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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베개위에서 꾼 꿈 (창28:10-15)

본문

돌 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여러분! 여러분들은 삶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은총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 읽은 본문은 삶에 있어서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가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서 은총의 삶을 누리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신앙 때문에 인생의 고난을 겪다가 인생이 복되게 바뀐 야곱이라는 이름의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야곱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괴로웠을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야곱이 그런 환란의 때에도 늘 가슴 속에 꿈꾸어 왔던 신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야곱이 어떤 신세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 어떤 분으로서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本論: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벧엘의 네 가지 중요한 경험:우리는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야곱을 살펴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야곱이 도망자의 신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터미네이터 (Terminator)
1)라는 영화가 상영된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터미네이터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됩니다. 터미네이터는 인조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이 힘으로썬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총으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습니다. 이 터미네이터는 처단하도록 한 번 지시받은 사람은 끝까지 쫓아 다닙니다. 폭발물로 폭파를 시켜도 뼈대만 남은 인조 인간은 쫒아옵니다. 허리를 부둥켜 안고 자폭을 해도 상반신만 남은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쫒아옵니다. 마지막 동작을 멈출때까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쫒아옵니다. 터미네이터가 끈질기게 쫓아다니니, 도망자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극심한 공포와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 상업주의가 만들어 낸 오락 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에 쫓기며,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實存>,즉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별된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의 손길을 피해서, 급히 도망쳐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 갔습니다. 이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아주 깜깜해져 버렸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투로 이불을 삼고, 돌로 베개를 삼아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야곱의 모습은 영락없이 도망자의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본문에서 야곱이 不安한 잠 속에 빠져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몹시 지쳐서 잠든 곳은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그는 돌 베개 위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다는 것은 그가 불안 속에서 잠을 청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꿈이라는 게 뭡니까 단잠을 잘 땐 대체로 꾸지 않는 것이 꿈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꿈을 꾸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잠자리가 불편할 때, 몸이 아플 때, 심기가 불편할 때, 우리는 잠을 설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때는 어김 없이 그 꿈이 기억나게 됩니다.
이처럼 야곱이 불안 속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야곱은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형 에서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냥꾼입니다. 그는 발자국만으로도 동물을 추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죽이는데에 능숙한 도살자입니다. 야곱은 이 능숙한 살인자의 추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쳐 잠든 벧엘은 고향 브엘세바에서 85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능숙한 도살자인 형 에서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서,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 때문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야곱이 잠든 곳은 낯선 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살던 고향 브엘세바는 평지였습니다. 반면에 벧엘은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인 산악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방비 없이 위험에 노출된 채 잠들었습니다. 이 낯선 환경은 더욱 그를 불안 속에서 잠들게 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능숙한 사냥꾼 에서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도의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불안한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돌베개의 意味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돌을 베고 자야 했습니다. 여러분! 돌을 베고 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집에서 돌을 베고 주무시는 분이 계십니까 누가 집에서 돌을 베고 자겠습니까 집에서는 아무도 돌을 베고 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그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ar)는 그의 저서 時間과 存在 (Sein und Zeit)에서 “현존재”(現存在:Dasein)의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으로 정의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졌습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감싸주던 어머니 리브가도 없었습니다. 그는 돌로 베개를 삼고, 차디찬 바닥에 홀로 누워 잠들었습니다. 그의 주위엔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도와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야곱의 초라한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대인은 도망자들입니다. 학생들은 공부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사업가들은 불경기와 빚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승진과 발령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주부들은 분주함과 무의미한 일들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갖가지 무시무시한 에서들로부터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몹시 두렵고, 긴장하며,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인생 문제를 아무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부모라도 자녀의 공부 문제를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저마다 홀로 서야 하는 투쟁’입니다. 이 인생의 고독한 투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네번째로 우리는 야곱이 돌베개위에서 잠을 자면서 세 가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고, 이삭이 순종의 사람이었다면, 야곱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돌베게 위에서 세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째는 12절의 사닥다리의 꿈이요,
둘째는 15절의 임마누엘의 꿈이요,
셋째는 13114절의 언약의 꿈입니다.
첫째로, 사닥다리의 꿈(=십자가의 꿈)입니다. 1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야곱은 꿈 속에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닥다리가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진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온갖 무시무시한 에서들로부터 쫓기다가 지쳐 쓰러진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너무 낙심이 될 때는 꿈을 포기합니다. 꿈꾸기를 거부합니다. 수넴의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녀에겐 아들이 없었고, 남편은 늙었습니다.
