덕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돌에 맞아야 합니다.
둘째 비정상적 관계로 가정을 파괴했고 도덕규범과 윤리질서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행위자체를 변호하거나 정당화 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돌을 던져선 안되는 이유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돌에 맞아 죽게될 것을 막으신데는 그만한 몇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율법을 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명기의 경우는 남녀간의 부정행위를 처단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만 주님의 교훈은 더 엄합니다. 마태복음 5:27-28을 보면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간음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 주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도 용서히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그녀를 용서하셨는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그녀를 정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만 은폐해 나온 죄가 땅바닥에 큰 글씨로 드러난 지금 어떻게 돌을 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거기엔 예수와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Augustine) 이 장면을 “거기에는 감당키 어려운 고민과 깊은 동정심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3 본문의 사건이 주는 교훈
1)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곳엔 마지막으로 돌에 맞아야 할 여자와 돌을 던질 수 있는 예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다 돌아가 버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차마 돌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질만한 의인은 지금도 없습니다.
2)용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대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날 거기서 새로운 영혼이 태어난 것입니다. 정죄는 세계에는 새생명이 움트지 못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영혼의 소생운동이 일어납니다.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3)용서의 동기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정죄와 심판은 법이 결정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이 결정합니다. 용서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한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말을 들었을때 행복을 느끼는가를 조사한 것입니다.
아내들의 경우 남편으로부터 1>여보 사랑해 2>여보 고마워 3>여보 고생했지 4>당신이 제일이야 5>당신 오늘 예쁜데.라는 말을 들었을때 진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경우는 아내가 1>여보, 시랑해요 2>당신만 믿어요 3>결혼 참 잘했어요 4>당신 정말 남자다워요 5>얘가 당신 닮아 똑똑하고 대견해요 라고 말했을 때 행복을 만끽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표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남녀가 함께 느끼는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Best 5)는 모두가 사랑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조사 결과를 소개하겠습니다.
남편은 언제 아내를 사랑하는가 1>남편을 믿고 따를 때 2>남편을 인정하고 높힐 때 3>남편의 감정을 이해할 때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아내는 언제 남편을 사랑하는가 1>가정에 충실할 때 2>이내의 수고를 이해할 때 3>인격적으로 대할 때 남편을 사랑하게 된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일주일만 지나면 새해가 막을 내립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한해를 마감해야 합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랑을 비련 혹은 비애라고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초월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숭고한 사랑입니다. 헬라인들은 그것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갈등, 증오, 분노, 원한을 폐기처분합시다. 지금 세계는 핵폐기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경우 어느 곳도 폐기 장소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핵폐기물보다 더 골치 아프고 해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증오, 시기, 미움, 원한, 질투, 적개심, 복수심 따위들 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침식하고 망가뜨리고 맙니다. 묵은 해와 함께 버리고 새해를 맞이 합시다.
4)새로운 삶을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용서받은 이후의 삶의 태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쁜 짓하다가 걸려서 죽을 사람이 용서 받은 후의 삶은 나쁜 짓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용서받은 후의 삶은 다시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되풀이 근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받은 새사람에겐 유익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동안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던 돌들, 손에 쥐고 다니던 돌들, 입안 가득히 물고 다니던 정죄와 공격의 돌들을 하나 하나 꺼냅시다. 버립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출발합시다.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손에 들고 역사의 현장으로 나갑시다.
첫째 율법의 금기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돌로 쳐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1)몰렉 우상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친 자(레 20:2-5)
2)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7)
3)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자(레 24:15-16) 4)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민 15:32-36) 5)사람을 꾀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 자(신 13:1-10) 6)우상 숭배자(신 17:2-7) 7)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패역한 자식(신 21:18-21) 8)성범죄를 범한 자(신 22:22-24)등 입니다. 그녀는 신명기 22장에서 금한 부도덕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돌에 맞아야 합니다.
둘째 비정상적 관계로 가정을 파괴했고 도덕규범과 윤리질서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행위자체를 변호하거나 정당화 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돌을 던져선 안되는 이유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돌에 맞아 죽게될 것을 막으신데는 그만한 몇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율법을 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명기의 경우는 남녀간의 부정행위를 처단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만 주님의 교훈은 더 엄합니다. 마태복음 5:27-28을 보면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간음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 주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도 용서히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그녀를 용서하셨는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그녀를 정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만 은폐해 나온 죄가 땅바닥에 큰 글씨로 드러난 지금 어떻게 돌을 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거기엔 예수와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Augustine) 이 장면을 “거기에는 감당키 어려운 고민과 깊은 동정심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3 본문의 사건이 주는 교훈
1)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곳엔 마지막으로 돌에 맞아야 할 여자와 돌을 던질 수 있는 예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다 돌아가 버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차마 돌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질만한 의인은 지금도 없습니다.
2)용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대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날 거기서 새로운 영혼이 태어난 것입니다. 정죄는 세계에는 새생명이 움트지 못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영혼의 소생운동이 일어납니다.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3)용서의 동기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정죄와 심판은 법이 결정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이 결정합니다. 용서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한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말을 들었을때 행복을 느끼는가를 조사한 것입니다.
아내들의 경우 남편으로부터 1>여보 사랑해 2>여보 고마워 3>여보 고생했지 4>당신이 제일이야 5>당신 오늘 예쁜데.라는 말을 들었을때 진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경우는 아내가 1>여보, 시랑해요 2>당신만 믿어요 3>결혼 참 잘했어요 4>당신 정말 남자다워요 5>얘가 당신 닮아 똑똑하고 대견해요 라고 말했을 때 행복을 만끽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표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남녀가 함께 느끼는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Best 5)는 모두가 사랑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조사 결과를 소개하겠습니다.
남편은 언제 아내를 사랑하는가 1>남편을 믿고 따를 때 2>남편을 인정하고 높힐 때 3>남편의 감정을 이해할 때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아내는 언제 남편을 사랑하는가 1>가정에 충실할 때 2>이내의 수고를 이해할 때 3>인격적으로 대할 때 남편을 사랑하게 된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일주일만 지나면 새해가 막을 내립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한해를 마감해야 합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랑을 비련 혹은 비애라고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초월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숭고한 사랑입니다. 헬라인들은 그것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갈등, 증오, 분노, 원한을 폐기처분합시다. 지금 세계는 핵폐기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경우 어느 곳도 폐기 장소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핵폐기물보다 더 골치 아프고 해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증오, 시기, 미움, 원한, 질투, 적개심, 복수심 따위들 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침식하고 망가뜨리고 맙니다. 묵은 해와 함께 버리고 새해를 맞이 합시다.
4)새로운 삶을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용서받은 이후의 삶의 태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쁜 짓하다가 걸려서 죽을 사람이 용서 받은 후의 삶은 나쁜 짓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용서받은 후의 삶은 다시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되풀이 근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받은 새사람에겐 유익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동안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던 돌들, 손에 쥐고 다니던 돌들, 입안 가득히 물고 다니던 정죄와 공격의 돌들을 하나 하나 꺼냅시다. 버립시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출발합시다.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손에 들고 역사의 현장으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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