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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인생 (사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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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깜짝 놀랄 기사를 읽었습니다. 일본 경찰청이 12월 27일 밤 현재까지 전 일본에서 1년간 자살한 수효가 19,441명인데 지난해 자살 수효보다 241명이(1.2%)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 중에 경제고로 비관 자살한 사람의 수가 1818명으로 작년보다 340명이 더해 23%가 증가한 수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 83년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1월 5일 우리 방송에 의하면 지금 세계에서 제일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가 스위스이고 세계에서 제일 장수하는 나라는 일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경제 흑자를 제일 많이 내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일본에서, 세계 최장수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에서 경제 문제로 자살하는 수가 격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 천만의 현실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경제적인 여건이 인생 행복의 기조나 전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독수리 인생을 살아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볼 때 참으로 저 낮은 곳에 사는 어두운 인간 실존의 모습같이 느껴집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독수리 인생의 삶이라고 두 번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주일에 이어 우리는 독수리 인생을 계속하기 원합니다. 독수리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는 날개에 힘이 있고, 눈에 힘이 있고, 발톱에 힘이 있고, 그의 활동에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새 힘을 공급받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독수리가 어떻게 새 힘을 충전하는가 그는 새 힘을 받아 날개를 치면서 올라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생명성, 동성(動性)을 보여 줍니다.
1. 그는 계절을 따라 새 털로 바꿈에서 새 힘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계절을 따라 같은 종류의 옛 털을 벗어버리고, 다시 새털로 갈아입는 특질이 있다고 합니다. 힘 빠진 틀, 낡은 틀은 바람을 받아 날음에 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바람을 받아 힘차게 날기 위하여 새 틀로 갈아입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새 털로 새 힘을 충전시킵니다. 바로 독수리 같은 크리스챤의 삶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새 능력, 새 은총, 새 감격, 새 결심, 새 출발로 도약하는 영력을 충전시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 곧 옛 털을 벗어버립니다. 털을 바꿉니다. 새 털로 갈아입습니다. 말하자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새 옷,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새 신발로 바꿉니다. 새 가락지로 바꿉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껴안아 줍니다. 그리고 그 입에 입을 맞춥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제2의 기회, 제3의 기회입니다. 그리고 살찐 소를 잡고,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새로운 출발의 잔치를 하게 됩니다. 바로 복음의 축제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회복과 축복의 축제입니다(눅15:21-2
4). 아니 죽었다고 다시 살고, 잃었다가 다시 찾는 부활의 축제입니다. 아들의 신분과 권위가 다시 회복되고, 부자간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새 은총의 역사가 벌어지고 맙니다. 기도하므로 응답을 받아 다시 해 힘을 받고, 벌떡 벌떡 일어나고 맙니다.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살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과 교회의 기도는 옥문을 열어젖뜨리는 기적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는 새힘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결심과 소망으로 능력을 받습니다. 새 사명감에서 새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성도는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시103:5)고 하였습니다. 독수리같은 새 청춘으로 그인생을 새롭게 충전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나로 새롭도다(고후4:16)고 하였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된다(고후5:4)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하였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3-24)고 하였습니다. 마치 독수리의 생동력이 새 털로 갈아 입음에 있음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겍는 하나님임 공급하시는 사랑과 용서와 소망과 약속과 축복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새 힘을 공급받고 다시 부활의 걸음을 걸어가는 동적(動的) 삶이 전개됩니다.
2. 그는 새로운 피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물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독수리는 늙은 독수리나, 젊은 독수리를 막론하고, 모두 모두 다른 동물의 생피를 빨아 먹음으로 좋은 영양을 공급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의 독수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직접 공급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면 영생하리라(요6:51-58)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서 공급받은 반석의 생수를 가리켜 바로 신령한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고전10:3-4). 저들은 그 반석의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어, 새 걸음을 걸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레서 예수께서 친히 공급하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곱빼기로 받아 먹고 마셔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새 힘을 얻어 40주 40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왕상19:). 하나님께서 예수의 보혈을 공급하시는 방법은 바로 성령님 자신이고, 또 성령님께서 기록한 성경말씀입니다. 성령님과 말씀, 말씀과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예수의 보혈로 새 힘을 얻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3. 그는 불사조의 기백을 갖고 있기 대문입니다. 독수리를 하늘을 날으는데 지칠줄을 모릅니다. 독수리는 활동하는데 약하여 질 줄을 모릅니다. 그는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먼 곳, 큰 것에 마음을 두고 있기 대문에 아예 모기나 파리떼 따위에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독수리는 그토록 저열한 사냥감을 잡으려 하는 자를 경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삶의 거처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정하고, 빠르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수리에게 주신 창조적 본능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의 기상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사조와 같은 생명의 기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받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 보기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로, 죽은 자 같으나 사는 자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지 않는 자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자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으 가진 자로 생동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고후7:3-10). 바로 오뚜기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히11:38). 바로 우리에게 있는 이러한 불사조의 기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재창조하신 생명의 본능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재창조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진자는 세상에서 죽거나,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야 됩니다. 흥해야 됩니다. 일어나야 됩니다.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불사성의 기백(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4. 그의 장수성 때문입니다. 독수리가 얼마나 사느냐하는 수명문제는 확증을 잡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엔나 동물원에 사로잡혀 온 한마리의 독수리가 104년 이상이나 살았던 것을 볼 때 적어도 독수리의 수명은 1세기 내지 1세기 반(100년-150년)을 능가할 것이라고 하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독수리는 조류 중에 수명에 있어서는 단연 왕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있는 동적(動的) 삶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장수성, 곧 영생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는 네 청춘(시103:50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지금 세계에서 제일 육신적으로 장수하는 그룹이 ‘성직자 그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평균 연령이 75세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장수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준수에 대한 결과입닏. 하나님을 신앙하면 장수합니다. 그리고 그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장수성은 육신의 장수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믿음, 곧 영생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네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3절에 주의 전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시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로 나아오는도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 나오는 ‘주의 청년들’은 신약시대에 나타날 그리스도인들의 동적인 삶을 예어하는 말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은 1 성령님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하는 날입니다.