2) 그래서 아들에 대한 꿈은 아예 포기하고 살아온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지자 엘리사가 그녀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잘 대접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평생을 체념하면서 늙어왔던 그녀에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또 기뻣겠습니까 아마 그녀는 매일매일 커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다 보면서, 삶의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랑스러운 아들이 갑자기 죽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그 어미의 무릎 위에서 죽었습니다. 하늘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모든 꿈과 희망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3) ‘내가 언제 아들을 원했습니까 차라리 잊혀진 세월, 아들에 대한 모든 꿈을 포기하고 살게 내버려 두시지, 아들을 주시고 나서, 이제 왜 죽게 하십니까’ 그녀는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꿈이 고난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수넴의 여인처럼 꿈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꿈꾸기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꿈꾸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절망하고 낙담하는 바로 그곳에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사닥다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꿈이 산산히 부서진 바로 그곳에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집에 다시 들어와서 아이를 만졌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일로 인해 낙담해 있습니까 어떠한 일이 여러분을 심히 근심되게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늘 나라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의 환상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권능으로 모든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임마누엘의 꿈입니다. 1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두번째 꿈은 임마누엘의 꿈입니다. 야곱이 집에서부터 멀리까지 도망해 온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형 에서의 추격권을 완전히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형 에서가 아직도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그와 함께 있어, 늘 지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어느 누가 나의 안전을 지켜 주겠습니까 버스나 택시를 탈 때, 저는 가끔 차 안에서 <오늘도 무사히>라는 그림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그림은 소년 사무엘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통법규가 안전을 지켜 준다는 말입니까 안전 운행이 그의 안전을 지켜 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안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임마누엘의 축복은 무슨 자격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가 도덕적으로 순결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가 훌륭한 선을 쌓았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임마누엘의 축복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나 이외에 어떤 분이 함께 하시는 이상스러운 체험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질이 된 불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그 풀무불을 보던 느부갓네살 왕은 감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외에 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서 3장 24절과 25절을 보십시요. 왕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의 아들과 같도다”(단 3:19-25) 이 말을 하고난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에 대한 핍박을 즉시 중지하고, 그들을 존귀히 세워 주었습니다. 남극 탐험을 떠났던 영국의 탐험대원들은 혹독한 추위와 극도의 피로로 인해서 거의 절망상태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들 대원의 숫자보다 늘 ‘한 사람이 더 있다’는 환상을 끝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 한 사람의 환상 때문에, 죽음의 절망을 딛고 남극탐험에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탐험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와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들 외에 항상 ‘한 사람’이 더 존재하는 이상한 체험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간증에 깊은 감명을 받은 T.S.엘리어트(Eliot)는 그의 시집 荒蕪地 (The Wild)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 삼자는 누구요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 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당신 옆엔 언제나 또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누구요 동화에 나오는 돼지가족 소풍은 아무리 숫자를 헤아려 보아도 한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하고 소풍까지 망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인생 길은 항상 부족과 결핍 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항상 당황할 수밖에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거치른 황무지에도 꽃은 피고, 메마른 사막에도 푸른 강물이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에서들에게 쫓기고 있습니까 어떠한 풀무불이 여러분을 삼키려 합니까 어떤 인생 역경이 여러분을 절망에 몰아넣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야곱에게 임했던 임마누엘의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도 충만히 임하셔서, 인생의 모든 환란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환란이던지 모두 다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극복하시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언약의 꿈(=원대한 꿈)입니다. 13절과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 꿈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야곱에게 이어지는 꿈입니다. 이 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안에서 수천 년 동안 꾸어왔던 원대한 꿈입니다. 아주 옛날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가 모여서 각자의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첫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랜 전부터 꿈이 있었지. 나는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거기서 세공을 받는 하나님의 성전의 제단이 되었으면 해.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이 경배드리러 와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두 번째 나무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거야. 나는 지중해의 해변으로 인도되어 큰 범선이 되어서 검푸른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나르는거야.” 그때 세 번째 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고 싶어. 그래서 높게 자란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하늘까지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도끼가 첫 번째 나무 밑에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제단이 되리라는 꿈은 깨어지고 베들레헴 어느 집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심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내 꿈은 어디가고 겨우 구유가 되다니”하고 말입니다.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짓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도 허무하게 깨어졌습니다. 꿈은 조그만 고깃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나무는 자신이 그렇게 무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에 대해 대단한 수치를 느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 역시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큰 죄인을 처형하는 세 개의 십자가 형틀로 변해가는 것을 알고 그만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꼴이 된 현실을 슬퍼했습니다. 아마 신앙인이라면 이야기의 마지막을 듣지 않고도 은혜로운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나무는 사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나무는 보잘것 없는 말구유가 되었음을 불평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거룩한 밤 하늘에 / 별이 찬란할 때, 마리아라는 성처녀가 한 아기를 낳아 바로 그 구유에 눕혔습니다. 그 아기는 메시야였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성전도 이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의 꿈이 깨진 채 조그맣고 냄새나는 갈릴리의 고깃배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배는 사도 베드로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작은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갈릴리의 조그만 고깃배는 이 세상의 어떤 큰 범선보다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십자가가 된 나무에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속죄를 다 이루시고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이 땅의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본딴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죄의 수렁에서 구원을 열망하는 수없는 인생들에게 영생과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계곡에 서 있던 세 그루의 평범한 나무들은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실패한 것 같았으나 참으로 거룩하고 영광이 넘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結論: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어떠한 고난이라도 극복하는 원대한 신앙의 꿈을 꾸는 사람이 되자 우리는 나의 짧은 생각으로 내 인생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냄새 나는 말먹이통이 되었다고 슬퍼합니다. 비린내 나는 고깃배가 되었다고 체념합니다. 흉악범을 매다는 형틀이 되었다고 비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한, 우리는 결코 체념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놀라운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대한 꿈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꿈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원대한 신앙의 꿈을 꾸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베푸셨던 그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풍성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각주)-‘처단자’라는 뜻. 열왕기하 4:14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열왕기하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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