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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인생1 (욥39: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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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모든 싸움 이기고, 근심 걱정 벗은 후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여라 주를 앙모하는 자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길을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다니며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주를 앙모하는 자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천성문을 향하여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은혜 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 보리라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이 익명의 작시 작곡가는 영전(靈戰)하며 인생 길을 걸어가는 모든 시대, 모든 크리스챤의 신앙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며 전진하는 신앙의 기상이 마치 창공을 더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삶에다 비하고 있습니다. 우리함께 독수리 같은 삶 독수리 같은 크리스챤이란 제목으로 몇 가지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I. 지고한 왕적 신분의 삶을 알려줍니다. 독수리는 몸이 크고, 부리와 발톱이 날카로우며, 눈과 귀가 발달한 맹금류에 속한 조류계의 왕입니다. 다른 새나, 작은 동물을 먹이로 삼고 있는 매, 수리, 부엉이류에 속합니다. 사자가 땅 위에 모든 짐승 중의 왕이라고 하면 독수리는 공중을 나는 모든 새들의 왕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중에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지고한 왕적 신분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을 말합니다(롬8:14). 성령님이 친히 우리 영을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잇습니다(롬8:16). 이유는 우리는 모두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15). 신자는 모든 인생 중에 으뜸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요1:12). 이것은 결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난 것입니다(요1:13). 그래서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을 가리켜 하늘의 별들(창15:5)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습니다. 위에만 잇고 아래에 있지 않는 머리되는 자손(신28:13)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세상 중의 세상입니다. 사람들 중에 사람들입니다. 백성 중에 백성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는 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인생보다 더욱 존귀한 자입니다(대상4:9). 그래서 성경 전체는 신자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이름 부르고 있습니다.
Ⅱ. 높은 곳을 향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고상한 삶, 미래지향적 삶, 소망의 삶, 다시 말하며 비전의 삶을 보여줍니다. 욥기 39장 27절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라고 한 말씀입니다. 큰 독수리의 한쪽 날개는 4피트 이상이나 되는 큰 날개입니다. 1피트가 12인치(30.48㎝)라고 할 때 약2.4m의 길고 넓고, 크고 힘있는 날개를 갖고 잇는 새입니다. 그 묵중한 날개가 바람을 받아 높고 푸른 하늘을 치솟는 장관을 생각해 보십시오. 감히 다른 새들이 흉내도 못내는 거대한 비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 본문은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하는 말 속에는 그 어느 새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공적 비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독수리라고 하는 히브리 말의 듯이 바로 ‘높이 올라간다는 듯입니다. 박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독수리의 재빠른 동작과 올라가는 속도와 높이는 실로 놀라우며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독수리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찾아올라 가려는 듯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수리를 창조할 때 그에게 주신 기능이요, 특성입니다. 독수리의 독수리된 멋과 맛은 큰 날개로 바람을 타고 하늘을 쪼개고 높이 날아 올라감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신자들의 영적 소망 생활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이후부터(고후5:17)새로운 세계를 찾은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난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 내세, 새 하늘, 새 땅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라고 하는 독수리류의 날짐승이 시기를 알고, 기후를 알아서 겨울이 오면 바람 날개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로를 바꾸고 날아가듯이, 멸망의 항로를 바꾸어 영생의 천국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욥39:26). 바로 골로새서 3장 1절로 4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신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삶의 향방을 정하고 삽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4절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고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이 신자들은 성령님의 바람 날개를 타고 저 높은 곳에 실존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올라가는 자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올라가고, 기도를 드리며 올라가고, 찬송하며 올라가고, 감사하며 올라가고, 전도하며 올라가고, 회개하면서 올라가고,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올라갑니다. 생각이 높이 오르고, 판단이 높이 오르고, 말이 높이 오르고, 행동이 높이 오르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고상하고 고매한 소망 생활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생리요, 멋이요, 맛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재창조되고, 거듭난 생명 의식입니다. 올라가야 삽니다. 높이 올라가야 삽니다. 성령님의 바람 날개를 타고 소망의 세계로 올라가야 모든 것이 보입니다. 동서남북이 보입니다. 가까운데 것이나, 먼데 것이 보입니다. 숨이 탁 트입니다. 제대로 날을 수가 있습니다. 거기엔 사랑이 숨쉬고 있습니다. 용서와 웃음을 짓고, 모든 축복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Ⅲ. 성별의 거처, 곧 교회 중심의 삶을 보여 줍니다. 욥기 39장 27절로 28절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보금자리를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의 경우 저들의 서식처는 주로 요르단 계곡을 출발하여 바위가 많은 계곡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벼랑과 급경사에 둥우리를 만들고 살았습니다. 또한 망망한 대해, 층암절벽에 저들의 요새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잡동물이나, 잡조류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특별한 거처입니다.
그렇다면 독수리의 집은 바로 저들의 요새입니다. 안식처요, 피난처요, 보금자리입니다. 높은데 바위 위 뾰족한데 바위가 갈라진 틈에 저들은 거소를 정합니다. 바로 이러한 독수리의 성이며 요새는 우리 신자들의 피난처요, 산성이요, 요새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가서 2장 14절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술남미 처녀가 살고 있는 산간 벽촌 은밀한 장소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신자들의 거소는 갈라진 바위 틈입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을 찢고 피흘려 주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갈라진 바위 틈에 기초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거처를 가리켜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사33:16)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만세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딤전3:15).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안전 보장의 요새요,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주의 집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 천 날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의 짐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시84:4, 5, 10).
Ⅳ. 신령한 영안의 삶을 보여 줍니다. 욥기 39장 29절에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공중에 떠서 산과 들과 바다와 강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봅니다. 독수리는 바위 끝 뾰족한 낭떠러지 둥지 속에 앉아서 자기 먹이를 살핍니다. 그 눈이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독수리의 거시성 때문입니다. 그는 멀리 보고, 확실히 보고, 분별하여 보는 눈의 힘이 있습니다. 매우 명확하고 빨리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눈을 주었습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세계를 보는 육안을 주었습니다.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지안 곧 이성의 눈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신령한 영안 곧 믿음의 눈을 주었습니다. 육안이 닫힌 자는 시신경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지 만물이나, 자신의 존재도 못 보는 불행을 갖고 삽니다. 그의 행보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육안은 밝아도 이성의 눈이 어두운 자는 모든 사물 판단과 관리에 둔하여 경쟁 사회에서 도태를 다합니다. 영안이 어두운 자는 신령한 일에 둔합니다. 듣는데 둔하고, 깨닫는데 둔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둔합니다. 그래서 천국 행로에서 더둠거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여린 자, 믿음의 누이 밝은 자는 예민한 통찰력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습니다. 민첩한 행동력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축복의 용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멀리 보고, 확실히 보고, 분명히 보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경 놀음하면 고생합니다. 걸음걸이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고침을 받고 보고 가야 합니다(계3: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금년 송구영신 예배에서 새힘을 받아 올라가자(사40:31)는 축복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우리는 독수리 등에 업혔습니다. 그 인생의 삶은 독수리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가 나래치는 힘을 받아 올라감과 같은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독수리의 삶에다 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에 세상에서 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크리스챤 된 나의 복된 신분에 자부심과 행복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소망의 삶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요새와 보금자리를 잡은 교회 중심의 삶에다 구심력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령한 눈이 밝아 멀리 볼 줄 아는 거시적인 삶으로 왕적, 선지자적,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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