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신앙을 갖자 (사40:27-31)
본문
군인들이 훈련을 받는 것 중에 독도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는 지역에 지도와 나침반만을 준 채로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목적지까지 찾아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길도 없는 산 속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해가 떨어지게 되면 생명의 위험도 느끼게 됩니다. 저도 이 훈련을 하다가 길을 잃어서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사람이 산 속에서 헤메일 때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주변을 살필 수가 있고 주변을 살핀 후에는 다시 자기가 갈 길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유익을 줄 때가 많습니다. 인기도 올라가고, 경제 수준도 올라가고, 지식도 올라가고, 기술도 올라가고, 능력도 향상되고, 믿음도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독수리가 날개짓하며 위로 올라갈 때 그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힘이 생깁니다. 독수리의 날개짓하며 위로 올라감 같이 우리의 신앙이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 이 시간은 독수리 신앙을 갖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마음을 조아리므로 말씀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독수리 신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는 독수리에 대한 견해가 반드시 좋게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14장 12절에 보면 부정한 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39장 30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죽은 것을 먹는 독수리는 부정한 동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48장 40절에 보면 독수리는 심판의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동물을 공격하는 못된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에게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독수리는 빨리 날아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3에 보면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여 빠른 걸음이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독수리는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예레미야 49장 16절에 보면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라고 했다. 독수리는 높이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때에 따라 인간의 높음은 교만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좌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곳이 높은 곳에 두어야 함은 두말할나위 없는 사실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높은 곳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독수리는 수명이 깁니다. 시편 103편 5절에 보면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청춘이 되어서 새롭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넷째로 독수리는 시각이 발달되어 멀리 바라봅니다. 욥기 39장 27절로 29절에 보면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뽀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육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더욱 더 먼 곳을 향해야 합니다. 창밖을 내다볼 때 지나가는 물체에 시선을 집중하면 정확히 볼 수 있지만 유리를 바라보면 지나가는 물체를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육신적인 눈 앞의 것들만 바라보면 우리는 더 원인적이고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 더 멀리 볼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영적 통찰력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독수리는 비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의 말씀에 보면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심 같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수리는 영적 활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독수리는 분명히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독수리의 비상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독수리가 날개짓하고 오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치솟아 오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을 향하여 오를 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독수리는 곤비치 않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독수리가 하루 종일을 날아다녀도 지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순례의 길이 수 십년, 수 백년을 가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음질 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위협이 온다고 할찌라도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독수리는 신속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1장 10절과 14절을 보면 번개같이 빠르다고 했다. 죄악을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디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빠르기가 독수리보다 번개보다 더 빨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약해져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오와지는데 독수리같이 비상하는 신앙으로, 곤비치 않는 신앙으로 주님을 향해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27절)
본문 27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내용은 먼저 그들의 사정이 여호와께 숨겨졌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들의 원통함이 수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며 다음으로는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피곤치 않게 하시며 곤비치 않게 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들과 같이 온통 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치가도 믿을 수 없고, 교육자도 믿을 수 없고, 경찰도 믿을 수 없고, 종교 지도자도 믿을 수 없고, 법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다보니 온통 보이는 것 마다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속고 나니다른 부분도 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한 번은 나뭇군이 산에 나무를 하던 도중에 목이 말라서 샘에서 물을 떠먹었습니다. 물을 먹고 한숨을 내수면서 물 속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뭇군은 겁에 질려서 얼른 도망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가 그 물을 먹었으니 무슨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르시름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주위에서 보다못한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다가 당시의 복장으로 그 샘물에 가도록 권유를 했습니다. 원인부터 치료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느니 한 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여 그 때의 상황을 재현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은 그 물 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군의 모자에 꽂혀 있던 꿩의 날개가 물 속에 비쳤던 것입니다. 그 것을 알고난 나뭇군은 그 후로 몸이 속히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심이 얼마나 심각한 결론을 가져왔는가를 보여주는 예화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 많은 의심이 있습니다. 바느질하다가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면 피 한방울이면 그만인데 그것이 나중에 곪고, 또 썩어서 손가락을 자르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합니다. 허리가 조금 아프면 디스크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고, 무릎이 조금 아프면 관절염이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모든 부분에 의심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1. 우리의 의심의 원인들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알지 못함이요, 듣지 못함입니다(28절). 머리로만 알고 귀로만 듣지 심령으로 들어서 심비에 새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어도 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둘째는 고난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유익을 모르는 사람으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말하기를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고난이 잠시면 견디기 쉬우나 그 기간이 길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6장 9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역시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일들이기에 이스라엘은 견딜 수가 없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의심을 하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이 계속해서 온다고 할찌라도 우리 속에 어떤 고난이 집중적으로 나를 엄습한다고 할찌라도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이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42편 2의 말씀과 같이 기가 막힐 수렁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4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성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무디가 생각하기로는 오랜 세월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으니 얼마나 구차하겠으며 그 마음은 얼마나 침울해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위로하려고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자를 방문하고 나오는 무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늘 내가 천당을 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비록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내며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심하는 이유 중에 세번째 이유는 실망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로 11절에 보면 예수님께 실망한 제자들이 의심에 빠져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적 눈으로 보았던 가룟유다는 급기야는 실망하여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이유는 네번째 이유는 세상 것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세상 지식에 따르다보면 의심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로 25절에 보면 세상 지식에 싸인 자들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사40:24). 다섯째는 창세기 3장 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할 때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의심하게 된 결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첫째로 떨어집니다. 타락하게 됩니다. 죄를 행하게 됩니다.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받는다고 의심하던 가인의 결과는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브의 의심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면 떨어집니다.
