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종교에로의 부름 (슥7:1-14)
본문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 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슥7:9-10) 스가랴서 7장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갈 것인가 하는 내용의 말씀이며 진정한 신앙과 진정한 경건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금식의 논란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슥7:5)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 문제를 가지고 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속죄 일에 금식을 하도록 하는 법령을 모세를 통하여 내리 신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죄 일에 죄를 자복 하고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유대 사람들은 한 술 떠서 자기를 마음대로 금식일 을 많이 만들었 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지키던 금식일 이 특별히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금식 일을 정해서 율법 처럼 얽어맸습니다. 첫 번째는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슬퍼해서 그 때를 기억하며 네번 째 달인 딤무스월(지금월력으로 7월)17일은 금식을 선언했습니다. 두 번째는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불을 지른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그해 아브월 (다섯째 달로 오늘의 8월)9일에 또 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예레미야 41장10절에 의하여 이스마엘에 의해서 그달랴를 비룻함 몇 사람 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여 일곱째 달인 기슬리월(10월)3일에 금식을 정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것을 기억하여 열번째달인 개뱃월,(오늘날의 1월)10일에 금식을 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슬픈 일만 있으면 금식일 을 선언하고 백성들에게 금식을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금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금식의 원래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기억하 며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만 나중에는 본래의 정신을 상실해 버리고 백성들이 이에 얽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바벨론 땅에서 지키던 금식일 을 계속 지킬 것인 가에 대해 스가랴 선지자와 함께 논하게 되었습니다. 금식 일은 예루살렘을 상실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그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금식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마당에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마당에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가슴을 치며 했던 금식을 해야 하느냐를 스가랴 선지자에게 대표단들에 의해 질문하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 나라에도 국치일 이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한일합방을한 그 날을 슬픈 날이라고 하여 한동안 기념했는데 요즘 에 와서는 달력에서도 삭제가 되고 국치 일을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나라에서 도 강조를 안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고 하는 뜻은 좋지만 국권을 회복한 이 마당에 국치 일이 국민 들의 감정으로나 또 세계의 흐름을 통해서 볼 때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전 주일 아침에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은 부패한 양심, 타락한 양심이니까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여 사도 바울이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규범을 정해 주었는데 그 규범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둘째,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유익이 되는가 셋째, 자기 자신에게 평안이 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세 가지를 양심을 판단하는 규범으로 제시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졌으니 그 날을 기억하여 금식하라는 말이 없는 데 한편으로는 70년 간 지켜 오던 것을 갑자기 무너뜨리자니 섭섭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계속해야 하는 의미도 없습니다. 슬픈 추억에 몰두해야 하느냐 희망찬 미래를 향해서 가야 되느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면 금식을 하거나 안하거나 그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정신이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형식주의에 빠지고 미신의 껍질에 덮여서 하는 금식이란 사람만 괴롭히고 피곤하게 만 하는 것이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금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금식을 할 때에 형식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공효를 주시어서 자기들에게 큰 효과가 나서 하나님이 복을 더 주시고 은혜를 더 주시는 줄 알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할 때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금식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법에 밀려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억지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수 주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인 데 사람들이 마음은 세상에 다 빼앗기고 몸만 억지로 와서 돈지갑에서 돈만 꺼내 집어던지고 가 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회교국 가나 카톨릭 국가를 보면 금식일 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회교도들은 리마단이라고 해서 그때에는 40 일 간 해 있는 동안 금식을 하는 데 해가 지면 아주 잔치를 하듯 먹습니다. 낮에는 굶으면서 일도 안하고 그늘에서 잠만 자다가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고기 뜯어먹고 춤추고 식당이 버글버글합니다. 그럼 금식을 무엇 때문에 40 일씩 합니까. 카톨릭에서도 성 무슨 날 해서 금식 일이 많습니다. 금식이 나쁜 것은 안이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 자랑스럽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2.진정한 희생 그 금식이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7:5) 이 같은 금식의 논란에 대하여 스가랴 선지자는 가슴 아픈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금식이란 자기 몸을 깎는 희생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상실한 채 하나님 앞에 백 번 나와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5절에 나를 위하여 를 두 번 반복한 것은 히브리어 문법 상에서 강조 용법입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 아멘 이나 진실로 진실로 가 모두 강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0 년 동안 했던 금식은 결국은 자기들의 이기심이 가득 차서 자기 중심적이고 인본 주의적인 것이었고 결코 하나님 앞에 희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조상들은 범죄 하여 징벌을 받았으니 지금의 백성은 그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순종 의 멍에를 메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그냥 순종을 하면 좋을 텐데 순종을 잘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코에 고삐를 끼어서 끌고 가는 안타 가운 지경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찍이 순종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삐를 끼어 바벨론 까지 끌고 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금강석처럼 굳은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을 거울 삼아서 하나님 앞에 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보좌의 문을 닫으시고 심판의 보좌의 문을 여시어 아름다운 땅을 황무케 하실 터이니 이제는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기심에 가득 차고 더우기 물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거짓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희생을 했습니까. 헌금을 얼마나 바쳤는가를 묻지 말고 바친 다음에 얼마가 남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희생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희생의 제물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엽전 두 닢을 왜 그렇게도 칭찬하셨으며 오늘날까지도 소중히 알려지고 있습니까. 