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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단 (말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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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당을 책임지고 있는 한 유대 랍비가 있었는데 이 랍비의 특징은 성인교육에는 열의를 보 이는 반면 젊은이나 어린아이들의 종교교육에 대해서는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프로그램만을 가질 뿐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학생 철야기도회를 갖는다든지, 수련회 기간 중 회개와 결단의 밤을 갖는다든지 하는 특수 프로그램을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의아했습니다. 깨우치고 일깨워서 성숙 하고 굳건한 신앙 어린이, 신앙 청년을 하루 빨리 만들어야 겠는데 랍비가 이것을 허락하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선생님은 그토록 어른교육에는 열과 성을 다하시면서 젊은이나 어린아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교육적 열성을 나타내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랍비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대답이 이렇습니다. "어렸을 때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것은 커서 진짜에 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시절에 어설프 게 영적인 것을 경험하게 하면 그것이 면역이 되어서 정작 진짜를 경험하고 결단해야할 때에는 그렇게 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지않은 면역을 길러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회당 을 운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대하면서 랍비의 말에 머리가 끄덕여졌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적 현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만큼 종교성 강한 민족도 많지 않습니다. 종교인구 합계가 전인구를 합산한 수치를 상회하는 것처럼 종교라는 맛 을 조금씩은 맛본 이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두가 종교에 젖어살면서도 전혀 종교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전도를 해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생소한 사람 없고, 교회에 발 한번 들여놔보지 않 은 사람 없습니다. 다 한번쯤은 예수 소리를 들어봤고 한번쯤은 교회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안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옛날에 학생회장을 했니, 청년회장을 했니, 임원을 맡 았니, 성가대를 했니, 아주 자랑스럽게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저들이 왜 지금은 교회를 등 지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어설픈 옛체험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앓아 본 그때 그 신앙의 열병이 거듭나기 위한 열병의 전부인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겪어봤 더니 별거 아니라는 거지요. 면역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에 걸려들지 않는 겁니다. 저들의 경우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릇된 면역성이 우리로 하여금 진짜에 걸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초신자가 더 열심있다는 말은 바로 그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면역이 안되었기 때문에 진짜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상 당수의 기존신자들이 어려서 부터 믿어왔고 또 지금도 믿는다고 하는데 어찌된게 참된 종교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이지를 못하다는 자기발견을 하게 됨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한국교회도 점점 서구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세월 지나갈수록 종교인구는 줄어 들 것이고 예배당은 비어 갈 것입니다. 지금 현재 개신교인이 줄고 있고, 캐톨릭 교인이 줄고 있고, 불교인이 줄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회의주의'라는 것입니다. 점점 종 교라는 것에 식상하고 회의를 느끼는 현대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볼 때 하나님보다 더 힘있어 보이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라고 하는 것, 권력이라고 하는 것, 과학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힘있는 실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보다는 돈버는 일, 힘얻는 일, 사람만나는 일이 우선이 되어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종교회의주의에 대한 빌미를 오늘의 종교가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계종 사태가 그러했고 한 종교연구가의 피살 사건 등등 종교와 관계되어 나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던 추기경이 정신이상자에게 목을 움켜 잡히고 뒤로 넘어지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안팎으로 종교의 거룩성이 상실되는 현상 들이 나타나고 있고 이 겉모습에 편승해서 어지중간한 자리에 서 있던 자들이 세상으로 기울어 져 넘어가고 있는 것이 요즈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말라기가 기록될 당시의 정황도 오늘 우리 정황과 흡사했습니다. 그 시대 역시 믿음에 대한 회의가 가득하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처럼 정신적 영적 위기감이 감돌던 시대였습니다. 곳곳에 종교회의주의가 팽배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믿어서 무엇하나' '신이 무엇이고, 또 그 를 믿는다는 것이 내 삶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느냐'는 넋두리와 하소연들이 공공연히 내뱉어 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회의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져 간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전 5세기 경 바벨론이 페르샤에 무너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열심 을 내어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런 저들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위해 수고한 자신들 에게 풍요한 물질적인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벌어지 고 있는 상황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되고 번성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을 무시하며 사는 자들이 번성해 갔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성공하고 있었던게 아니라 불경한 자들이 오히려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저들은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 것일까' '여전히 우리를 사랑 하고 계신 것일까'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신 것일까.' 그리고 이런 물음 앞에 저들은 머리를 내 젖기 시작합니다. 2:17절 중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야훼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 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신 부재의 현실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현실이 '신 부재'를 증명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현실은 하나님이 행악하는 자를 도리어 곱게 보고 그를 기뻐하며 그에게 축복하는듯 하다는 것입니다. 공의는 더 이상 실제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들이 돌아와서 그토록 수고하고 애 써 성전을 재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은 저들을 향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 라 그 성전재건을 반대하고 조소했던 자들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는 종교회의주의에 빠져서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고 그릇된 가치관에 빠져들어 갑니다.