둘째로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로 31절에서 베드로는 의심하다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건져주시면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주님의로부터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이르기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을 하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3.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독수리 신앙의 지름길입니다(31절).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의심을 떨쳐버리고 비상하는 비결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앙망하는 것은 사모하여 그리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앙망하는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항상 바라야 합니다. 시편 25편 15절에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눈이 쇠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사야 38장 14절에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라고 했다.
셋째로 환난 중에도 해야 합니다.
넷째로 구원을 바라며 해야 합니다. 이사야 51장 5절에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간구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사야 33장 2절에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경외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사야 22:11에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일곱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시 63장 1절에 “내가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박한 심령을 가진 자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로 절규하는 소리에 응답하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로 8절의 과부도 절박한 심정으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독수리 같은 신앙으로 의심을 버리고 여호와를 앙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구원으로 응답하십니다(사45:12).
본문 30절이나 31절에 있는대로 다른 사람이 넘어질 때에라도 넘어지지 않고 달려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시34:5). 새 힘을 얻습니다. 성령님의 힘을 얻습니다. 능력을 소유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흐르는 강은 죽은 사해 바다를 다시 살리는 것 같은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죽은 심령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새 히믕ㄹ 얻어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 전심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독수리 신앙으로 항상 승리하고 솟구치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일단 사람이 산 속에서 헤메일 때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주변을 살필 수가 있고 주변을 살핀 후에는 다시 자기가 갈 길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유익을 줄 때가 많습니다. 인기도 올라가고, 경제 수준도 올라가고, 지식도 올라가고, 기술도 올라가고, 능력도 향상되고, 믿음도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독수리가 날개짓하며 위로 올라갈 때 그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힘이 생깁니다. 독수리의 날개짓하며 위로 올라감 같이 우리의 신앙이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 이 시간은 독수리 신앙을 갖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마음을 조아리므로 말씀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독수리 신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는 독수리에 대한 견해가 반드시 좋게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14장 12절에 보면 부정한 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39장 30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죽은 것을 먹는 독수리는 부정한 동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48장 40절에 보면 독수리는 심판의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동물을 공격하는 못된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에게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독수리는 빨리 날아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3에 보면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여 빠른 걸음이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독수리는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예레미야 49장 16절에 보면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라고 했다. 독수리는 높이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때에 따라 인간의 높음은 교만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좌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곳이 높은 곳에 두어야 함은 두말할나위 없는 사실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높은 곳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독수리는 수명이 깁니다. 시편 103편 5절에 보면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청춘이 되어서 새롭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넷째로 독수리는 시각이 발달되어 멀리 바라봅니다. 욥기 39장 27절로 29절에 보면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뽀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육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더욱 더 먼 곳을 향해야 합니다. 창밖을 내다볼 때 지나가는 물체에 시선을 집중하면 정확히 볼 수 있지만 유리를 바라보면 지나가는 물체를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육신적인 눈 앞의 것들만 바라보면 우리는 더 원인적이고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 더 멀리 볼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영적 통찰력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독수리는 비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의 말씀에 보면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심 같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수리는 영적 활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독수리는 분명히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독수리의 비상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독수리가 날개짓하고 오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치솟아 오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을 향하여 오를 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독수리는 곤비치 않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독수리가 하루 종일을 날아다녀도 지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순례의 길이 수 십년, 수 백년을 가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음질 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위협이 온다고 할찌라도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독수리는 신속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1장 10절과 14절을 보면 번개같이 빠르다고 했다. 죄악을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디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빠르기가 독수리보다 번개보다 더 빨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약해져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오와지는데 독수리같이 비상하는 신앙으로, 곤비치 않는 신앙으로 주님을 향해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27절)
