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돌봄과 나눔 (마25:37-40)

본문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영생의 조건으로 돌봄과 나눔을 들고 있습니다. 즉, 최후의 심판때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게 되는데 그 기준이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떠 도는 사람을 얼마나 돌보아 주었느냐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살펴보면 산상설교 (5-7장), 사도직에 관한 설교 (10장) 천국비유 설교 (13장), 교회에 관한 설교 (24-25장) 의 5개의 주요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산상설교와 종말에 관한 설교는 더욱더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 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종말에 관한 설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생 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를 갈라 양은 영생에, 염소는 영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은 기독교 교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후의 염소가 아닌 양으로 판결받아 영생에들어가 려면 돌봄과 나눔이라는 철저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 돌봄과 나눔의 정신은 기독교의 가장 값진 유산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한형제자매임을 표방하여 네것 내것 없이 가진 것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휴머니즘공 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잘 한 것 보다는 잘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이교도를 학살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며 억합하고, 기독교 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미신을 조장하여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이와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이름없이 빛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말없는 실천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왔습니다.
아사시의 성 프란체스코,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인도빈민굴의 성녀 테리사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인 열명 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그만큼이나마 의인이 있었기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2년 전 5월 중소교회 목사 3백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회봉사 비용은 전체교회예산의 7.82%에 불과했으며, 올해 예장통합측 2천8개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한바에 따르면 사회봉사비는 예산의 6.2%에 불과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나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하면 서 정작 교회는 이웃을 돌보는데 십일조를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교회는 양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지 돌봄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구세군과 성공회는 작은 교단인데 도 불구하고 성공회 서울 교구의 경우 교회 전체 예산의 30% 이상을 사회봉사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눠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은 내가 가짐으로서가 아니라 베품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웃을 돌보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삽시다. 이제 곧 크리스 마스가 다가옵니다. 이웃들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함인 동시에 영생의 신비로운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기때문입니다. (지난 2일 종교교회에서 드려진 목요정오예배에서).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1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