13절에 보면 '사람들은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그 완악한 말의 내용이 14절, 15절에 소개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 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 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조롱하는 말들이 가득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되고 그분 앞에 경건의 삶을 사는 것도 무익하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이 도리어 복을 받고, 그 뜻을 거스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형통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하는 현실 앞에 이런 넋두리는 완악한 말이 아니라 진리처럼 들려졌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듯한 시대'가 바로 이 말라기 선지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런 종교회의주의가 초래한 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말라기는 회의에 빠져 믿음을 상 실해 가는 세계의 현상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의와 조소는 곧 잣 대와 줏대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가치관의 혼란이 오고 그로 말미암는 삶의 헝클어짐이 시작 됩니다. 의로운 자들보다 불의한 자들이 득세해 가면서 사회는 혼탁해져 갔고 무엇보다 물질이 행복의 척도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3:8절에 보면 백성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십의 일 조의 일부를 편취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풍조 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일부 신자들은 제물의 일부를 덜내거나 조악한 제물을 바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1:8절에 보면 저들은 병든 짐 승, 눈 먼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값이 쌌기 때문입니다. 요 즘 말로 하면 덤핑 품목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서 쓸모가 없었 기에 값이 저렴했는데 저들은 바로 그것을 구입해서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 니까 '형식적이고 건성인 종교생활'이 판을 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들고 쓸모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제사에 대한 무관심과 등한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 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실한 예배로부터 돌이켰고 전심으로 주를 섬기지 않았으며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 남자들은 물질적 풍요와 출세를 위해서 자기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방여인과 결혼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2:11절의 말씀입니다. 많은 유대남자들은 그런 시대 풍 조를 따라 사회적 출세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줄 주 변 지역의 힘있는 세력과 혈연관계를 맺어 자기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기를 주저치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출세지향주의, 물질만능주의 가 판을 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회는 점점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종교, 사회, 정치 체제 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조소주의가 팽배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각 파당들 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나타나서 요즘 말로 하면 부처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 혈연이기주의 등등의 악이 도처에 만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 에 하나님께서 참개혁을 위해 보낸 선지자가 말라기였던 것입니다. 이 말라기의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말라기가 그리고 있는 이 장면 장면은 2500년 전의 그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그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때 나 지금이나 믿음이 조롱받고 믿음이 무기력한듯 느껴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현실은 또 그 회의를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어제와 오늘이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정말 공의가 있는가 하는 회의적인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별 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종교적 신념과 확신은 점점 더 해이해져 가고 이같은 위기감은 사회생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도덕적 회의주의와 기회주의적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때와 지금은 별로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 가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은 오늘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그런 시대에 말라기는 '예배'를 강조하고, '십일조'를 강조하고, '참된 봉헌'을 강조하고, '순결 '을 강조합니다. 사회적인 상황은 도덕성이 해이되어가고 있었고, 옳고 그름의 판단 분별이 혼돈 되어가고 있었고, 이혼이 성행해 가고 있었고, 전통적인 신앙이 약화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말라기는 도리어 저들 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러 일으키기 위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런 회의 가득한 현실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 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부재의 현실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견고한 신앙생활을 감당하는 자들의 이름을 당신의 비망록에 기록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는 바로 저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 회의 가득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높이는 자, 그를 하나님이 당신의 리스트에 적어 두셨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코끝이 찡해져 오는 하나님의 격려입 니까 요즈음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있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영화의 천재라고 불리우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수상한 명작입니다.