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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사람 예레미야의 눈물은 (렘31:33-35)

본문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 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 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 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를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 의 여호와니라.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서 꺼져 가는 등과 같사오며 상한 갈대와 같사오나 주께서 이를 아직 끄지 않으시고 상한 것을 용납하 사 주의 은혜의 자리에 두신 것을 알고 감사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이 주께서 보실 때에 합당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 속에서 만 족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죽 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 저희들이 산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시고 말씀을 접근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임할 때에 우리의 심령이 기쁘든지 즐겁든 지 슬프든지 감각을 가진, 산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안에 오셔서 여실히 심판하사 정리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같이 나와서 예배하지 못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 속 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어디에 있든지 주께 예배하므로 지내게 하시기 를 비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몸은 나왔을지라도 마음은 나오지 못한 자리 에 있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이 은혜의 깊은 곳에 말씀의 깊은 곳에 나아가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예레미야서 전체나 말씀 전체를 보면서 '말씀과 성령님의 사람, 예레미야의 눈물은' 이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대하려고 합니다. 구교는 교회에다 권위를 두었고 신교는 말씀에다 권위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권위를 두고 있는 신교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 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과오 중에 과오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귀하다, 중하다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상식적인 말이 우리에게 상식 이상으로 생명화 되어야 될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 없는 곳에 성령님의 충만함이 없습니다. 또 성령님인즉 말씀이요, 말씀 인즉 성령님이십니다. 본래 천지 창조를 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실존했지만 그 말씀 을 하셨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고 살고 있는 천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만큼 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전에는, 빛이 임하기 전에는 (말씀인즉 곧 빛 입니다.) 우주도 없고 지구도 없고 참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곧 빛으로 나타나서 공허와 혼 돈과 무질서한, 어느 것이 물인지 어느 것이 산인지 모르던 그 세계가 정 돈되었습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정돈된 것입니다. 동시에 작은 우주가 있는데, 내 마음이 곧 작은 우주입니다. 저 큰 우주 가 비밀인 동시에 이 작은 우주도 비밀입니다.
그런데 저 큰 우주 안에 말씀이 오셔서 정돈된 것과 같이 이 작은 우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에 정돈됩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사람다운 사람으 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심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해서 새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새 사람이 되 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지, 말씀을 떠나서는 신앙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들 은 그 말씀이 이제는 우리 안에서 신앙화되어야 합니다. 신앙화되는 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과 충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늘 말씀드립니다. 성서를 통해서도 우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성으로 오신 주 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으로 오신 후에 다시 새로운 말씀 을 해야 하고, 들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들었던 그 말씀, 생명화되 지 않고 말씀화 되지 않았던 그 말씀이 성령님으로 실지화 된 것뿐입니다. 말씀이 오기 전에는 누구든지 동일합니다. 말씀이 오기 전의 사람은 언 제사람이든지 다 동일합니다. 또 말씀이 온 후의 사람들도 다 동일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이렇게 귀하고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귀중 함과 절대성을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만, 이 귀하고 절대적인 말씀 이 성령님으로 내 신앙이 될 때 참 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말씀과 성령님의 사람' 이라는 내용입니다. 말씀 없는 종이 없습니다. 말씀을 받지 않은 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장악해서 귀한 종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 말씀 없이 귀한 종이 되는 법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이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전에는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에게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말씀이 오기 전에 귀한 종이 되었다 면 그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말씀을 내게서 떼 어 놓으면, 거두어 가면 나는 전혀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몰라 도 나는 그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 존경을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주의 말씀을 내게 주심과 내가 그 주님의 말씀으로 귀한 것을 누리기 때 문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도 제공할 것이 없습니다. 흠모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질로 사상으로 인격으로 돈으로 명예와 지위로 가정의 어떤 것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내용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불신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3) 그것을 보면서도 마음 속에 별다른 감각이 없었습니다. 감각이 있다 해도 그것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신앙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와 한 교인으로 한 식구로 살던 사람이 포로가 되어 천대와 멸시를 받고, 눈이 빼이고 짐승같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대한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그가 끌려가지 못하도록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를 향해서 반기를 들거나 혹은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역량 있는 사람이 못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 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 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 1:5) 이 말씀이, 전에 없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접근해 옵니다. 