2 또한 예수께서 재림함으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한 영생인들이 나타날 때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독수리의 삶! 독수리 같은 크리스챤의 삶! 그것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동적인 생명의 삶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오는 것은 자연계나 영계에 하나님이 주신 공통된 진리입니다. 태초에 있어던 ‘말씀’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1:1, 4)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의 시체더미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움직였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받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구원입니다. 생명은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움직입니다. 생명은 요동합니다. 생명은 요진합니다. 생명은 소리를 치고, 생명은 부절히 생산하고 창조합니다. 그리고 생명은 부절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올라갑니다. 바로 동직인 삶입니다. 동적인 삶은, 새 힘을 받느데서 일어납니다. 새로운 피, 예수의 보혈을 받음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본능의 불사조 같은 기백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신앙에서 일어납니다. 함께 새 힘을 받아 올라갑니다. 독수리 인생
(3) 욥기 39:27-30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은신비스러운 것이다. 생은 그 자체가 신비스럽다. 우리의 지상의 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생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운 선물이다. 생 보다 더 귀중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아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이란 한 경기이다. 생은 준비, 투쟁, 그리고 보상이 잇다. 생이란 여행이다. 이것은 관찰, 경험과 그리고 목적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생이란 불확실한 것이다. 이것은 생의 길어 있어서 뿐아니라 생의 내영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생이란 짦은 것이다. 생이란 또한 영원한 것이다. 결코 생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생이란 마셔 버려야 할 전아 어나러 챠유ㅗ여 할 잔이다’고 하였습니다. 괴테는 ‘뜻 없는 삶은 이미 죽음 삶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안 리(Ann Lee)는 ‘그대는 100년을 살 것 같이 기대하고 살아라 그리고 또 내일 그대가 죽을 것인양 살아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무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을 소유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을 소유할 때,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큰 것을 하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챤의 삶을 독수리의 삶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조류계의 왕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인생 중에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따로 높은 곳에 성별의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집, 교회를 우리의 거처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독수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눈이 밝아 세상을 멀리 보고, 확실히 보고, 정확하게 보고,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처럼 동(動)적인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새 털을 바꾸어 날개가 바람을 받고, 새로운 피를 공급받아, 불사조 같은 창조 본능의 기백을 가지고 살아 간다고 하였습니다.
Ⅴ. 계대적인 장수의 삶입니다. 우리 본문 욥기 39장 30절에 그 새끼들도 피를 빠니니 살육당한 자 있는 곳에 그것도 거기 잇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비교적 그 종류가 적은 조류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새끼를 치는 장소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생각했듯이 그가 서식하는 거처가 바위 틈 낭떠러지 뾰족한 곳이나, 험준한데, 은밀한 곳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장소는 새끼 둘 보금자리로서 안성마춤이었습니다. 거기서 둥우리를 만들고, 새끼를 친다고 합니다. 독수리의 새끼만큼 안전한 곳에서 자라는 조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 인생을 출발합니다. 그 부모가 하나님의 집에서 새 가정을 시작합니다(결혼).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고, 감사하고, 헌신봉사 하면서 아이를 수태합니다. 그는 벌써 어머니의 태에서 성령님충만으로 뛰놀고 자랍니다. 마치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그 여자의 뱃속에서 6개월이나 자랐던 세례 요한이 복중에서 뛰놈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기도 중에 출생하고, 젖을 빨면서 하나님의 집에 출입을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나실인이 됩니다. 벌써 세상의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이 됩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가슴에서, 등에서, 그는 찬송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익힙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삶의 기본법칙으로 습득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인생의 기초를 출발시키면서도 도(道)의 젖을 빨고 자랍니다. 독수리는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삼습니다. 독수리는 산것을 움켜잡고 자기 둥지에로 날아옵니다. 거기서 새끼들 앞에서 갈기갈기 찢습니다. 그 때 찢긴 다른 새 짐승이나, 또 다른 먹이들이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것을 자기 새끼들 앞에 가져다 주면, 그 새끼들이 방금 찢겨 흘러내리는 먹이들의 산 피를 빨도록 가르쳐 줍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수리에게 주신 창조적 본능과 생조의 슬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신령하고 고상한 축복의 진리를 알려 주고자 함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이 찢기고, 터지고, 상하여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흘린 대속의 피를 ‘보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혈을 ‘믿음’이라고 하는 특수장치를 통하여 우리에게 수혈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를 믿는 자마다 죄에서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피흘림이 없이는 사유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영원한 속죄’를 성립시켰다고 하였습니다(히9:12).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사죄’를 성립시키고(히8:28),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히8:14).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보혈을 우리의 자손들에게 또 믿음으로 수혈히키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손 수천대에 이르는 계대적인 축복은 혈과 육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넉넉히 세상을 이기고, 영생할 수 있는 의의 자손들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주사기를 통하여 믿음으로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수혈시켜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은 죄에서 구원하고, 사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십자가의 보혈신앙 뿐이기 때문입니다. 뿐아니라 독수리를 새끼 양육에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모험적입니다. 날개가 힘을 얻고 타도록, 새끼 독수리를 자기 등에 업고 높은 하늘을 치솟아 오릅니다. 이 때 시끼 독수리는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어미 독수리의 날개에 사생결단하고 집착합니다. 이 때 발톱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고공에서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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