본문 27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내용은 먼저 그들의 사정이 여호와께 숨겨졌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들의 원통함이 수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며 다음으로는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피곤치 않게 하시며 곤비치 않게 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들과 같이 온통 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치가도 믿을 수 없고, 교육자도 믿을 수 없고, 경찰도 믿을 수 없고, 종교 지도자도 믿을 수 없고, 법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다보니 온통 보이는 것 마다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속고 나니다른 부분도 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한 번은 나뭇군이 산에 나무를 하던 도중에 목이 말라서 샘에서 물을 떠먹었습니다. 물을 먹고 한숨을 내수면서 물 속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뭇군은 겁에 질려서 얼른 도망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가 그 물을 먹었으니 무슨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르시름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주위에서 보다못한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다가 당시의 복장으로 그 샘물에 가도록 권유를 했습니다. 원인부터 치료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느니 한 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여 그 때의 상황을 재현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은 그 물 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군의 모자에 꽂혀 있던 꿩의 날개가 물 속에 비쳤던 것입니다. 그 것을 알고난 나뭇군은 그 후로 몸이 속히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심이 얼마나 심각한 결론을 가져왔는가를 보여주는 예화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 많은 의심이 있습니다. 바느질하다가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면 피 한방울이면 그만인데 그것이 나중에 곪고, 또 썩어서 손가락을 자르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합니다. 허리가 조금 아프면 디스크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고, 무릎이 조금 아프면 관절염이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모든 부분에 의심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1. 우리의 의심의 원인들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알지 못함이요, 듣지 못함입니다(28절). 머리로만 알고 귀로만 듣지 심령으로 들어서 심비에 새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어도 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둘째는 고난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유익을 모르는 사람으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말하기를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고난이 잠시면 견디기 쉬우나 그 기간이 길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6장 9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역시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일들이기에 이스라엘은 견딜 수가 없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의심을 하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이 계속해서 온다고 할찌라도 우리 속에 어떤 고난이 집중적으로 나를 엄습한다고 할찌라도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이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42편 2의 말씀과 같이 기가 막힐 수렁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4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성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무디가 생각하기로는 오랜 세월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으니 얼마나 구차하겠으며 그 마음은 얼마나 침울해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위로하려고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자를 방문하고 나오는 무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늘 내가 천당을 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비록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내며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심하는 이유 중에 세번째 이유는 실망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로 11절에 보면 예수님께 실망한 제자들이 의심에 빠져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적 눈으로 보았던 가룟유다는 급기야는 실망하여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이유는 네번째 이유는 세상 것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세상 지식에 따르다보면 의심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로 25절에 보면 세상 지식에 싸인 자들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사40:24). 다섯째는 창세기 3장 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할 때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의심하게 된 결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첫째로 떨어집니다. 타락하게 됩니다. 죄를 행하게 됩니다.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받는다고 의심하던 가인의 결과는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브의 의심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면 떨어집니다.
둘째로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로 31절에서 베드로는 의심하다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건져주시면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주님의로부터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이르기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을 하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3.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독수리 신앙의 지름길입니다(31절).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의심을 떨쳐버리고 비상하는 비결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앙망하는 것은 사모하여 그리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앙망하는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항상 바라야 합니다. 시편 25편 15절에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눈이 쇠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사야 38장 14절에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라고 했다.
셋째로 환난 중에도 해야 합니다.
넷째로 구원을 바라며 해야 합니다. 이사야 51장 5절에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간구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사야 33장 2절에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경외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사야 22:11에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일곱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시 63장 1절에 “내가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박한 심령을 가진 자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로 절규하는 소리에 응답하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로 8절의 과부도 절박한 심정으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독수리 같은 신앙으로 의심을 버리고 여호와를 앙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구원으로 응답하십니다(사45:12).
본문 30절이나 31절에 있는대로 다른 사람이 넘어질 때에라도 넘어지지 않고 달려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시34:5). 새 힘을 얻습니다. 성령님의 힘을 얻습니다. 능력을 소유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흐르는 강은 죽은 사해 바다를 다시 살리는 것 같은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죽은 심령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새 히믕ㄹ 얻어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 전심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독수리 신앙으로 항상 승리하고 솟구치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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