참담한 환경 과 처지에 있으면서도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 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또 임한 후에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 (예레미야 1: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답변하는 말이 '슬프도소이다. 보십시오, 나는 아 이입니다. 말할 줄을 모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나서부터 선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나서부터 하나님의 말씀 에 감격되어 말씀의 포로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가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 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접근했을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답 을 했거나 옳은 답을 하지 못했거나)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사로 잡았고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을 알 뿐만 아니고 그 위대 함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평범한 인간으로 지냈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접근해 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포위되면 다른 생명, 다른 마음, 다른 인격으로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놀라운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왔을 때, 예레미야가 바로 '아멘' 하고 말씀에 뛰어 들어 가서 말씀을 받지 못하고 주저했습니다. 주저한 시간이 얼마 동안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말씀이 왔어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저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 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9절)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참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접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신 그 입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는 입입니다. 입이 곧 말씀이요, 말씀이 곧 입이 됩니다. 참 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 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10절) 예레미야가 본래 마음에 품었던 일로써 그것이 무르익어서 이루어진 사 실이 아니고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뽑는 일, 무너뜨리는 일, 파괴하는 일입니다. '너를 만민 중에 세워서 뽑을 것을 뽑고 파괴할 것을 파괴하고 무너뜨 릴 것을 무너뜨리겠다. 그 다음에 건설할 것을 건설하고 심을 것을 심겠 다'-그를 통해서 하실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파괴하고 뽑고 무 너뜨리는 일입니다. 그 후에 심고 세우시고 건설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오셔서 파괴해야 될 것이 참 많습니다. 무너뜨려야 될 것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세우시고 심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허는 일을 지나서 심고 세우시는 일이 되 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위대한 생명입니다.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예레미야와는 달리 말씀이 와서 그 말씀이 입이요, 입이 말씀이 된 후에 그는 대선지자, 위대한 자가 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말씀과 내 심령의 관계는 그림의 떡 같이 그저 구경만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접근해 주시는 그 심 령 안에서는 말씀이 그와 함께 하면서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결국 그는 말씀의 사람, 성령님의 사람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나 하나님 앞 에서나 백성 앞에서 위대하고 귀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 고 그를 접근한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접근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방불합니다. 멸망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 나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저 부정 모혈로 나서 여자로 태어났든지 남자로 태어났든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어머니 아버지 앞에 서 육으로 살다가 죽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왜 그렇게 소중한가, 말씀이 내게 접근해서 나를 영접 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귀한가 하는 점을 우리가 함께 말하고 느 끼면서 주의 은혜를 입으려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아주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되는 일에 있어서 아주 핵심 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귀한 것을 천히 여기고 천한 것을 귀히 여기는 일이 우리 생활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말씀' 하지만 사실상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도 크고 귀한 말씀이요, 우리에게도 크고 귀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우리가 아는 대로 40년 동안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백성을 위해서 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오지 않았다면 예레미야 자신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울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백성을 위 해서 울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말씀이 왔을 때에 하나님을 대신해 서 우는 사람, 백성을 위해서 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대선지자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는 자기 심령 의 문제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 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5)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한 말이 '오호라, 화로다. 나는 죽었도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중에서 사는, 입술이 더러운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음이라.'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여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죽게 되었다.' 하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화로다.'-말씀을 접근하기 전의 이사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 같습니다. 달리 생각하기보다도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 귀합니다. 손해 가지 않습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된 핀 숯불을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절) '나는 화로다, 죽게 되었다.' 