그 과부는 꼭 바쳐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재산 팔아서 다 바치고 거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희생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은퇴하면 뭐 먹고사나 먼저 은혜에 갖다 놓아야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전체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것이 과부의 엽전 두 닢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그 심정, 그 희생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와 내 가정, 우리 교회와 민족 사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히 받아 들여서 우리 자신이 순종과 희생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금식의 논란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슥7:5)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 문제를 가지고 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속죄 일에 금식을 하도록 하는 법령을 모세를 통하여 내리 신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죄 일에 죄를 자복 하고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유대 사람들은 한 술 떠서 자기를 마음대로 금식일 을 많이 만들었 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지키던 금식일 이 특별히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금식 일을 정해서 율법 처럼 얽어맸습니다. 첫 번째는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슬퍼해서 그 때를 기억하며 네번 째 달인 딤무스월(지금월력으로 7월)17일은 금식을 선언했습니다. 두 번째는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불을 지른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그해 아브월 (다섯째 달로 오늘의 8월)9일에 또 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예레미야 41장10절에 의하여 이스마엘에 의해서 그달랴를 비룻함 몇 사람 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여 일곱째 달인 기슬리월(10월)3일에 금식을 정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것을 기억하여 열번째달인 개뱃월,(오늘날의 1월)10일에 금식을 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슬픈 일만 있으면 금식일 을 선언하고 백성들에게 금식을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금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금식의 원래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기억하 며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만 나중에는 본래의 정신을 상실해 버리고 백성들이 이에 얽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바벨론 땅에서 지키던 금식일 을 계속 지킬 것인 가에 대해 스가랴 선지자와 함께 논하게 되었습니다. 금식 일은 예루살렘을 상실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그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금식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마당에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마당에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가슴을 치며 했던 금식을 해야 하느냐를 스가랴 선지자에게 대표단들에 의해 질문하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 나라에도 국치일 이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한일합방을한 그 날을 슬픈 날이라고 하여 한동안 기념했는데 요즘 에 와서는 달력에서도 삭제가 되고 국치 일을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나라에서 도 강조를 안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고 하는 뜻은 좋지만 국권을 회복한 이 마당에 국치 일이 국민 들의 감정으로나 또 세계의 흐름을 통해서 볼 때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전 주일 아침에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은 부패한 양심, 타락한 양심이니까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여 사도 바울이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규범을 정해 주었는데 그 규범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둘째,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유익이 되는가 셋째, 자기 자신에게 평안이 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세 가지를 양심을 판단하는 규범으로 제시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졌으니 그 날을 기억하여 금식하라는 말이 없는 데 한편으로는 70년 간 지켜 오던 것을 갑자기 무너뜨리자니 섭섭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계속해야 하는 의미도 없습니다. 슬픈 추억에 몰두해야 하느냐 희망찬 미래를 향해서 가야 되느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면 금식을 하거나 안하거나 그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정신이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형식주의에 빠지고 미신의 껍질에 덮여서 하는 금식이란 사람만 괴롭히고 피곤하게 만 하는 것이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금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금식을 할 때에 형식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공효를 주시어서 자기들에게 큰 효과가 나서 하나님이 복을 더 주시고 은혜를 더 주시는 줄 알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할 때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금식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법에 밀려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억지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수 주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인 데 사람들이 마음은 세상에 다 빼앗기고 몸만 억지로 와서 돈지갑에서 돈만 꺼내 집어던지고 가 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회교국 가나 카톨릭 국가를 보면 금식일 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회교도들은 리마단이라고 해서 그때에는 40 일 간 해 있는 동안 금식을 하는 데 해가 지면 아주 잔치를 하듯 먹습니다. 낮에는 굶으면서 일도 안하고 그늘에서 잠만 자다가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고기 뜯어먹고 춤추고 식당이 버글버글합니다. 그럼 금식을 무엇 때문에 40 일씩 합니까. 카톨릭에서도 성 무슨 날 해서 금식 일이 많습니다. 금식이 나쁜 것은 안이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 자랑스럽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2.진정한 희생 그 금식이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7:5) 이 같은 금식의 논란에 대하여 스가랴 선지자는 가슴 아픈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금식이란 자기 몸을 깎는 희생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상실한 채 하나님 앞에 백 번 나와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5절에 나를 위하여 를 두 번 반복한 것은 히브리어 문법 상에서 강조 용법입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 아멘 이나 진실로 진실로 가 모두 강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0 년 동안 했던 금식은 결국은 자기들의 이기심이 가득 차서 자기 중심적이고 인본 주의적인 것이었고 결코 하나님 앞에 희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조상들은 범죄 하여 징벌을 받았으니 지금의 백성은 그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순종 의 멍에를 메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그냥 순종을 하면 좋을 텐데 순종을 잘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코에 고삐를 끼어서 끌고 가는 안타 가운 지경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찍이 순종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삐를 끼어 바벨론 까지 끌고 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금강석처럼 굳은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을 거울 삼아서 하나님 앞에 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보좌의 문을 닫으시고 심판의 보좌의 문을 여시어 아름다운 땅을 황무케 하실 터이니 이제는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기심에 가득 차고 더우기 물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거짓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희생을 했습니까. 헌금을 얼마나 바쳤는가를 묻지 말고 바친 다음에 얼마가 남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희생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희생의 제물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엽전 두 닢을 왜 그렇게도 칭찬하셨으며 오늘날까지도 소중히 알려지고 있습니까. 그 과부는 꼭 바쳐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재산 팔아서 다 바치고 거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희생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은퇴하면 뭐 먹고사나 먼저 은혜에 갖다 놓아야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전체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것이 과부의 엽전 두 닢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그 심정, 그 희생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와 내 가정, 우리 교회와 민족 사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히 받아 들여서 우리 자신이 순종과 희생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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