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로 그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칼라가 아닌 흑백으로 영상처리된 영화입니다. 3시간 15분 동안 숨가쁘게 돌아가는 장면 하나하나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지루함을 모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내용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됩니다. 십여일 만에 폴란드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아우슈 비츠, 부켄발트, 트레블링카 등등에서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 나치 당원이면서 사업가인 한 독일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바로 쉰들러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나라에서 사업에 실패하자 전쟁을 호기삼아 돈을 벌 요량으로 폴란드에 진주하는 독 일군을 따라 와서 군대에 식기를 납품하는 공장을 차립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들의 환심을 사서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유대인들을 고용하고 그 덕분에 엄청난 돈을 끌어 모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쉰들러는 독일군들이 유대인 게토지역을 소탕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속에서 독일의 엄청난 악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천진 난만한 한 유태 어린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향해가는 자기 공장의 유대인들을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구해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독일군 장교에게 사람당 얼마씩으로 계산해서 유대인 1,000여명을 구해내게 됩니다. 그 쉰들러에 의해서 작성된 1,000여명의 이름이 기록된 명단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유대인 모두가 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머리를 깍이우고 가스실에 들어가 고통 속에서 숨져 가지만 이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즉 '쉰들러 의 유대인' 1,000여명만은 목숨을 건집니다. 그 사람들이 살아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쉰들러의 명단에 끼어있었다는 것 뿐입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오직 저들의 이름이 쉰들러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저들은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그 명단이 독일군에게 전달되자 독일군은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에서, 그리고 가스실로 향해가는 대열에서 저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저들은 죽음에서 건짐받게 됩니다. 그 명단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얻기도 하고 못얻기도 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여호와의 명단/야훼스 리스트'라고 붙였습니다. 여호와의 명단, 하나님의 비망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기념책도 그런 효력을 가진 문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저 악한 자들의 비웃음과 망언을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이것은 쉰들러 리스트처럼 심판과 재앙의 날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문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야훼스 리스트'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당신의 정한 날에 당신의 특 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소유물이라는 히브리어 '세귤라'는 왕의 소유물에 만 붙여지는 단어입니다. 특별한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이 그를 아끼겠 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도 어쩌면 말라기 선지의 때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시대입니다. 종교회의주의가 이곳 저곳에서 뭉개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봐라! 도리어 안믿는 자들이 형통하고 잘되어 가지 않느냐'는 조롱이 우리 귓전을 때리고 있습니다. 또 현실은 정말 저들의 그런 완악한 말을 사실처럼 진리처럼 증명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끝 까지 견고히 붙잡고 살아갈 때에 거기에 선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겁니다. 요즘 4.19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입니다. 어제의 역 적이 오늘의 충신이 되고, 어제의 폭도가 오늘의 영웅이 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제 스스로에게 이 역사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가를 새삼 되묻게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은 없다' 해도, 그 누군가가 '믿음은 쓸모없는 것이다' 해도 우리는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키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을 당신의 비망록에 기록해 놓으시고 그날에 영생의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끝이 아닌 중간지점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간에서 웃는 자가 승리자가 아니라 끝에서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임을 기억하십시다. 삶의 반전이 일 어나는 그 때에 옛 이야기 하면서 활짝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반열에 여러분과 저 모두가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하는 자를 오늘 도 당신의 기념책에 기록해 가시고 계십니다. "믿음을 갖기도 힘들고 믿음을 지키기도 힘든 시대 속에서 저희를 구별되이 부르사 특별한 소유 삼아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존귀를 돌리옵니다. 현실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신앙을 희 석화시킬찌라도 견고한 믿음의 심지를 흐트러뜨리지 말게 하옵시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의 가득한 시대일수록 더욱 참된 믿음의 사람임을 드러내게 하사 하나님의 기념책에 다 기록되는 저희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 품안에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천국의 소망을 키워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만 보는 눈이 아닌 내 일을 보는 눈을 주옵시고, 여기만 귀기울이는 삶이 아닌 거기에 귀기울이는 삶이 되게 해 주셔 서 자녀에게 속삭이는 세미한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을 힘찬 믿음의 걸음을 옮겨가는 도상의 나그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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