하고 통곡하고 있을 때에 스랍 중의 하나가 단에서 화저로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에 입에 댔습니다. 그가 체험한 이 것이 환상 중에 본 것이든 마음 속에 생각한 것이든 이사야 안에서는 큰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나와 여러분 안에도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큰 변동이 일어나면 새로운 삶, 새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7절) 단에서 취한 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대시며 보라고 하십니다. '보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너도 보고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게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보고 확인합니다. 육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내 죄 와 사망이 주님께로 옮겨 가는 것도 보고 주님의 아름답고 의로운 것이 내게로 오는 것도 봅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의 입에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닿은 적이 없 습니다. 닿은 적이 있으면 분명히 새 것이 나옵니다. 배워서 아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접근해서 닿는 그 순간부터 분명히 달 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심혼 골수를 쪼개고 해부해서 전의 것을 정리하고 새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 닿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네가 이것 저것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 고 먼저 네 자신의 죄와 죄악을 사한다는 것입니다. 참 귀합니다. 하나님 의 말씀이, 약속이, 주님의 죽으심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닿을 때에 먼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죄와 죄인이 사하심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죄인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일이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에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우주는 우주대 로 모든 만물이 정리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죄와 죄인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죄와 상관 없는 사람, 죄인과 상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와서 닿지 않으면 여러분의 죄악 이 사하여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닿으면 그 말씀이 죄와 사망을 우리 마음 속에서 제하십니다. 이 말씀을 왜 하는고 하면,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예레미야나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이사야나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바울이나 말씀이 접근하기 전의 여러분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접근한 후에는 새 일이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었는가' 하고 원 망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그러나 들었다면 왜 들은 바 말씀이 죄와 사망 을 내 마음에서 옮겨 주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사 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5)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음성을 듣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 겨졌다 하는 말씀이 분명한데 왜 말씀을 듣기 전과 후가 일반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망한다 해도 여러분은 원망하는 데 참여하지 말고 내 가 들은 말씀이 앞서 간 성도들에게 일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을 다시 묻 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람직합니다. 말씀 없는 선지자가 없습니다. 말씀 없는 주의 종들이 없습니다. 만일 말씀이 없이 주의 종이 된다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말씀 없이는 일평생 동안 원망 없이 밭을 갈 리가 없고 자기 없이 양을 먹일 리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지 못합니다. 또 주인이 종을 앉히고 종을 대우 하는 일도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과 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잊어 버리면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을 붙 잡아야 됩니다.
또 사실과 함께 기도해야 됩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와서 완전히 일하기까지 나 자신을 제공해야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 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사야 6:8-9)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해라.' 이것이 이사야의 사명입니다. 참 어려운 말이고 한편으로는 참 두려운 말 입니다. 만일 우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 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이것은 참 불가피한 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지도자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애 국자요, 독립가요, 지도자로서 그 사상과 역량을 길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별로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지도자다운 지도자, 모세다운 모세로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접근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왔을 때부터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 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 사실 을 바로에게 가서 전하라고 했을 때 모세는 자기가 말이 능한 사람이 못 된다고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이 말을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말씀이 와서 말씀이 말씀을 시행할 수 있는 일로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이 오고 그 말씀 자체가 내 안에서 시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인성으로 계시 던 주님이 선생이라고 하면 성령님으로 오신 주님은 선생에서 그치지 않고 들은 말씀을 능히 실행할 수 있는 분(성령님)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 을 드립니다.
