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과 요나의 고집 (욘1:1-17)
본문
누가복음 요나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있고도 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 하며 평화를 주려하시는데, 요나로 대표된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거 부하고 민족주의적인 편협성(偏狹性)에 갇혀 죄악을 저지른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을 촉구하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요나의 이야기는 죄를 지은 인간이라도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과 선민을 괴롭힌 적국에 대하여 가차없는 심판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독선이 대조되면서 그 괴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요나서에 나타난 대로 보면, 요나는 앗수르 제국과 그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심판을 받아 멸망되어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가 수립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복의 근원으로서 선택받 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하는 대신 선민된 자신들의 민족주의만 내세우면서 다 른 민족에 대한 멸시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멸망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치 이 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보면, 북한에 대한 우리의 감정 이 바로 요나와 같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라"는 명령을 주 셨습니다. 이것은 니느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도저히 해소할 길 없는 원한 관계를 청산하고 거기에 평화를 가져 오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주신 이 런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에게 있어선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공정 치 못한 명령이라고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721년에 바로 그 앗수르 제국에 의해 이 스 라엘이 멸망을 당했는데, 그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요나가 어떻게 원한이 사무친 적국의 수 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공정치 못한 처사였 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바로 그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요 나의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시려는 하나님의 도전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가야할 니느웨 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구가 두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의 활동 성역이라고 믿었던 이 스라엘의 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역이 그 땅에 국한 될 수도 없었고 그 명령을 회피할 수 있는 예언자의 길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급속하게 다가온 통일 논의는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로 떠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거 경험만을 내세우며, 여전히 반공 구호에만 매여 있다는 것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북한의 완고함, 그리고 야만 적인 행위와 억지-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도망갈 다시스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 들 때문에 우리는 도저히 저들과 통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또 다시 위험 부담이 없는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탄 배가 향해 하는 바다에 하나님이 바람을 던져 넣으셨습니다. 요나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 리였습니다. 이 바람 때문에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각각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 고 배에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누 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요나를 깨우기 위한 폭풍인데 애매하게 다른 사람들만 고생을 한 것 입니다. 장본인인 요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깊이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잠든 것은 폭풍 이 일기 전이 아니라 폭풍이 일어나 온통 소동이 난 것을 보고서입니다. 요나는 어쩌면 이 배 에 탄 이방 사람들이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쩌 면 차라리 배가 깨져 이 이방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의 냉혹성으로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들의 당한 환난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고 생각하고 그는 깊이 잠이 든 것입니다. 무서운 이기주의, 무서운 냉혹성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혹시 이 요나를 닮지 않았나 생각하면 두려워집니다. 민주화 열기로 한 참 이 사회가 달아올랐을 때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였습니까 일부 교회를 빼놓고는 모두가 무 관심했던 것이 사실이 아닐까요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찬송 부르며, 민주 화는 교회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잠들어 있지 않았던가요 애써 외면하려 했고, 애써 무 관심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면서 계속 터져 나오는 지난 날의 비리들을 보면서 그 것 이 바로 교회가 예언자의 사명을 애써 회피하였던 결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잠 들 어 있는 요나를 깨우시려고 하나님은 폭풍을 바다에 던져 넣으시는데, 요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뱃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나와 제비를 뽑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제비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추궁(追窮)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싫어하는 이방 사람들의 입을 빌려 그를 심 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방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야훼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길임 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두려워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요나는 자 기를 바다에 던져 넣으라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뱃 사람들은 요나 를 바다에 던져 넣지 아니하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파 도가 더욱 거칠어지자 저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서 요나를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이방 사람들의 인간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나 의 냉혹성에 비교해 볼 때, 또 철저한 보복 논리로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우고 있는 그의 교리적 인 신념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의 종교성과 인간미는 보다 원초적(原初的)이고 더 순수한 것입니다. 