나는 입술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자기 자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주님이 그를 쓰시기 전 에는 그가 하는 말대로 말이 능하지 못하고 입술이 뻣뻣해서 아무 곳에도 쓸데 없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자꾸 사양을 하니까 다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 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내 말이 네 입과 함께 하겠다.' 참 귀합니다. 만일 우리 입이 주님의 말씀이 함께 하는 입이라고 하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모세는 계속해서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 시옵소서. 나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합니다. 모세는 감당할 수 없다 고 자꾸 사양하고 하나님 편에서는 기어이 그에게 가라고, 말씀을 감당하 라고 하십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출애굽기 4:15) '그의 입'은 누구를 말합니까 아론입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 께 있겠다.' 참 귀한 말입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라 성서 말씀이 그에게 실행될 때에 실천 될 때에 그는 참 존귀한 사람입니다. 천하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불의의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모세가 된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치리라.' 하 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실이 없었다면 그가 애국자로 독립자로 지도자로 아무리 이상과 사상을 길러 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바로를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모세는 바로를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입과 함께 있어서 그의 행할 것을 가르치신다는 말씀은 그를 보장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오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그 말씀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장하는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십니다. '내 말이 네 입과 그의 입 에 있어서 네가 어떤 말을 하든지 그 말을 내가 보장하겠다.' 하시는 내용 입니다. 이만큼 귀합니다. 모세나 아론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세와 같이 뚜렷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접근하면 그 말씀은 우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성결도 의도 다 보장합니다. 나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똑똑 하거나 선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기드온도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오기 전과 후가 전 혀 다릅니다. 얼굴 모양이나 키나 생활 습관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말씀이 오기 전과 후가 참 다릅니다. 말씀이 오기 전에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얼굴도 못 내밀고 자기가 농사 지은 것을 마음대로 타작하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즙 틀에서 가만히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왔을지라도 그 말씀이 자기 마음 안에 풍성하기까지 기드온이 어떻게 했는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시 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참 능력 있게 행 하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이 무릎을 꿇고 기다린 일, 제단을 쌓은 일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6장)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했을 때도 그는 갈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아직 갈 마음이 우러나지 못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 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사 사기 6:15) '우리 집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제일 작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아 주 연약합니다. 연약한 아비 집에서도 나는 제일 작은 자입니다. 나는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차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 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자 기드온은 '내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면 하나님의 실존이면 주 되신 표징을 내게 보이십시오. 조금만 기 다려 주십시오. 내가 가서 제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고 가서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위 위에서 제물을 드릴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와서 그 제물을 다 살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흠향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나는 나 나름대 로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을, 주님 앞에 드리는 기도를 (그 기도 안에는 여러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때까지 받으실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너무 당 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 제물 자체가 불신 가운데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믿음 가운데서 드린 것이라 해도 불로 응답하기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기 까지 기다리고 그 안에 엎드려 있는 것은 참 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드온에게 임한 후에 기드온은 그 말씀에 힘을 얻어 서 바알의 단과 신상을 부수는 일을 합니다. 만일 기드온에게 임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임했다고 하면 기드온이 아니고 말씀이 임한 그 사람이 그 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게 되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갈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기드온이 하나님의 실존을 더 확신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 에 기도하고 실물로 구했습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 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사사기 6:37) 어떻게 보면 참 용렬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용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밤을 지내고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일어나 보니까 사면에는 이슬이 오지 않았는데 양털에만 이슬이 왔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사사기 6:39) 이번에는 사면에는 이슬이 오고 양털에만 이슬이 안 오기를 구하고 다 시 기도하면서 밤을 지냅니다. 늘 말씀하지만 그 밤은 우리의 24시간의 밤 이 아닙니다. 얼마가 되는지 모릅니다. 밤을 지내고 일어나서 보니까 기도의 사실대로 지면에는 다 이슬이 왔는데 양털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실존을 확 인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기드온은 전에 할 수 없던 일을 합니다. 나 가서 자기의 동역자를 불러서 미디안을 치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 사실이 오기 전에는 기드온은 곤고했습니다. 힘이 없었습니다. 나가 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왜 하는고 하면 성경 중에서 나타나는 사실을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 주의 종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귀한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줄을 모릅니다. 혹 귀한 줄을 안 다 해도 머리에서만 돌아가는 앎이지, 그 말씀 안에 들어가서 걷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왔어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지금 말씀한 그들같이 기드온과 같이 일어서서 나가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왜 힘이 없느냐 하면 말씀이 접근 했다 해도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내가 그 말씀 안에서 걸어갈 수 있는 실 지가 이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귀해도 믿어서 실행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오기 전과 온 후가 굉장히 다 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에스겔 2:1-