훨씬 더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알고 섬기는 여호와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 이 없었어도 본능적으로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그의 뜻을 따르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아마 도 이런 신앙이 율법주의와 형식에 얽매인 이스라엘의 신앙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것임을 이 요나서는 보여 주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교리나 율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순 수 하게 인간 밑바탕에서 울어나는 인간애가 율법을 따라 억지로 나타나는 사랑보다도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요나서가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교리에 얽매인 우리의 신앙 생활이 잘못하면 요나의 신앙처럼 냉혹하고 사랑 없는 기계 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중세 교회가 저질러 온 큰 잘못의 하나가 바로 이 냉혹한 교조 적 인 판단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화나 이 민족의 통일 문제를 정치 적 인 문제로 돌리면서 교회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서 계속 내 교회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교회는 이제까지 가져 온 틀에 박힌 좁은 신앙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다 더 거시적인 시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을 회 복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멸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순수한 열 정과 사랑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맞는 일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란 하나님 나라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민족에 대한 순수한 사랑, 이념과 사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같은 핏줄 이 가질 수 있는 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의 교리적인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끝까 지 맞서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뱃 사람들에게 아주 냉혹하게 자신을 바다에 던져 넣으라 고 말합니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범죄 하였다 할지라도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본능인데, 지금 요나는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죽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요즈음 학생들이 자기의 신념의 관철을 위 해 분신이나 투신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소름끼침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을 내던 지는 요나를 보면서 우리는 사상과 이념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요나의 행동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니느웨를 향한 계획은 수정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요나 자신이 니느웨를 향하여 가지는 않게 될 것 이 라고 본 것입니다.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려던 하나님의 계획은 마침내 실패할 것이고 결국 그 러면 요나 자신이 하나님의 의지를 꺾고 승리한 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 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려 했던 요나, 철저하게 자기 신념에 머물려 했던 요나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요, 냉혹한 인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어쩌면 요나같이 행동할런지 모릅니다. 북한과 통일을 해야된다고 기도 도 하고 주장도 하지만 저들이 우리에게 머리 숙이고 들어와서 제발 좀 같이 살게 해 주십시요 라고 빌기를 기다리는 그런 통일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리 가 저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저들과 같이 자리를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생각이 아 니겠습니까 저들은 전부 나쁘고 우리만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네 생각 이 틀렸으며, 저들도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라고, 내가 저들을 구원하고자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과연 거기에 순순히 순복(順服)할 수 있을까요 요나는 드디어 자기의 소원대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승부에서 요 나 가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요나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나갔기에 처벌을 받고, 대신 다른 예언자로 하여금 니느 웨 로 가게 하셨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요나이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의 긍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큰 물고기를 보내 그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도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믿는 그 릇된 신앙을 지키려 그 캄캄한 고기 뱃속에서도 끝까지 버틴 것입니다. 참으로 독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사흘만에 비로소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 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 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나의 이야기에서 완고하고 교만한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인 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를 마침내 보내셔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그 긍휼하심에 오 직 우리는 감사와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한국 교회가 지난 날에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다른 길로 갔다 할 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이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이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릇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인 통일의 문제를 교회를 통해 하나님 은 이룩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 교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 해의 십자가 없이는 결단코 이념과 사상을 초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리 석 은 우리의 잘못된 고집과 주장을 꺾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려 통일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거 경험만을 내세우며, 여전히 반공 구호에만 매여 있다는 것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북한의 완고함, 그리고 야만 적인 행위와 억지-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도망갈 다시스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 들 때문에 우리는 도저히 저들과 통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또 다시 위험 부담이 없는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탄 배가 향해 하는 바다에 하나님이 바람을 던져 넣으셨습니다. 요나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 리였습니다. 이 바람 때문에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각각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 고 배에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누 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요나를 깨우기 위한 폭풍인데 애매하게 다른 사람들만 고생을 한 것 입니다. 장본인인 요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깊이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잠든 것은 폭풍 이 일기 전이 아니라 폭풍이 일어나 온통 소동이 난 것을 보고서입니다. 요나는 어쩌면 이 배 에 탄 이방 사람들이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쩌 면 차라리 배가 깨져 이 이방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의 냉혹성으로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들의 당한 환난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고 생각하고 그는 깊이 잠이 든 것입니다. 무서운 이기주의, 무서운 냉혹성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혹시 이 요나를 닮지 않았나 생각하면 두려워집니다. 