2)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하나님이, 말씀이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이 말씀이 평범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일으 켜 세우십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에스겔 2:8)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참 귀합니다. 이 장면이 이 사 실이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 와야 되고 또 온다고 하면 놀라울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말씀 을 들을 때에 패역한 족속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패역한 족속은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말씀은 똑같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패역한 족속과 그렇지 않은 족속이 다릅니다. 사람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씀을 먹는 사람과 말씀을 먹지 않는 사람이 그만큼 차이가 납니다. 패역한 족속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지 않습니다. 같이 듣는 것 같 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입을 벌리고 먹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생명이 죽습니까 멸망 받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패역한 족속 같이 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내가 네게 주는 것을.'-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부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내가 직접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흡수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이 떡을 먹는 자, 이 피를 마 시는 자.'-주님의 살을 먹는 법이요, 주님의 피를 마시는 법입니다. 이것 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아멘 할 때에 참 귀합니다. 이런 말이 우리에게 어 색한 말로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에스겔 앞에서도 이 말씀이 떡이 아닙니다. 아침 저녁으로 먹는 떡이 아닙니다. 아침 저녁으로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은 '내 가 네게 이르는 말씀을 먹으라.' 고 하십니다. 귀 있게 들어야 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마시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배 속에서 생수가 되어 영원하도록 흐르리라.'-다시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다시는 물을 길으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왜 배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는 물이기 때 문입니다.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 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 2:9) 따라서 하십시오. "말씀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참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를 향하여 펴 진 손이 있는데 그 손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두루마리를 나를 향하여 펴셨다는 이 말을 이해하십니까 이해해야 됩니다. 나를 향하여 펴셨다.-본래는 봉 한 책이요, 덮어 두는 것이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향하여 주시기도 하고 그가 나를 향하여 펼치시기도 합니다. 그가 내게 펼치시는 것이 없으면 영원히 비밀입니다. 영원히 비밀입니다. 이것이 비밀된 사람은 패역한 사람입니다. 도덕과 행위에서 패역한 사람이 아니고 말씀에 대해서 패역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기억 해야 됩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지금 누구를 위해서 펴십니까 나를 위해서 펴십니다. 내게 펴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가 내게 펴시니까 비 로소 압니다. 비로소 내 마음 속에 펼쳐집니다. 펼쳐져서 내가 보니까 그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 까 신구약 66권을 다 통틀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향하거나 그의 백성 을 향하신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께서 애가와 애 곡을 알게 하시는 일이 참 귀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오래 전부터 참 많이 해 왔습니다. 하나님 의 말씀은 전체가 우리를 향하신 애가요, 애곡이요, 또 재앙의 말씀이라 하는 것을 설교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향하 신 애가나 애곡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 니까 내가 무식해서 그렇습니까 그가 내 안에 펼쳐 주셨다면 남은 몰라도 나는 압니다.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압니다. 계시로 압니다. 계시란 덮여 있던 것을 열 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열어서 보이십니다. 자,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의문이라고 하면 이 말씀은 영 원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또 패역한 사람들에게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사람에게는 의문이 아니고 확실한 것입니다. 애가와 애곡입니다. 오늘날 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역사 이래로 수많 은 사람들이,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었습니다. 이 권위 있는 말씀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애가로 애곡으로 믿고 받아 들이는 사람이야말로 극히 귀한 사람입니다. 숫자적으로 귀하고 질 적으로 귀합니다. 왜 우리 마음 속에 신령한 눈물과 신령한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까 내 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얼음장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애가와 애곡으로 내 마음 속에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백성을 향한 눈물인데 하나님 의 애가와 애곡이 그에게 밝아졌기 때문에 그의 생각도 달라지고 눈물도 달라진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애 가와 애곡을 알게 하시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귀합니다. 남들은 흠모하지 않아도 귀히 여기지 않아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 가와 애곡을 알게 되는 것은 참 귀합니다. 세상이 이것을 흠모하지 않아도 교회가 이것을 이해하지 않아도 이 애가와 애곡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살 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펼치시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그것을 내 앞에 펴시 니' 하는 말씀은 '내 말을 네 입에 두겠다'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아모스 5:1) 누가 지었습니까 이 애가는 누가 지었습니까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지으신 애가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이것은 알아야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 사실을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유가 없습니다. 바울도 모세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기드온도 에스겔도 앞서 간 성도들 이 모두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들었습니다.