민주화 열기로 한 참 이 사회가 달아올랐을 때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였습니까 일부 교회를 빼놓고는 모두가 무 관심했던 것이 사실이 아닐까요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찬송 부르며, 민주 화는 교회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잠들어 있지 않았던가요 애써 외면하려 했고, 애써 무 관심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면서 계속 터져 나오는 지난 날의 비리들을 보면서 그 것 이 바로 교회가 예언자의 사명을 애써 회피하였던 결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잠 들 어 있는 요나를 깨우시려고 하나님은 폭풍을 바다에 던져 넣으시는데, 요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뱃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나와 제비를 뽑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제비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추궁(追窮)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싫어하는 이방 사람들의 입을 빌려 그를 심 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방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야훼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길임 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두려워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요나는 자 기를 바다에 던져 넣으라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뱃 사람들은 요나 를 바다에 던져 넣지 아니하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파 도가 더욱 거칠어지자 저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서 요나를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이방 사람들의 인간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나 의 냉혹성에 비교해 볼 때, 또 철저한 보복 논리로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우고 있는 그의 교리적 인 신념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의 종교성과 인간미는 보다 원초적(原初的)이고 더 순수한 것입니다. 훨씬 더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알고 섬기는 여호와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 이 없었어도 본능적으로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그의 뜻을 따르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아마 도 이런 신앙이 율법주의와 형식에 얽매인 이스라엘의 신앙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것임을 이 요나서는 보여 주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교리나 율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순 수 하게 인간 밑바탕에서 울어나는 인간애가 율법을 따라 억지로 나타나는 사랑보다도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요나서가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교리에 얽매인 우리의 신앙 생활이 잘못하면 요나의 신앙처럼 냉혹하고 사랑 없는 기계 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중세 교회가 저질러 온 큰 잘못의 하나가 바로 이 냉혹한 교조 적 인 판단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화나 이 민족의 통일 문제를 정치 적 인 문제로 돌리면서 교회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서 계속 내 교회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교회는 이제까지 가져 온 틀에 박힌 좁은 신앙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다 더 거시적인 시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을 회 복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멸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순수한 열 정과 사랑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맞는 일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란 하나님 나라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민족에 대한 순수한 사랑, 이념과 사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같은 핏줄 이 가질 수 있는 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의 교리적인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끝까 지 맞서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뱃 사람들에게 아주 냉혹하게 자신을 바다에 던져 넣으라 고 말합니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범죄 하였다 할지라도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본능인데, 지금 요나는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죽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요즈음 학생들이 자기의 신념의 관철을 위 해 분신이나 투신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소름끼침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을 내던 지는 요나를 보면서 우리는 사상과 이념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요나의 행동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니느웨를 향한 계획은 수정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요나 자신이 니느웨를 향하여 가지는 않게 될 것 이 라고 본 것입니다.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려던 하나님의 계획은 마침내 실패할 것이고 결국 그 러면 요나 자신이 하나님의 의지를 꺾고 승리한 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 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려 했던 요나, 철저하게 자기 신념에 머물려 했던 요나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요, 냉혹한 인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어쩌면 요나같이 행동할런지 모릅니다. 북한과 통일을 해야된다고 기도 도 하고 주장도 하지만 저들이 우리에게 머리 숙이고 들어와서 제발 좀 같이 살게 해 주십시요 라고 빌기를 기다리는 그런 통일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리 가 저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저들과 같이 자리를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생각이 아 니겠습니까 저들은 전부 나쁘고 우리만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네 생각 이 틀렸으며, 저들도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라고, 내가 저들을 구원하고자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과연 거기에 순순히 순복(順服)할 수 있을까요 요나는 드디어 자기의 소원대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승부에서 요 나 가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요나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나갔기에 처벌을 받고, 대신 다른 예언자로 하여금 니느 웨 로 가게 하셨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요나이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의 긍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큰 물고기를 보내 그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도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믿는 그 릇된 신앙을 지키려 그 캄캄한 고기 뱃속에서도 끝까지 버틴 것입니다. 참으로 독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사흘만에 비로소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 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 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나의 이야기에서 완고하고 교만한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인 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를 마침내 보내셔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그 긍휼하심에 오 직 우리는 감사와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한국 교회가 지난 날에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다른 길로 갔다 할 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이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이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릇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인 통일의 문제를 교회를 통해 하나님 은 이룩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 교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 해의 십자가 없이는 결단코 이념과 사상을 초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리 석 은 우리의 잘못된 고집과 주장을 꺾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려 통일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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