자기를 향한 애가와 애곡이 마음 속에 왔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애가요, 애곡 인 것을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살았습니다. 말씀 없는 주의 종들이 없습니다. 말씀이 그 안에서 일하지 않는 종들 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속에 애가와 애곡을 펼쳐 주시지 않으면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록하신 애가와 애곡을 알 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이 임하기 전에는 마른 막대기입니다. 바울도 마른 막대 기요, 이사야도 마른 막대기요, 예레미야도 마른 막대기입니다. 또 다른 말씀으로는 잡목입니다. 화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에는 누구든 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불태우기 위해서 준비된 화목일 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 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 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 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 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 당하겠느냐. (에스겔 15:1-5)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기 전에는, 애가와 애곡이 펼쳐지기 전에는 불에 타다 남은 그슬린 나무입니다. 또 피투성이입니다. 아무 곳에도 쓸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접근하면서부터 피투성이, 화목이 왕후가 되어 나아갑니다. 이것이 성서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말씀을 붙잡고 나가야 됩니다. 패역한 사람처럼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왔 을 때에 내가 그 말씀을 깊이 알고 또 그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인성으로 계실 때에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에 게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 말씀을 행할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말씀을 행할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습니다.' 하고 겸손히 받으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셔서 나로 하여금 그 말씀과 함께 진행할 수 있는 힘을 갖다 줍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풍성입니다. 이렇 게 한 걸음 더 나가야 됩니다. 이제 이것을 거친 다음에 예레미야의 눈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 게 아무리 눈물이 많다 해도 눈물다운 눈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눈물이 없습니다. 그 아름답고 귀한 눈물은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을 거쳐서 충만함과 내주함으로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이 펼쳐진 후에 거기서 나옵니다. 그 눈물이 없으면 아직 눈물 없는 사람입니다. 눈물은 두 가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한 눈 물입니다. 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환경과 처지가 마음에 맞지 않을 때에 흘리는 눈물, 남편을 위한 눈물, 아내를 위한 눈물, 자녀를 위한 눈물, 자기 사업을 위한 눈물, 다른 사람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아서 서러 워서 흘리는 눈물, 이런 눈물은 사람이라고 하면 다 있습니다. 이 눈물 외에 타자를 위한 눈물이 있습니다. 이 예레미야의 눈물은 자 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고 타자를 위한 눈물입니다. 이 타자의 눈물은 참 귀한데 이런 사실이 극히 드뭅니다. 또한 다른 면으로 볼 때 신앙에는 두 가지 눈물이 있습니다. 불태우기 위해서 준비된 화목 같은 우리가 아름다운 왕후가 되는 것은 먼저 통회의 눈물로 시작됩니다. 통회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눈물입니다. 도덕적으 로 내가 잘못했다, 간음했다, 살인했다 하는 회개는 아주 약합니다. 근본적 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던 것이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신령한 회개가 참으로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신령한 회개를 모 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이 와서 내게 역사할 때에 이 신령한 통회가 있습니다. 통회 없이 신령한 신자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또 통회 후에 감격 없이 신자가 되는 법도 없습니다. 바른 관계를 맺은 후에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여러분이 아멘 할 수 있습니까 통회 없이 신자가 되는 법 이 없다 했을 때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아직까지 '나는 그렇지 못하다, 아직까지 내가 모르겠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일은 눈물이 없어도 됩니다. 눈물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주님과 나 사이에는 눈물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눈물이 있기 마련이고 그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불신 과 의혹을 풀게도 하고 또 그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강하고 담대하 게 세우는 여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와 나 사이에는 분명히 눈물이 함께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탕자가 눈물 없이 아버지 앞에 돌아오는 길이 없습니다. 눈 물을 흘렸다는 말은 없지만 탕자의 '나는 이제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는 부르짖음에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통회의 눈물과 함께 돌아온 것이 탕자요, 그 후에 생각 이상으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 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를 보고 느끼는 탕자는 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에게는 이런 회개의 눈물이나 감격의 눈물이 없습니다.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이론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심 령 속에서 뽑힐 것이 뽑히고 파괴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야 될 것이 무 너지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알고 또 무엇을 통해서 됩니까 눈물을 통해서 내가 압니다. 눈물을 통해서 주께서 나를 뽑는 것도 파 괴하는 것도 무너뜨리는 것도 내가 압니다. 나아가서 세우시고 건설하시는 것도 감격과 감사의 눈물 없이 되는 법이 아닙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시간에 오늘 도 성령님과 말씀의 사람, 앞서 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을 주께 드렸습니다. 본래 그들이 말씀의 사람도 아니요, 성령님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말씀되신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화목 같은 그들을 왕후로 삼 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안에서 이 말씀이 멸시 받는 말씀이 되 지 않게 하시고 존귀함을 받는, 찬양하고 노래하는 말씀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말씀이 없이는 우주도, 말씀이 없이는 신앙 도, 우리의 생명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와서 펼쳐져서 나를 향한 주님의 애가와 애곡을 알 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는 잘지라도 주께서 깨어서 일해 주시고 권고해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 때가 가기 전에 나 자신이 늙어서 쇠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펼쳐지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주 를 기다리고 주를 흠모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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